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1 별장
수목이 우거진 사이로 바다 또는 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별장.
넓은 잔디밭 한 켠에 있는, 작지만 잘 꾸며진 풀에서
미래가 한 마리 인어처럼 수영을 하고 있다.
현회장과 새파랗게 젊은 부인이 선그라스를 끼고
풀 사이드의 선탠 베드에 나란히 누워 일광욕을 하며 수영하는 미래를 보고
있다.
현회장의 부인은 미래와 나이차이가 거의 없어 보인다.
현회장 당신도 수영하지 그래.
부인 난 싫어. 머리에 물 묻히는 거 싫어하잖아요.
젊은 부인, 갑자기 자기 팔뚝을 손바닥으로 탁 때린다.
현회장, 돌아본다.
부인 (신경질적으로) 어으, 모기가 있네. 관리인이 약을 안 쳤나?
현회장 어디?
부인 어으, 가려워. (막 긁는다)
현회장, 부인의 팔을 잡아당겨 들여다보다가 손끝에 침을 묻혀 발라준다.
부인 (팔을 빼며) 어으, 더러워.
현회장 긁지마. 덧 나.
부인 관리인한테 따끔하게 말 좀 해요. 우리 내려올 땐 약 좀
많이 치고 벌레 같은 거 없게 하라고.
현회장 당신이 안주인인데 이제 그런 일은 당신이 좀 시켜.
부인 어디 내 말을 들어야지. 관리인도 날 우습게 본다니까.
현회장 허허허허...
부인 쟤는 시집 안 보내요?
현회장 보내야지.
부인 회사는 뭐하러 다니는 지 몰라? 빨랑빨랑 시집이나 가지.
현회장 때 되면 가겠지.이야.... 정말 한 마리 인어 같지 않아? 내
딸이지만 정말 예뻐. 안그래? 예쁘지?
부인 저 나이엔 다 예뻐요. 여잔 딱 스물 다섯까지라니까.
현회장 (부인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당신은 더 예뻐.
미래, 물 속에서 나오다가 두 사람의 수작을 못마땅한 얼굴로 힐끗 보고
가운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가 앉아 쥬스를 마신다.
부인 (선그라스 너머로 미래를 신경 쓰며) 참, 친구들이 별장
구경하고 싶다는데 다음 주말에 데려와도 되죠? 나, 다
약속해 놨거든.
현회장 그래. 맘대로 해.
미래, 갑자기 눈꼬리를 치켜 뜬다.
미래 그건 안돼요.
부인 어머, 왜?
미래 음... 나도 다음 주에 여기서 약속 있어요.
부인 무슨 약속?
미래 (막 생각한다) ... 그러니까, 음... 친구들 오기로 했어요.
부인 어머, 여보, 나 다 약속해놨단 말이야. 어떡해?
현회장 (난처하다. 미래에게) 꼭 그 때 해야 되냐? 다음에 하면
안될까?
미래 안돼요.
미래, 벌떡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는데 뒤에서 두 사람의 소리가 들린다.
부인 (들어가는 미래를 째려보며 회장에게 아양을 떤다) 어떡해,
회장님.
현회장 미래가 약속이 있다는데 당신이 양보해야지, 뭐.
부인 내 체면은 뭐가 되고?
현회장 당신, 차 바꿀래?
부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응?
미래, 멈칫 섰다가 입술을 깨물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S #2 지하주차장 (밤)
텅 빈 주차장에 진상의 차가 들어와 선다.
진상, 차에 앉은 채 잠시 고민하다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간다.
S #3 복도 (밤)
비상등만 켜져 있는 컴컴한 복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진상, 주위를 둘러보며
내려 출입카드를 카드판독기에 주욱 긋고 안으로 들어간다.
S #4 다른 복도 (밤)
유리벽 안에 대형 서버들이 불빛을 깜빡이며 서 있는 중앙통제실.
진상, 복도를 따라 걸으며 컴퓨터들을 쭈욱 훑어본다.
출입금지 표지가 붙은 문안에 있는 책상에서 졸고 있는
당직 시스템 관리자가 보인다.
S #5 사무실 (밤)
캄캄한 사무실.
진상, 어두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자기 자리에 앉아 컴퓨터의 전원을 켠다.
점점 밝아지는 모니터의 빛이 진상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진상, 모니터 앞에 앉아 초조한 얼굴로 자판을 두드리려는데 진상의 뒤에서
의자를 붙이고 자고 있던 만호가 슥 일어난다.
만호 뭐하냐?
진상, 숨이 멎을 정도로 놀라 만호 쪽을 홱 돌아본다.
만호 왜 그렇게 놀래?
진상 .... 뭐하는 거야, 지금? 빈사무실에서.
만호 너야말로 불도 안 켜고 뭐하냐?
만호,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불을 켠다.
진상, 애써 당황함을 감추며 괜히 서랍을 뒤진다.
만호 무슨 비밀문서라도 찾냐?
진상 (뜨끔하지만) 비밀문서는 무슨? 일이 좀 남았는데 자꾸 신경
쓰여서 말이야. 넌, 노는 날 웬일이냐?
만호 가맹점 좀 돌아보고 들어가려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아으...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아주 뻗어서 잤네?
진상 이 시간에?
만호 낮에 문 여는 술집 봤냐?
진상 내가 충고 한마디할까?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무작정 찾아다닌다고
일이 되는 건 아냐.
만호 뭐?
진상 회원을 백날 모집하면 뭐해? 카드를 쓸데가 없는데. 내가 기껏
모집한 회원들한테서 항의전화나 받아야겠어?
만호 (기가 막혀 웃는다) 그래서?
진상 찾아보면 얼마든지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텐데. 내가 좀 가르쳐줄까?
만호 됐어. 난 내 방식대로 할 테니까, 넌 니 일이나 잘 해. (나간다)
진상, 만호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 복도를 확인하고 돌아온다.
진상, 다시 자기 자리에 앉으려다가 문득 만호 자리를 돌아보고
천천히 만호의 자리로 가컴퓨터의 전원을 켠다.
S #6 거리 (밤)
네온이 불타는 거리.
만호, 어느 술집 입구에서 덩치 큰 기도들에게 밀려 나온다.
만호 알았어. 알았어. 이거 놓고 얘기합시다. 가면 될 거 아녜요.
