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회

S #1 거리 (밤)

만호, 세 사람 쪽으로 다가가는데 대협과

총련, 연옥을 끌고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만호, 급한 걸음으로 세 사람이 서 있던 곳으로

다가가지만 연옥은 간 곳이 없다.

S #2 근처 골목 안 (밤)

거리의 불빛이 희미하게 비쳐드는 어두운 주차장.

대협, 연옥을 벽에 밀어붙여 놓고 낮지만 무섭게 얘기하고 있다.

대협 이런 데 숨어 있으면 우리가 못 찾을 줄 알았지?

연옥 .. 숨긴 누가 숨었다는 거예요?

대협 (보다가) 박사장 어딨어?

연옥 몰라요.

대협 이거봐 아가씨. 우린 아가씨한텐 감정 없는 사람들이야. 서로

좋게 얘기하고 끝내지.

연옥 정말 몰라요. 나도 거기 그만 뒀단 말예요.

대협 어딨는지만 말해. 아가씨가 불었다는 건 비밀로 해주지.

연옥 정말 모른다니까요.

대협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좋아. 그럼 그 놈은 누구야?

연옥 ...어떤 놈이요?

대협 (버럭) 그 때 그 놈 말이야!

연옥 그 때 그 놈이라니요?

대협 니네 사무실에 나타났던 놈.

연옥 (잠깐 생각하다가) 아저씨들..때려눕힌 사람이요?

대협 (이를 악 물고 꾹 참으며) 그래. 그 놈.

연옥 저도 모르는 놈이예요. 아저씨, 정말 믿어주세요.

대협 (연옥을 빤히 보다가 갑자기 무섭게 연옥의 목을 손으로

죈다)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버럭) 엉?

연옥, 대협의 사타구니를 무릎으로 힘껏 올려 찬다.

대협, '헉'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이자

연옥,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며 핸드백으로

대협의 머리를 사정없이 갈긴다.

대협, 마침내 바닥에 고꾸라져 사지를 파르르 떤다.

총련 형님!

연옥, 총련에게도 가방을 휘두르며 골목 밖으로 뛰어나간다.

S #3 거리 (밤)

연옥, 골목을 빠져 나와 정신없이 뛰는데 누군가 팔을 잡는다.

순간, 대협 일당이라고 생각한 연옥, 미친 듯이 핸드백을 휘두른다.

만호 괜찮..

연옥 악! 이거 놔!

만호 윽, 악, 윽.

만호, 얼떨결에 연옥의 팔을 놓고 두 팔로 핸드백을 막다가 핸드백을 잡는다.

연옥, 핸드백 끈을 힘껏 낚아채는 바람에 끈이 끊어지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끈만 꼭 쥔 채 쏜살같이 달아나 사라진다.

만호 이봐요. 아가씨!

만호, 연옥을 따라 뛰기 시작한다.

S #4 전철역 (밤)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온 연옥, 뒤를 돌아보고 아무도 쫓아오는 사람이 없자

무심코 핸드백을 어깨에 걸치려고 하는데 끈만 있고 몸체가 없어 당황한다.

연옥 어머!

연옥, 난감해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자 기절할 듯이 놀라 돌아본다.

만호 (숨을 몰아쉬며) 달리기 선수였어요? 왜 그렇게 빨라요?

이거. (핸드백을 내민다)

연옥 어머, 그럼, 좀 전에... (하다가 만호를 알아본다) 아,

안녕하세요?

만호 기억 나요?

연옥 죄송해요. 전 그 사람들인 줄 알고.

만호 어디 다친 덴 없어요?

연옥 없어요. 근데 여긴 웬 일이세요?

만호 직장이 이 근처예요.

연옥 예...

만호 그 쪽은 웬 일이예요?

연옥 저도 직장 옮겼어요.

만호 그래요? 잘 하셨네요. 새 직장은 어때요?

연옥 운 좋게 대기업에 취직했어요.

만호 오... 잘 됐네요. 무슨 일 하는데요?

연옥 (잠깐 고민하다가 언제 또 보랴 싶어 뻥을 친다) 비서실에서

근무해요.

만호 아, 그래요?

연옥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만호 저기, 혹시 박성기씨 연락처 알아요?

연옥 (한숨을 팍 내쉬고) 아뇨.

