불황은 드라마 속 여성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만화 주인공 같은 커리어우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맏며느리형 여성들이 대거 등장했다. 시대상황을 반영한 설정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지만, 「여성은 어려운 때일수록 희생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잘못된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은 대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전문직 여성이었다. MBC <신데렐라>의 이승연,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최진실, <예감>의 이혜영, KBS 2TV <첫사랑>의 이승연과 최지우.
착하고 귀여운 이들에겐 속썩이는 남편 대신 낭만적 애인이 있었다.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왕자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극복한다. 우연의 연속 속에 늘 행운을 거머쥐는 이들은 보통 여성들에겐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꿈의 공주님이었다.

그러나 최근 신설된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이들과 전혀 다르다. 예전 같으면 주인공의 친구나 이웃집 아주머니, 혹은 못된 시누이쯤으로 묘사됐을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KBS 2TV 토요시트콤 <행복을 만들어 드립니다>의 중심인물은 착하고 수더분한 맏며느리 이영자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세 딸에 하루종일 시달리면서도 군소리 한 번 하지 않는다. 같은 채널 아침연속극 <결혼 7년>의 주인공 전인화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시집살이를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1TV 일일극 <모정의 강>은 고아로 태어나 사업가로 자수성가하는 박지영의 고단한 삶을 과장없이 그리고 있다.

MBC 주말극 <그대 그리고 나>의 주인공 최진실은 능력있는 직장여성이자 대가족의 맏며느리다. 임산부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무급휴직당하고 부족한 생활비에 말썽 많은 시댁 식구 걱정까지 겹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수목극 <육남매>의 장미희는 전형적인 60년대 어머니의 모습을 연기한다. 자식들을 위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는 전통적 어머니상이다.

일일연속극 <보고 또 보고>의 여주인공은 야무지고 억척스러운 간호사 김지수다. 앞으로 층층시하 집안의 맏며느리로 들어가 만만치 않은 고생을 겪게 된다. 아침드라마 <맏이> 또한 맏딸이자 맏며느리인 박상아의 힘겨운 세상살이를 눈물겹게 묘사하고 있다.

SBS 신설 주말극 <사랑해 사랑해>는 홀몸으로 시댁식구들과 친정 식구, 세 자녀를 부양하는 맏며느리 고두심의 이야기다. 집안의 장녀인 김지호도 자신의 꿈을 접고 동생들의 학업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일일극 <서울탱고>의 박정수, 이응경도 둘째 가라면 서러운 순종형 아내들이다.

이처럼 맏딸, 맏며느리형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들은 대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그만큼 시청자들이 공감을 얻고 있다는 뜻. 거품에 둘러싸여 허공을 떠다니던 드라마 속 여인들이 비로소 마른 땅에 두 발 딛고 힘찬 걸음걸이를 시작한 셈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여성 묘사에 우려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최근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매스컴모니터팀은 MBC <육남매>에 대해 『공부 잘하는 딸이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가발공장에 취직한다는 설정은 시청자들에게 어려운 때일수록 여성이 희생해야 한다는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그대 그리고 나>의 최진실이 큰 반발없이 무급휴직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나, 그외 여러 드라마 여주인공들의 애처로운 희생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도 개선해야 할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 1998년 3월 11일 세계일보 이나리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