기도들, 만호를 거리쪽으로 확 밀어버린다.
만호,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선다.
만호 (들어가는 기도들 뒤에 대고) 사장님 오시면 에이스
카드에서 왔다 갔다고 꼭 좀 전해주세요.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기도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한숨을 팍 내쉰다)
어으,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만호,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기 시작하다가
고급 술집 앞에 서 있는미래의 차와 똑같은 차를 발견한다.
만호, 다가가 안도 들여다보고 뚜껑도 괜히 툭툭 쳐보다가
술집 쪽을 돌아본다.
S #7 술집 안 (밤)
고급스럽게 실내가 꾸며진 술집 안.
스탠드도 있고 플로어에는 몇 몇 남녀가 춤을 추고 있다.
만호, 안으로 들어와 둘러보고 미래가 없자 그냥 나가려다가
플로어의 기둥에 붙은 거울 앞에서 격렬한 헤드뱅잉을
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혹시나 하여 유심히 바라보는데 음악이 잔잔한 음악으로 바뀐다.
격렬하게 춤을 추던 여인, 음악이 바뀌자 춤을 멈추고 비틀거리며
만호 쪽으로 다가온다.미래다.
미래, 만호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미래 어머, 이게 누구야?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만호 아니, 그냥 지나다가 차가 있길래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어요. 가맹점 돌아보는 중이거든요.
미래 거짓말! 아무튼 찾아온 성의가 괘씸하니까 같이 한 잔해요.
미래, 홱 돌아서서 자기자리로 막 간다.
만호,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래를 따라가는데
미래, 안 취한 척 똑바로 걸으려고 무진장 애쓰며 걷지만 자기도 모르게
걸음이 꼬여
비틀거리고 그 때마다 얼른 자세를 바로 잡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만호, 미래를 따라가 미래의 앞에 앉는다.
미래의 자리엔 반 넘게 빈 양주병과 잔 하나, 손도 안 댄 안주가 놓여 있다.
만호 혼자 무슨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미래 왜요? 그럼 안돼요?
만호 무슨 일 있어요?
미래, 대답없이 피식 웃는데 웨이터가 잔을 갖다 놓는다.
미래 한 잔해요.
미래, 만호의 잔에 술을 따르는데 제대로 조절을 못해 술이 콸콸 넘친다.
만호, 얼른 미래의 손에서 술병을 받아든다.
만호 그만 하죠. 많이 취한 거 같은데.
미래 무슨 소리예요? 취하긴 누가 취했다 그래요? 자, 나도 한 잔
줘요.
미래, 만호가 잔을 채우기가 무섭게 한 입에 털어 넣는다.
만호, 그런 미래를 빤히 보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미래 왜 안마셔요?
만호 미래씨, 이런 모습 처음 보는 거 같은데요?
미래 나, 원래 이래요...근데 이런 데서 만나니까 좀 이상하다.
그죠? 아, 왜 이렇게 어지럽지?
만호 (진지하게) 머리를 너무 심하게 흔든 거 아니에요?
미래, 호흡을 가다듬고 안취한 척 하려고 무진장 애쓴다.
만호, 안되겠는지 미래의 손목을 잡고 일어선다.
만호 갑시다. 집에 데려다 줄께요.
미래 (손목을 빼며) 싫어. 집에 안가. (옆으로 점점 쓰러지려고
한다)
만호 (미래의 팔을 다시 잡는다) 자, 일어나요.
미래 알았어요. 알았어. 잠깐만....아,,,
미래, 갑자기 테이블에 머리를 꽝 박고 고꾸라진다.
만호, 황당하다.
만호 미래씨. ... 미래씨...
S #8 고급요정 (밤)
잘 차려진 술상을 가운데 두고 진상과 스타카드 직원이 마주 앉아있다.
진상은 약간 굳은 얼굴로 긴장하고 있다.
스타 어려운 결정 하셨습니다. 어때요, 마음에 드십니까?
진상 (어색하게 웃는다)
스타 룸살롱은 개나 소나 다 가는 데라 일부러 이쪽으로
모셨습니다. 여기가 말이죠,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하는
분들이 자주 찾는 곳입니다.
진상 아, 예.
스타 오늘은 다 잊고 마음껏 즐깁시다.
스타, 박수를 두 번 치면 문이 스르르 열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접대부 두 명이들어와 두 사람의 옆에 앉는다.
진상, 바짝 긴장한다.
스타 (접대부들에게) 특별한 손님이니까 잘 모셔라.
접대부 (진상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한 잔 받으세요.
진상 (어색하게) 아, 예.
스타 (잔을 들며) 자, 최형의 미래를 위해!
두 사람, 술을 죽 들이킨다.
S #9 미래의 차 안 (밤)
만호, 뒷자리에 널브러진 미래를 태우고 거리를 달리고 있다.
만호 (미래를 돌아보며) 미래씨. ... 미래씨. ...집이 어디예요?
(버럭) 야! 현미래! 어으, 미치겠구만. 어떻게 해야되는 거야,
이거?
만호, 호텔 불빛을 본다.
S #10 호텔주차장 (밤)
미래의 차가 선다.
만호,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미래를 툭툭 쳐보고 손목을 잡아 당겨보지만
미래가 꿈적도 않자 다리를 들어 잡아당기려다가 치마가 뒤집어질 것 같아
차안으로 기어 들어가 미래의 목 밑에 팔을 넣어
들어올려 가까스로 차 밖으로 끌어낸다.
만호, 미래를 세워보려 하지만 미래가 자꾸 바닥으로 허물어지자 할 수 없이
어깨에 둘러매고 핸드백을 꺼낸 다음, 문을 닫고
어렵게 차 키를 뽑아 차 문을 잠그고
호텔 현관 쪽으로 걷기 시작하는데 미래, 만호의 등에 토하기 시작한다.
미래 욱! 우욱! 우웨에엑!
만호, 절망적인 얼굴로 그 자리에 선다.
S #11 호텔 화장실 (밤)
만호, 세면대에서 양복 웃옷을 살살 빨고 있다.
만호, 토한 것이 대충 지워진 것 같아 냄새를 맡아보다가 토할 뻔 한다.