만호 ... 그때 내가 한 얘기 전했어요?

연옥 전했어요.

만호 다음날 갔더니 사무실이 이사 갔던데.

연옥 (짜증) 몰라요. 나도 그날 그만 뒀어요.

만호 ... (명함을 꺼내 건넨다) 그럼, 이거, 내 연락천데 혹시

만나게 되면 좀 전해줄래요?

연옥 왜 다들 나한테 이래요? 만날 일 있으면 직접 만나면

되잖아요? 내가 왜 댁의 그딴 심부름까지 해줘야 돼요?

연옥, 만호에게 명함을 다시 홱 던지고

지하철 계단을 후다닥 내려가버린다.

만호, 연옥을 잠시 보다가 돌아서서 간다.

잠시 후 바람에 날린 만호의 명함이 총련의 발 앞에 멈춘다.

구두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가면 총련의 등에 업힌 대협이 보인다.

총련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대협 (명함을 노려보며 나지막히) 줏어.

S #5 진상의 방 (밤)

진상,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TV의 전원을 켜고 웃옷을 벗어 소파에 던진 다음

컴퓨터 옆에 놓인 응답기의 메시지램프가 깜박이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응답기의 플레이버튼을 누르고 리모콘으로 여기 저기 채널을 돌리다가 증권

관련 뉴스가 나오자 멈춘다.

소리 (엄마) 여보세요? 진상이냐? 엄마다. 왜 통 전화가 없냐?

취직도 했다면서? ... 저번에 보내준 돈은 잘 받았냐? 한 번

안 오냐? 아버지가 요새 식사도 못하시고 바깥출입도 안 하,

진상, 눈살을 찌푸리며 응답기 전원을 확 꺼버린다.

소리 (TV) 다우존스지수와 나스닥 지수가 큰 폭으로 동반하락한

여파로 오늘도 주식시장은 약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오전 한

때 새로운 대북 관련 호재가 발표될 것이란 루머로 건설,

금융주를 비롯한 일부 주식이 상한가를 기록하면서 회복세를

보였지만 오후 들어 대기매도물량이 쏟아져 나오면서 주가는

다시 큰 폭으로 떨어진 채장을 마감했습니다. 우량벤처기업

간의 대규모 인수합병으로 기대를 모았던 코스닥시장도

인터넷 관련 기업들의 상반기 수익이 예상치에 크게 밑도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투자심리가 극도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진상, 선 채로 바지를 벗어 소파에 집어던지고 TV를 뚫어져라 보다가

신경질적으로 TV를 확 꺼버리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진상 (샤프하게) 네, 에이스카드 최진상입니다. ... 아, 예.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

위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아래는

팬티와 양말 차림의 진상, 점점 열이 올라

방안을 서성대며 소리를 질러댄다.

진상 ... 지금 주식값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얘깁니까? ... 이거

보세요. 그동안 내가 갖다 바친 수수료가 얼만데? ...

그러니까 만회할 기회를 달라는 거 아니에요! 대출 받아서

투자하라고 꼬실 때는 언제고 갑자기 잔고를 플러스로

돌려놓으라면 나보고 어떡하라는 겁니까? ... 뭐요? 정말

이렇게 나올 거요?... 그래, 니네 맘대로 해. 나도

이판사판이다 이거야! 맘대로 해!

진상, 전화기를 던져버리고 씩씩거리며

손톱을 물어 뜯다가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진상 여보세요? 엄마? 저예요. 주무셨어요?

S #6 회의실

어둠 속에 서너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다.

조명이 꺼져 있어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프로젝트의 불빛에 윤곽만 희미하게

드러나 보이지만 사뭇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정면 스크린에 짧은 머리에 양복을 입고

샤프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진상의 얼굴이 비춰진다.

소리1 이름 최진상. 나이 스물 여덟. 회원관리와 제휴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머리도 좋고 성적도 뛰어납니다. 대학원에 다니며

고시준비를 하다가 에이스에 특채됐습니다. 원래는

전략기획팀으로 가게 돼 있었는데 연수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영업팀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진상의 사진 옆에 만호의 사진이 투사된다.

