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연애감정에 푹 빠진 두 선남선녀가 주인공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MBC 주말연속극 <그 대 그리고 나>가 인기몰이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드라마의 중심고리는 엎치락뒤치락 연애 끝에 막 결혼에 골인한 수경(최진실)과 동규(박상원)지만 극적인 갈등과 재미는 오히려 그 양쪽의 가족들, 특히 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수경이 감당하 기 만만치 않은 시동생들과 시아버지에게서 나온다. 극단적인 상황설정이나 과장된 사건전개에 의존하는 대신, 저마다 갈등요인을 잠재한 인물들을 풍부히 포진시켜 긴장과 재미를 유발하는 이 솜씨의 주인공은 <전원일기>의 12년 작가 김정수(48) 씨.

가진 것은 없어도 허세와 입담은 버리지 못하는 뱃사람 동규 아버지(최불암)는 전남 여수에서 보 낸 작가의 어린시절 기억 속에서 친구 아버지들 모습을 되살려낸 것.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흔히 술주정하는 모습, 권위적이면서도 실생활엔 무능한 모습으로 그려질 법하지만 작가는 "때로는 비 굴해지고 사기도 쳐가면서 돌파구를 만들려는 끈질긴 아버지, 통쾌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내려 한다.
최불암 씨와는 <전원일기>말고는 이번이 처음인데, 불변의 '김회장'에서 변신을 이끌어내기까지 는 작가의 빚갚음이 한몫했다.

"늘 미안했어요. 최불암 시리즈까지 나오는 걸 보면서 김회장을 너무 화석화된 인물로 그려내지 않았나, 연기자를 틀에 가둬서 박제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고요. 영규 아버지 역할보고 처음에는 절대 안 하신다고 하셨어요. 뻥도 세고, 잘못하면 체면 구기는 역이잖아요. 이거는 선생님을 두고 쓴 역이다, 이러면서 설득했죠."

동규 아버지 마음도 그럴까. 작가의 애착은 버젓한 대학 나와 멀쩡한 직장 다니는 맏이보다는 건 달끼 넘치는 둘째 영규(차인표 분)에 한층 쏠린다.

"덜 배우고 덜 가져서 상대적 박탈감, 피해의식이 많은 영규 같은 인물이 어른으로 성숙하는 과 정을 그리고 싶죠."

캐스팅 땐 좀 불안하던 차인표의 연기도 TV에서 1회를 보고 "내가 그리고 싶던 영규가 저기 있 네" 했을 정도로 흡족하다. 막내 민규 역의 송승헌은 청바지 광고 모델 시절부터 점찍어 놓고 최 종수 PD에게 적극 추천했다. "기량 여부를 떠나 느낌이 있었거든요. 엄마 없는 아이 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 이런 집에 시집 온 수경의 운신에는 상당한 현명함이 필요할 듯 보인다.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는 거고, 시댁 식구는 '시' 자도 싫다는 요즘 여성들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다"는 작가 의 기획 의도가 혹시 양보심 많은 '착한' 며느리가 갈등 요인을 피해 '똑똑하게' 처신해 평화를 가 져온다는, 가족주의 드라마의 보편적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드라마의 재미란 인간을 보는 맛"이라고 요약하는 작가는 적어도 한가지는 약속한다.

"수경이는 식구들이 자기 생일 잊었다고 혼자 징징 짜는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능동적이고 진취 적인 여자, 시댁일에도 정당하게 개입하는 여자가 팔자 센 여자가 아니라, 다같이 행복을 가꿔가 는 여자란 걸 보여 줄 겁니다."

- 1997년 11월 19일 중앙일보 이후남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