만호, 양복을 세면대에 콱 쳐 넣고 우악스럽게 다시 빨기 시작한다.
S #12 호텔 로비 (밤)
만호, 젖은 양복을 들고 나오다가
여자화장실에서 창백한 얼굴로 나오는 미래와 마주친다.
만호 좀 괜찮아요?
미래 (민망해하며) 네.
만호, 미래 앞에서 일부러 젖은 양복을 펼쳐 보란 듯이 탁탁 턴다.
미래 (전혀 안 미안한 얼굴로) 미안해요.
만호 갑시다.
만호, 앞장서서 현관 밖으로 나간다.
S #13 호텔 현관 앞 (밤)
미래 (따라 나오며) 저, 강만호씨.
만호 (돌아본다)
미래 미안한 건 미안한 거구요. 부탁이 있어요. 괜히 쓸데없는
소문내지 말아주세요.
만호 무슨 소문이요?
미래 밖에서 이렇게 만난 거 갖고 사내에서 괜히 친한 척 하지
말아달란 얘기예요. 무슨 얘긴지 아시죠?
만호, 기가 막혀 빤히 본다
미래 (지갑을 꺼낸다) 아, 그리고 (돈을 꺼내 만호에게 내민다)
세탁비.
만호, 미래가 내미는 돈을 보는데 십만원짜리 수표다.
만호 (너무 기가 막혀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미래 (만호의 반말에 불쾌해진다) 세탁비 하라구요.
만호, 미래를 잠시 보다가 수표를 탁 낚아채 미래의 가슴에 쑤셔 넣는다.
미래, 깜짝 놀라 손으로 가슴을 가린다.
만호 오늘 즐거웠다. 팁이다.
만호, 홱 돌아서서 간다.
미래, 씩씩거리다가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고 가버린다.
만호, 걸어 내려가다가 차 떠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
그 자리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워무는데 만호를 지나쳐 차가 한 대 서고
술이 떡이 된 진상과 스타 카드 직원, 그리고 여자 한 명이 내린다.
만호, 무심코 돌아보다가 진상을 알아보고 멈칫 선다.
진상은 거의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고 스타의 직원은 덜 취해 있다.
스타직원, 여자가 진상을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가자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스타 접니다. ... 잘 해결됐습니다. ... 예, 받았습니다. ... 예. ... 예.
스타, 타고 온 차에 다시 올라타고 붕 떠난다.
만호,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떠나는 차를 잠시 보다가
진상이 들어간 호텔 현관 쪽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S #14 외제차 전시장
진상, 마치 자기 차를 운전하는 듯한 폼으로 앉아
한 팔을 차창에 올린 채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버튼을 누른다.
외제차의 개폐식 지붕이 지잉 닫힌다.
진상, 흡족한 얼굴로 계기판과 가죽 시트 등을 둘러보는데
휴대전화벨이 울린다.
진상 네. 최진상입니다. ... 아, 지금 가는 길입니다. .....네.
진상, 전화를 폼나게 끊고 차를 다시 한 번 둘러 본 다음에
폼나게 차에서 내린다.
영업사원, 진상이 그 차를 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거만하게 다가온다.
영업 차 조옿죠?
진상 뭐, 괜찮네요.
영업 ('자식, 니 주제에 무슨' 하는 마음을 감추려 괜히 허하게
웃는다)
진상 (기분 나쁜 얼굴로 째려본다)
영업 (건성으로) 안녕히 가세요.
진상 아, 카다록하고 가격표 좀 봅시다.
영업 그러세요.
영업사원, 귀찮다는 듯이 카다로그와 가격표를 찾아 책상 위를 뒤적인다.
진상, 영업사원의 미소 뒤에 감추어진 멸시를 온 몸으로 느끼며
자기도 같이 비웃어준다.
영업 가격표가 다 떨어졌네. 살 것도 아니면서 가격표 찾는
사람이 많아서요.
진상 ....
영업 (카다록을 건네 주며) 좀 전에 타 보신 거는 한 2억 가구요.
진상 (숨이 탁 멎는다)
영업 유스트 카도 있거든요? 연식에 따라서 가격 폭이 크니까
관심 있으시면 락 주세요.
진상 중고차?
영업 중고도 폼 나요.
진상 (잠시 째려보다가) 중고엔 관심 없습니다. 잘 봤습니다.
진상, 홱 돌아선다.
영업 (큰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자리로 돌아서며 진상이 간 줄
알고 혼잣말로) 평생을 모아봐라. 되나.
진상, 문을 열다가 그 소리를 듣고 열이 확 오르지만 꾹 참으며 나간다.
S #15 사무실
장차장, 허과장, 김대리. 오대리, 만호, 미래,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다.
미래는 계속 만호를 의식하지만 만호는 미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장차장 이번에 서울백화점하고 제휴만 되면 우리 단체로 룸쌀롱 한
번 갈까? 아, 미래씨 때문에 안되겠구만. 아무튼 조만간에
최종 결정이 나니까 기대해 보자구.
허과장 잘 될까요?
장차장 누가 하는 일인데 안되겠습니까?
허과장 (재수없다) 일이라는 게 늘 그렇잖습니까?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더라구요.
장차장 지금 초치는 겁니까?
허과장 아, 되면야 좋죠.
이때 진상이 들어온다.
진상 다녀왔습니다.
장차장 어, 그래. 수고했어.
진상, 만호의 옆자리에 앉는다.
만호, 진상이 올려 놓은 서류봉투 밑에 삐죽이 나와 있는
외제차 카다록을 슬쩍 뽑아 본다.
진상, 얼른 손으로 눌러 자기 앞으로 옮긴다.
장차장 그 쪽 분위기는 어때?
진상 저희 쪽으로 거의 굳어지는 것 같습니다.
장차장 그래? 수고했어.그리고 이번에 벤처 아이디어 공모하는 거
다들 알고 있죠? 특히 이번에는 아이디어 제한이
없어요.회사와 관련된 아이디어도 좋고 전혀 뜬금 없는 것도
좋다 이 말이야. 채택만 되면 파격적인 포상금은 물론이고
아이템에 따라서는 바로 창업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한다니까 좋은 아이디어 많이 내도록. 이번 공모의 에인절이
미래씨 아버님이시지?
미래 그렇대나 봐요.
진상, 미래를 본다.