소리1 이름 강만호, 나이 스물 여덟.. 가맹점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공고 출신에 폭력전과까지 있는 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잡니다. 대학 입학 전에 일년 동안 공장에 근무하면서

친구의 산재보험금을 떼어먹은 사장을 반 죽여 놓고 구속

수감됐던 적이 있습니다. 입사성적은 별로 좋지 않지만 대학

사년 내내 장학금을 받은 걸 보면 나름대로 머리와 실력이

있는 걸로 보입니다.

소리2 접근 가능성은?

소리1 둘 다 신입이라 접근하기는 용이한 편입니다.

소리2 음.... 신중하게 결정해서 접근하도록 해.

S #7 에이스 카드 화장실

만호, 좌변기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옆 칸에서 진상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진상 (소리) 입금 확인했죠? ... 그럼 그 가격에 팔아 주시고,

다른 거 추천할 만한 종목이 있습니까? ... 예... 예... 글쎄요,

괜히 상투 잡는 거 아닐까? 썩 내키지 않는데. 차라리

블루칩을 잡읍시다. ... 예, 그러죠.

만호, 화장실에 앉아 주식매매를 하는

진상이 영 못마땅한지 옆 칸을 째려본다.

시간경과

진상,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거울 앞에서 머리 모양을 상하좌우 살피며

물을 축여 머리를 좌악 붙이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예리하게 들여다보는데

화장실에서 나온 만호가 옆 세면대에서 물을 튀기며 세수를 시작한다.

진상, 양복에 튄 물을 털어내며 못마땅한 얼굴로 만호를 째려보는데

만호, 고개를 번쩍 들어 같이 노려본다.

만호 왜? 튀었냐?

진상, 대꾸없이 잠시 싸늘하게 노려보다가

주머니에서 입냄새 제거 스프레이를 꺼내

칙칙 뿌리고 잇새에 낀 게 없나 이-하고 거울을 들여다본다.

만호 (진상이 하는 양을 보고 있다가) 인생의 목표가 십억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진상 ...

만호 아침부터 화장실에서 주식거래도 하고. 우와... 대단해.

진상 (비웃으며) 너같은 놈이 타이밍의 중요성을 알 리가 없지.

진상, 만호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홱 나가버린다.

만호, 진상의 뒷모습을 째려본다.

S #8 설계사 사무실

아줌마들이 와글와글한 설계사 사무실.

연옥, 출근부의 도장을 찍고 자리로 가 앉는데

옆자리에 있던 아줌마 설계사가 말을 붙인다.

설계사 어제 몇 개나 했어?

연옥 한 개도 못했어요.

설계사 한 개도 못했어? 아니 그런 자리에서 한 개도 못하고

들어오면 어떡해? 나 내보내주면 하루에 수십장씩 하겠구만.

연옥 그럴 일이 있었어요. 어제 많이 하셨어요?

설계사 많이 어떻게 해? 요새 카드 한 두 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야지? 갈수록 이 직업도 못해 먹겠어. 나이는 들어가지,

하루 종일 걸어다닐래니까 다리는 아프지, 경비들은 갈수록

험악해지지. 에휴.

은지 (다가오며) 연옥아, 연옥아, 우리 팀장이 새파란 신입으로

바뀐대.

이때 김대리와 박스를 손에 든 진상과 만호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설계사들, 김대리는 안중에 없고 만호와 진상을 바라보며 웅성거린다.

소리1 어머, 누구야?

소리2 뉴페이스네?

연옥, 진상이 나타나자 괜히 두근두근하다가

만호를 보고 낯빛이 싹 변해

만호와 눈이 마주칠까봐 전전긍긍한다.

은지, 연옥의 옆구리를 툭툭 친다.

은지 (만호를 보며 작게) 저 남자니?

연옥 누가?

은지 어제 잘생겼다는 그 신입사원.

연옥 아니.

은지 (인상을 찌푸리며) 그럼, 그 옆에? 넌, 정말 남자 보는 눈이

없어. 저 쪽이 좀 우락부락하긴 해도 훨씬 섹시하다 야.

연옥 (은지를 짝 째려본다) 조용히 해.

소리3 총각인가 봐.

소리4 어머머, 얼굴 빨개지는 거 좀 봐.

일동 까르르르르.

연옥, 고개를 슬쩍 들다가 만호와 눈이 마주친다.