장차장 기왕이면 우리 부서에서 되야 할텐데 말이야. 자, 인생이
백팔십도 바뀔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우리 한 번 분발해
봅시다.
장차장, 일어나 나가면 직원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며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미래, 책꽂이에서 강의용 교재들을 챙기는데 진상, 다가가 거들어준다.
미래 고마워요.
허과장 (자리에 앉으며) 좋은 얘기야. 우리같은 샐러리맨들이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사장해 보겠어? 오늘부터 아이디어나
집중적으로 생각해볼까? 혹시 알아? 중도금 해결될지?
김대리 얼마나 날리신 거예요?
허과장 말도 마. 한 이천 가까이 빠졌나봐. 마누라가 알면 죽일라
그럴 텐데.
진상, 미래를 도와 교재들을 미래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로 돌아와
방금 받아온 카다록을 펴 꼼꼼히 들여다본다.
컴퓨터 전원을 켜고 부팅되기를 기다리던 만호,
진상이 보고 있는 카다록을 슬쩍 넘겨다보고 피식 웃는다.
오대리 그러게 아파트 중도금 넣을 돈으로 주식투자를 하시면
어떡해요?
만호 (모니터를 탁탁 두드리며 혼잣말로) 이게 왜 맛이 갔지?
누가 만졌나?
진상, 순간 식은땀이 좍 흐를 만큼 긴장하지만 계속 카다록을 보는 척 한다.
허과장 무슨 얘기야? 상품기획팀 한과장 있지? 그 친구는 그렇게
해서 살림장만 다 했어. 1차 중도금 낼 돈 굴려 가지고
칠백리터짜리 냉장고 샀지, 그 다음엔 드럼세탁기 샀지, 또,
오븐렌지 샀지, 잔금 굴려서 차도 바꿨대. 근데 난 이게
뭐냐고? 참, 최진상씨도 주식하지? 어때? 재미 좀 봤어?
진상 (카다록을 덮어 책꽂이에 꽂으며) 재미는요...
만호 뭘 빼고 그래? (허과장에게) 최진상씨 요즘 잘 나갑니다.
진상, 만호를 무섭게 노려본다.
허과장 최진상씨. 사람이 그러는 거 아냐.
만호 그래. 너, 혼자 재미보지 말고 정보 좀 드려.
진상 정말 아니라니까요? (만호에게 조용히) 너, 잠깐 나 좀 보자.
진상,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S #16 옥상
만호, 계단을 올라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진상에게 다가간다.
만호 왜?
진상 너, 입 함부로 놀리지 마.
만호 뭐?
진상 내가 주식해서 재미를 봤던 못 봤던 너하고 상관없는 일
아냐?그리고 분명히 말하는데 나 주식해서 재미 본 거 없어.
만호 사람이 좀 솔직해봐. 니 주제에 주식해서 재미 보지 않으면
무슨 수로 여자 끼고 호텔에 나타나냐?
진상,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진상 ...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만호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이야.
진상 이 자식이!
진상, 너무 당황하여 만호의 멱살을 움켜쥔다.
진상 니가 뭘 안다고 떠들어? 한번만 더 멋대로 나불대면 인생
끝날 줄 알아.
만호 (멱살을 잡힌 채 기가 막혀 진상을 본다) 니가 뭔데 내
인생을 끝장낸다는 거야? 내가 아직도 니네집 머슴 아들인
줄 아냐?
진상 (비웃으며) 아니면?
만호, 진상을 무섭게 쏘아보다가 진상의 손을 비틀어
멱살을 풀어내며 주먹을 치켜든다.
진상, 움찔 놀라는데 만호, 분노를 참으며 치켜든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진상을 확 밀어버린다.
진상, 뒤로 주춤주춤 밀려난다.
만호 나한테 맞을 자격도 없어, 너 같은 놈은.
만호, 돌아서서 내려가 버린다.
불안한 얼굴로 내려가는 만호의 뒷모습을 보던
진상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떠오른다.
S #17 만호네 집 옥상 (밤)
만호,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착잡한 심정으로 담배연기를 내뿜는데
집안에서 성기의 낄낄거리는 소리가 TV 소리와 섞여 들려오자 돌아본다.
S #18 만호네 집 (밤)
만호, 밥상을 들고 들어오다가 쇼프로를 보며
낄낄대고 있는 성기를 못마땅한 듯 짝
노려보고 밥상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드는데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던 성기, 발등으로
상다리를 걸어 짝 끌어당겨 반찬이 뭔가 살핀다.
밥과 미역국, 오이지, 콩장이 전부다.
만호, 숟가락을 들고 성기를 노려보다가 밥상을 다시 자기 앞으로 당긴다.
성기 누가 애 났냐? 어떻게 일주일 내내 미역국이냐?
만호, 대꾸없이 막 먹기 시작한다.
성기 모처럼 외식 좀 하면 안될까?
만호 ...
성기 넌 가끔 집에서 먹지만 난 매일 세끼를 집에서 먹잖냐?
만호 ...
성기 (벌떡 일어나 앉는다) 야, 요 앞에 말이야. 회센타가 새로
생겼드라구. 산지직송인데 오징어가 일곱 마리에 만원이야.
근데 오징어가 얼마나 싱싱한지 쌩쌩 날아 다녀. 서로
튀기고, 물총 쏘구. 회센타 앞이 맨날 물바다잖아.
만호 형이 살 거야?
성기 (잠시 보다가 밥상으로 다가와 숟가락을 든다) 먹자.
두 사람, 묵묵히 밥을 먹는다.
성기 (괜히 신경질낸다) 근데 얜 또 어디 간 거야? 집에 붙어
있는 걸 못 봐, 내가.
만호 형 일이나 신경 써.
성기 (막 먹으며) 에이, 오이지 정말 못 먹겠다, 이제. 아으.
만호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성기 ...
만호 언제 갈 꺼야?
성기 ... 너,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냐, 임마.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여?나, 인생 그렇게 안 살았다. 인생이라는 건
말이야, 공수래 공수거, 바람같은 거야.
만호 (보지도 않고) 그러니까 언제 갈 거냐고?
성기 (기가 막히다는듯) 허, 정말 웃기는 자식이네, 이 자식이.너,
내가 갈 데가 없어서 여기 이러고 있는 줄 알아? 그리고
만의 하나 갈 데가 없다고 치자. 내가 너한테 피해준 거
있냐?
이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고 철호가 들어온다.
철호 지금 피해 주고 있잖아요. 당장 나가요.
성기 (당황) 뭐?
만호 야, 철호야, 넌 빠져.
철호 당신 때문에 형이랑 나랑 얼마나 개고생 했는 줄 알아?
성기 당, 당신?
만호 야!
철호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무슨 낯짝으로 또 찾아와서 몇 날
며칠 개기는 거야?
성기 (울그락 불그락) 자식이, 어른한테?
철호 어른 대접받고 싶으면 (박스를 가리키며) 저 쓰레기들 들고
여기서 당장 나가!
성기 (눈물이 핑 돈다) 쓰레기?
만호, 철호의 귀뺨을 뻑하고 갈긴다.
성기, 깜짝 놀란다.
만호 버르장머리없이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철호, 어처구니없다는 듯 만호를 노려보며
씩씩대다가 옷가지를 가방에 쑤셔 넣는다.
만호 뭐 하는 거야!
철호, 대꾸없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만호 (철호를 따라 나가며) 야, 철호야! 철호야!
성기, 두 형제가 사라진 문을 착잡한 얼굴로 보다가
모래알을 씹는 심정으로 오이지에 밥을 먹기 시작한다.
S #19 보스의 사무실
보스는 자기 책상에서, 대협과 총련은 소파 테이블에서
조용히 자장면을 먹고 있다.
보스, 먹으면서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책상을 꽝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대협과 총련, 덩달아 벌떡 일어난다.
일동, 입가엔 자장이 동그랗게 묻어 있다.
보스 (부들부들 떨며) 강만호....그 젖비린내 나는 놈까지 날
우롱했단 말이지? 한과장.
총련 예, 회장님.
보스 차 대기시켜.
총련 예, 회장님.
총련, 잽싸게 밖으로 나간다.
보스 전부장.
대협 예, 회장님.
보스 그릇 내놔라.
대협 예, 회장님.
대협, 그릇을 치우는 동안
보스, 서랍을 열어 검은 색안경을 꺼내 먼지를 훅 불어내고
폼나게 얼굴에 쓴 다음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주먹을 꽉 쥐어본다.
S #20 사무실
장차장,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소리지르고 있고
만호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 침통한 얼굴로 앉아 있다.
장차장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닌 거야!
일동 ...
장차장 내 정보에 의하면 지난주까지만 해도 스타카드쪽이 분명히
우리보다 불리한 조건이었어. 그런데 하루아침에 뒤집어진
거야. 영점 일 프로래. 알아? 영점 일 프로.다른 조건은 다
똑같은데 수수료에서만 영점 일 퍼센트 차이가 난 거야.
누가 설명 좀 해 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진상, 가슴이 뜨끔하여 은근히 다른 직원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만호의 빈 자리를 슬그머니 돌아본다.
장차장 내가 이번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밝혀내고 말겠어.
허과장 너무 화내지 마세요. 살다보면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고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장차장 그래서 지금 잘 됐다는 겁니까? 쌤통이라 이거예요?
허과장 아니, 내가 언제.
장차장 이거 봐요. 허과장. 내가 지금 무슨 꼴을 당하고 왔는지
알아요?나 이번 승진에서 누락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허과장 아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차장님 승진을 내가 왜
책임집니까? 내가 인사권이 있습니까?
장차장 당신이 일을 그따위로 하니까 그렇잖아!
허과장 (인상을 팍 구겨 노려보며) 뭐요?
장차장, 순간적으로 실수했다싶어 얼른 허과장의 눈길을 피하는데
문이 열리고 만호가 미안한 얼굴로 들어선다.
만호 늦어서 죄송합니다.
장차장 (만호를 노려보다가) 똑바로들 해!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만호, 장차장의 과격한 반응에 당황하는데
허과장, 양복 웃옷을 벗어 책상 위에 패대기치고 넥타이도 느슨하게 끌르며
한 판 붙을 듯이 장차장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 하자
오대리와 김대리가 말린다.
오대리 과장님!
허과장 이거 놔.
김대리 참으세요, 과장님.
허과장 아니, 내가 제안서를 쓰길 했어, 아니면 보길 했어? 나는 쏙
빼놓고 지들끼리 다 해 놓고선 왜 나한테 지랄이야?
오대리 차장님도 속상하니까 그러시는 거겠죠. 과장님이 참으세요.
허과장 속은 지만 상해? 나도 생돈 이천만원 날리고 자살하고 싶은
사람이야, 지금. 이거 왜 이래!
만호, 심상치 않은 사무실 분위기에 영문을 몰라
허과장과 다른 직원들을 번갈아 보다가
진상과 눈이 마주친다.
진상, 만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외면한다.
S #21 복도 끝
진상, 어두운 복도 끝 창가에 실루엣으로 서 있다.
진상, 창 밖을 내다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탁 돌아서다가
외출준비를 하고 나오는 만호와 마주친다.
진상, 순간 당황하지만 싸늘하게 외면하고 지나간다.
만호, 찬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가는 진상을 돌아보다가 재수 없어하며 간다.
S #22 꼬치구이 집
진상, 장차장에게 술을 따른다.
진상 자, 한 잔 드시고 기분 푸십시오.
장차장 난 낮술하면 설사하는데...
장차장, 말은 그러면서도 맛있게 술을 마신다.
장차장 크아, 쓸만한 놈들이 없어. 조직에선 뭐니뭐니해도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데 말이야.
진상 죄송합니다.
장차장 (손사래를 치며) 어, 어, 자네한테 하는 소리 아냐. 솔직히
다른 친구들이 자네 반만 따라와 줬으면 좋겠어.
진상 과찬이십니다.
장차장 아니야. 자네 회원관리 맡은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실적이
눈에 띄게 달라졌잖아. 나, 상부에 보고할 때 자네 얘기 빼면
할 말이 없는 사람이야.
진상 감사합니다.
장차장 으휴, 이번 제휴건만 잘 됐어도...처음부터 자네한테 전적으로
맡기는 건데 그랬어.
진상 다음엔 기회를 주십시오.
장차장 그래, 그러자구.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야.
백화점 쪽에서도 분명히 우리 제안서에 끌리는 눈치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뒤집어질 수가 있지?
진상 혹시 정보가 샌 거 아닐까요?
장차장 (진상을 빤히 보다가) 에이, 설마.
진상 설마가 사람잡습니다.
장차장, 얼굴이 굳는다.
S #23 거리 - 좌판
연옥, 길거리에 조그만 좌판을 벌여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카드가입을 권유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연옥 에이스카드예요. 사은품 받아 가세요. 어으, 더워.
연옥,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 손부채를 부치다가
좌판 밑 박스에서 사은품을 꺼내려고
허리를 숙이는데 누군가 좌판 앞에 선다.
연옥 어서 오세요.
연옥, 고개를 드는데 만호가 씩 웃으며 음료수를 내민다.
연옥 고마워요.
만호 잘 돼요?
연옥 보시다시피.
만호 몇 장이나 했어요?
연옥 두 장 했어요.
만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이 별로 안 좋다. 영업지원 아무도
안나왔어요?
연옥 행사영업장에 인원이 딸려서요.
만호 내가 좀 도와줄까요?
연옥 됐어요.
만호, 연옥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양복 웃옷을 벗어 좌판 밑에 넣고 길
가운데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다짜고짜 좌판 쪽으로
잡아끈다.
만호 자, 자. 사은품 받아 가세요. 기가 막힌 사은품 드립니다. 자,
이 쪽으로 오세요. 공짭니다, 공짜. 저기 미모의 아가씨한테
신청서 한 장만 써주시면 됩니다. 지금 가입하시면 일년동안
연회비 면제에 속이 꽉 찬 실속 있는 세제 세트도 드립니다.
(지나가는 OL들에게) 아가씨들, 원하시면 저도 드려요.
여자들, 낄낄거리며 웃고 연옥의 좌판 주위에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만호 자, 쓰면 쓸수록 경제적인 카드, 돈 버는 카드,
에이스카듭니다. 뭐하세요? 사은품 받아 가시라니까.
연옥, 좌판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신청서를 펼쳐 기입방법을 설명하다가
만호를 돌아보고 씩 웃는다.
S #24 버스 안
만호, 좌판을 접어 옆에 들고 있고
연옥, 커다란 가방을 다리 사이에 내려놓고 손잡이도 잡지 않은 채
흔들리는 버스에서 중심을 잡고 서서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며 두둑한
신청서를 세고 있다.
만호 몇 장이나 돼요?
연옥 (입이 찢어진다) 스물 하나, 스물 둘, 스물 셋. 스물
세장이요.
연옥, 소중하게 접어 가방에 넣고 손잡이를 잡는다.
만호 한달치 기본은 하셨네.
연옥 고마워요.
만호 뭘요.
연옥 이인 일조로 맨날 이렇게 하면 떼돈 벌겠다.
만호, 픽 웃는다.
연옥 근데 저 때문에 오후를 날리셔서 어떡해요?
만호 밥 한 번 사요.
연옥 언제요?
만호 오늘이요.
연옥 뭐 좋아하시는데요?
만호 미역국하고 오이지만 빼고 아무거나.
연옥 (씩 웃는다) 전 이거 정리하면 일곱 시쯤 되거든요?
만호 그럼. 일곱시 반에 회사 앞에서 봅시다.
두 사람, 내릴 준비를 하는데 버스가 급정거를 한다.
가방을 들려고 허리를 숙인 연옥이 고꾸라지려는 순간
만호, 연옥의 허리를 한 손으로 탁 받쳐 자기 쪽으로 당겨준다.
연옥, 얼굴이 화끈거린다.
S #25 여자화장실
연옥과 은지, 화장을 고치고 있다.
은지 스물 세 장? 웬일이냐?
연옥 이번엔 전부 자필로 받아왔으니까 현미래도 아, 소리
못하겠지?
은지 심사하는 애 맘이지. 자격 안된다고 트집 잡으면 그것도
꽝이야.
연옥 그땐 나도 가만 안 있어. 들이받는 거야.
은지 야, 모처럼 건수 올렸는데 오늘 저녁이나 사라. 너, 오늘 수업
없지?
연옥 나, 약속 있어.
은지 뭐? 누구랑? 우리 회사 사람이야?
연옥 응.
은지 혹시 ... 최진상?
연옥 최진상이면 얼마나 좋겠냐?
은지 그럼 누군데?
연옥 강만호.
은지 (안도와 실망이 교차한다) 강만호? ... 강만호는 왜?
연옥 밥 사래.
은지 어머, 어머. 그 남자가 너한테 관심 있나 보다. 괜히 와서
도와주고, 밥 사달라 그러고.
연옥 관심 있는 사람이 밥을 사라 그러겠냐? 사준다 그러겠지.
은지 그것도 그러네? 나도 나가면 안될까?
연옥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는 척한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먼저 간다.
연옥, 부리나케 나간다.
은지 기집애. 밥 값 얼마나 더 든다고.
은지, 혼잣말을 내뱉다가 연옥의 본심이 의심스러워 갸우뚱한다.
S #26 남자 화장실
만호, 휘파람으로 '돈 워리, 비 해피' 를 불며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하고 있다.
만호, 손도 씻고 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쫘악 넘기는데
거울 속에 보스, 대협 총련의 얼굴이 나타난다.
만호, 깜짝 놀라 돌아본다.
만호 아니, 회장님. 여긴 어떻게?
보스, 다짜고짜 만호의 턱을 날린다.
만호, 나가떨어진다.
보스 강만호. 남아일언 중천금이 무슨 뜻인지 알지? 난 약속을 안
지키는 놈들은 인간 취급 안 해. 그래서 특히 정치하는
놈들을 싫어하지.
만호, 몸을 일으키려는데 대협, 만호의 얼굴을 걷어찬다.
만호,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구른다.
보스 거래라는 건 말이야,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거야. 넌 내
믿음을 산산조각 냈어. 여러 사람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따라와.
보스, 나가면 대협과 총련, 만호를 양옆에서 잡아 일으키려는데
만호, 탁 뿌리치고 스스로 걸어 나간다.
대협과 총련, 싸늘하게 화장실 안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가면
잠시 후 조심스럽게 안 쪽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장차장의 머리가 쏙 나온다.
S #27 회사 현관 앞
연옥, 현관을 빠져 나오는데 아까와
달리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연옥, 비가 옷에 튀기자 한 발 뒤로 물러서서 회사 안을 기웃거리며
만호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진상이 나오다가 비가 오자 난감한 얼굴로 선다.
진상, 주위를 둘러보다가 연옥을 본다.
진상 안녕하세요?
연옥 어머, 안녕하세요?
진상 지금 퇴근해요?
연옥 네.
진상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차를 안 갖고 왔지? 택시 타고 갈
건데 같이 나갈래요?
연옥 (안타깝다) 아뇨, 약속이 있는데요.
이때 지하주차장을 빠져 나온 보스의 차가 두 사람의 앞을 지나친다.
만호, 뒷자리에 보스와 나란히 앉아 있다가 연옥을 발견하지만
연옥은 진상과 얘기하느라 만호를 보지 못한다.
진상 그럼, 먼저 가요.
진상, 빗속을 뛰어 간다.
연옥, 진상의 뒷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고 있는데 미래의 차가
연옥에게 물을 쫙 튀기고 지나쳐 진상의 앞에 선다.
연옥 어머! 야!
연옥, 물에 흠뻑 젖은 채 울상이 된 얼굴로 미래의 차에 타는 진상을 본다.
S #28 연옥의 집 (밤)
연옥, 양재기에 밥을 비벼 어그적 어그적 먹고 있다.
엄마 (물을 떠다가 연옥 앞에 탁 내려놓는다) 오늘 남자하고 밥
먹고 들어온다며? 어떤 싸가지 없는 놈을 만났길래 지금까지
밥도 못 얻어먹고 들어와? 비는 쫄딱 맞고.
연옥 말시키지 마.
엄마 우산도 안 씌워주디? 으이구, 으이구, 니가 하는 일이 맨날
그렇지 뭐.
연옥 ....
연옥, 대꾸없이 한 숟갈 푹 떠서 입에 넣다가
살금살금 들어오던 지옥과 눈이 딱 마주친다.
연옥, 지옥이 입고 있는 옷과 구두를 보고 눈이 뒤집힌다.
연옥 너, 그 구두! 그 옷! ... 내가 입지 말라 그랬지? 나 아직
개시도 안한 건데.
지옥, 연옥을 피해 방으로 후다닥 들어가면
연옥, 양재기를 내려놓고 쫓아 들어간다.
연옥 야!
연옥과 지옥이 들어간 방안에서 피튀기게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지옥 악!
연옥 빨리 벗어!
지옥 좀 입으면 어때! 언니는 내 옷 안 입어?
두 자매가 싸우는 동안 안방에서 속옷 바람의
아버지가 건넌방을 살피며 나온다.
아버지 쟤넨 또 왜 저래?
엄마 연옥이년이 또 뭔 일로 꼭지가 돌았나 보지, 에휴.
엄마,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아버지, 연옥이 먹다 남긴 밥을 보고 주저앉아 먹기 시작한다.
연옥 이거 봐. 이거 봐. 고추장 묻었잖아!
지옥 빨면 될 거 아니야!
연옥 너 신발은 어떡할거야! 다 늘어났잖아!
지옥 안 늘어났어. 살살 신고 다녔단 말이야!
연옥 아무리 살살 신고 다녀도 니가 신으면 다 펴지잖아!
지옥 언니도 내 운동화 빌려 신잖아!
연옥 운동화하고 구두하고 같애!
지옥 싸구려 한 번 입었다고 디게 지랄이네.
연옥 뭐야? 이게 꼬박꼬박 말대답질이야!
뻑! 소리가 나고 지옥의 울음이 터진다.
엄마 (못 참고 방에서 소리지른다) 조용히 안 해! 이것들이 아버지
계신데어디서 쌈질들이야?
연옥, 다시 방에서 나온다.
연옥 (방에다 대고) 꼬우면 너도 돈 벌어서 사 입어!
연옥, 밥그릇을 찾아 드는데 밥이 없다.
연옥, 아버지를 보는데 아버지, 시침 뚝 떼고 방으로 들어간다.
S #29 연옥이네 부엌 (밤)
연옥,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주위를 살피며 다가온다.
아버지 구두 많이 늘어났냐?
연옥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버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피고 얼른 연옥의 바지 주머니에 돈을 넣는다.
연옥 뭐예요?
아버지 그 구두 지옥이 주고 너 새로 하나 사라.
연옥 됐어요, 아버지.
아버지 받아. 내가 아버지가 돼 가지고 너, 학비도 못 보태주고 용돈
한 번 제대로 못 줘서 미안해서 그래. 그걸로 구두 사
신어.엄마한텐 비밀이다.
아버지, 다시 주위를 살피고 연옥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간다.
연옥,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본다. 꼬깃꼬깃한 만 원 짜리 두 장이다.
연옥, 방으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초라한 뒷모습이 안쓰럽다.
S #30 만호네 집 앞 (밤)
성기,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앞에 낯 선 고급승용차가 서 있는 것을 보고
괜히차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계단을 올라간다.
S #31 만호네 집 (밤)
성기,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는데
방안에 만호와 보스가 앉아 있자 깜짝 놀란다.
상기 (보스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아, 깜짝이야. 뭐하는 거야?
불도 안 켜고. 손님 오셨냐?
하다가 보스를 알아보고 기절할 듯이 놀란다.
보스 내 얼굴을 벌써 잊었다니 섭섭하군.
성기, 문 쪽을 슥 돌아보는데 대협과 총련이 어느새 뒤를 막고 서 있다.
성기, 진퇴양난의 고비에서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성기 잊다뇨. 제가 회장님을 잊을 리가 있습니까?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보스 박사장 생각엔 내가 편안했을 것 같애?
성기 ... 얼굴은 좋아 보이시는데요?
보스 속은 썩어 문드러졌어.
성기 ...
보스 앉아. ... 긴 말 안하겠어. 죽을래? 갚을래?
성기 갚아야죠.
보스 그럼 갚아.
성기 안그래도 제가 상환일정 때문에 상의를 드리러 한 번
찾아뵈려던,
보스 일정 필요 없어. 지금 갚아.
성기 제 말씀을 들으시면,
보스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성기 님. 이 인간 박성기를 그렇게 밖에 생각 안 하셨습니까? 전
지난 삼 년간 단 하루도 회장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내
가능성을 믿고, 내 젊음을 믿고 그런 거액을 쾌척하신 분께
잠시라도 누를 끼치고 있는 제 자신이 얼마나 미웠는지
아십니까?
보스 잠시? 자그마치 삼 년이야. 삼 년이면 이자가 얼만 줄 알아?
성기 이자가 문제겠습니까? 전 처음부터 이자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스 그럼 내 돈을 날로 먹을라 그랬단 말이야?
성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백 배, 천 배로 갚으려고 했지요.
보스 (에리한 눈길로 성기를 보다가) 전부장.
대협 예, 회장님.
보스 천배면 얼마야?
대협 (막 생각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몰래 손가락까지
꼽아본다) 일, 십, 백, 천, 만, 곱하기 천이면 영이 세 개,
영이 세 개면 만 오천인가?
보스 뭐야?
총련 (잘난척하며) 십오억입니다, 회장님.
보스 (놀란다) 십오억?
만호 백오십억입니다.
보스 (깜짝 놀란다) 백오십억?
성기, 만호를 짝 째려보고
대협과 총련도 못마땅한 얼굴로 만호를 무섭게 노려본다.
보스 (성기에게) 정말이야? 백오십억을 갚겠다고?
성기 (할 수 없이) 그렇습니다.
보스 언제?
성기 (보스를 뚫어지게 보며) 돈을 받으시겠습니까? 안
받으시겠습니까?
보스 (갈등하다가) 받아야지.
성기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의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만호에게 터프하게) 종이하고 펜 꺼내라.
만호, 기가 막힌 얼굴로 성기를 보다가 종이와 볼펜을 꺼내온다.
성기 (품에서 언제나 갖고 다니는 너덜너덜한 작은 수첩을 꺼낸다) 이
안에 제가 당장이라도 회수할 수 있는 채권이 적혀
있습니다. 총액이 자그마치 일억 오천입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이 채권을 회수해서 제가 다음 사업으로
준비하고 있는 획기적인 기적의 건강식품에 투자를 하는
겁니다. 이 제품의 정확한 정보는 사업기밀이므로 알려드릴
수 없다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기투자비로 정확히
일억이 필요합니다. 기계구입비, 원자재 구매, 공장 임대,
등등. 공장에 떨어지는 생산이익이 제품가의 삼십퍼센트,
그리고 유통마진이 사십퍼센틉니다. 물론 우리가 둘 다
먹습니다. 그럼, 우리의 마진은 칠십퍼센트.매출이 십억이면
마진은 칠억, 백억이면 칠십억. 천억이면?
보스 ... 칠백억?
성기 딩동댕! 백오십억이 문제가 아닙니다.
보스 (혼자 되뇌어본다) 칠백억...
성기 이제 아셨죠? 그래도 못 미더우시다면 내일부터 회장님
사무실로 출근하겠습니다. 됐습니까?
보스 음...
만호, 대협, 총련, 헷갈린다.
S #32 만호네 집 앞 (밤)
보스, 만호와 성기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오른다.
만호와 성기,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 보스, 친절하게 손을 흔들고 떠난다.
성기, 보스의 차가 떠나자마자 만호를 무섭게 노려본다.
성기 너, 이 자식! 정회장을 이리로 끌고 오면 어떡해? 죽을
뻔했잖아!
만호, 성기를 존경어린 눈빛으로 잠시 보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S #33 달리는 보스의 차 안 (밤)
보스, 뒷자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대협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저, 회장님.
보스 (본다)
대협 또 속은 거 아닐까요?
보스 내가 한 번 속지, 두 번 속을 사람 같아 보여? 이번엔
진짜야.
대협,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눈만 껌뻑껌뻑한다.
S #34 전산실
장차장, 안으로 들어온다.
전산실 근무자, 자리에서 일어나 장차장을 맞는다.
전산 아니, 차장님. 여긴 웬일이세요?
장차장 아, 뭐 좀 물어보려고. 사내 전산망으로 중앙컴퓨터에
접속하면 기록이 남나?
전산 보안 프로그램에 그런 게 있긴 있어요. 랜카드 일련번호가
남죠.
장차장 그래? 그럼 누가 서류를 봤는지 다 나오는 거야?
전산 그럼요. 왜요?
장차장 그럼 말이야,
장차장의 뒤 편 유리벽 너머에 안을 힐끗 보며 지나가는 진상이 보인다.
S #35 설계사 사무실
모두 일 나가고 몇 몇 설계사들만 앉아 있다.
만호, 두리번거리며 들어와 연옥을 찾다가 은지를 발견하고 다가간다.
만호 안녕하세요.
은지 아, 안녕하세요?
만호 이연옥씨 안나왔습니까?
은지 방금 교육 받으러 갔는데요.
만호 아, 예. 수고하세요.
만호, 돌아 나간다.
은지, 의미심장하게 만호를 바라본다.
S #36 전산실
대형 서버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에이스 카드의 중앙 전산실.
한켠에 있는 모니터에 파일번호와 파일에 접근한
랜카드의 일련번호가 날짜 시간과 함께
좌악 찍혀져 올라가고 프린터에서는 모니터의 내용이 인쇄되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다.
관리자, 그 중 한 종이를 집어 보다가 수화기를 든다.
S #37 강의실 앞 복도
미래, 교재를 앞에 끼고 강의실로 가는데
만호가 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자 자기를 기다리는 줄 알고 선다.
미래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이 때 강의실에서 연옥이 나온다.
세 사람의 눈빛이 오묘하게 교환된다.
연옥 무슨 일이예요?
만호 어제 못나가서 미안해요.
연옥 (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저도 어제
급한 일이 생겨서 못나갔으니까.
미래 (괜히 서 있는 자신이 민망하다) 이연옥씨, 교육 시작해요.
(홱 들어가 버린다)
연옥 저, 들어가 봐야 돼요. 안녕히 가세요.
연옥도 홱 돌아서 들어간다.
만호, 픽 웃는데 낯선 남자들이 다가와 만호를 포위하듯 선다.
남자 강만호씨?
만호, 돌아본다.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