연옥,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만호, 눈이 똥그래진다.

김대리, 앞쪽에 설치된 마이크를 뽑아 들고 마이크 테스트를 한다.

김대리 아, 아, 안녕하세요.

일동 안녕하세요.

김대리 더운 날씨에 수고들 많으시죠?

일동 아니요.

소리1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요, 뭐.

김대리 옆에 서 계신 분들이 누군지 궁금하시죠?

일동 (큰소리로) 네!

김대리 이 쪽은 오늘부터 여러분들과 함께 지낼 새로운 팀장

최진상씨!

일동,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친다.

김대리, 진상에게 마이크를 준다.

진상 반갑습니다. 최진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일동, 열광적인 환호를 보낸다.

진상, 어색하여 눈 둘 곳을 몰라한다.

김대리 그리고 이 쪽은 강만호씨.

만호 안녕하세요. 강만홉니다.

김대리 (다시 마이크를 뺏으며) 그동안 제가 다른 업무 때문에

여러분들한테 신경을 많이 못 썼는데요, 앞으로 최진상씨가

전적으로 회원 관리를 맡고 강만호씨가 가맹점 관리를 맡게

됐으니까 애로사항이 발생하는 즉시즉시 이 두 분한테

달려가면 이 두 사람이 바로바로 여러분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드릴 겁니다.

일동, 다시 박수.

김대리 자, 그럼. 지난주의 위클리 베스트를 발표하겠습니다. 부상은

전기밥통!

일동 와!

김대리 두구두구두구두구. 위클리 베스트! 이연옥씨! 박수!

연옥, 설계사들의 박수 속에 만호의 시선을 피하며 앞으로 나간다.

김대리, 박스 속에서 밥통을 꺼내 연옥에게 안기면

연옥, 만호 쪽으로 밥통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돌아선다.

S #9 복도

연옥과 은지, 화장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로 간다.

은지 밥통이 뭐냐? 밥통이. 현찰로 주면 좀 좋아?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연옥 (만호가 갑자기 생각난다) 어흐, 쪽팔려. 여기도 그만 둬야

될라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은지 누구 약 올리냐? 밥통까지 받고 왜 그래?

연옥 그게 아니고 어제밤에 그 신입사원이랑... 아냐,

은지 어떤 신입사원? 최진상?

연옥 아냐.

은지 최진상이 뭘 어쨌는데? 너, 나하고 헤어지고 그 신입사원

만났어?

연옥 아니라니까. 아, 참.

연옥, 가방을 열어 서류를 확인한다.

은지 무슨 일인데?

연옥 넌, 몰라도 돼.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은지 (타며) 안녕하세요?

연옥, 은지의 인사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다가

엘리베이터 안에 만호가 서 있자

깜짝 놀라 탈까말까 잠시 갈등한다.

만호 (열림단추를 누른 채) 자주 보네요.

연옥 (시선을 피한 채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네... (할 수 없이

탄다)

S #10 엘리베이터 안

은지, 만호와 연옥의 중간에 서서 뭔가

이상한 두 사람의 태도를 미심쩍은 눈으로 살핀다.

만호 ... 어젠 잘 들어갔어요?

은지 ?

연옥 ...네....

만호 ... 나가는 길이예요?

연옥 네...

만호 명함 안줘도 되겠네요?

은지 ???

연옥 ...

만호 박성기씨 만나면 나 여기서 근무한다고 꼭 좀 전해줘요.

은지 ?

연옥 ... 네.

문이 열린다.

만호 수고해요. 또 봅시다.

연옥 ...네.

연옥, 만호가 내려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쾅쾅 박는다.

연옥 아흐, 씨...

은지, 이상한 눈으로 연옥을 본다.

S #11 연옥이네 집 (밤)

연옥의 부모와 연옥, 지옥, 좁은 방안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 TV를 보고 있다.

한 옆에 먹고 난 밥상이 놓여 있고 반대쪽에는 선풍기가 돌고 있다.

엄마 (연옥이 타 온 밥솥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난 또,

압력밥솥이라고. 이건 그냥 싸구려 보온밥통 아냐? 요즘

보온밥통 없는 집이 어딨어?

아버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우리 집안에서 상품 받아온 사람은

연옥이가 최초지, 아마?

엄마 그래, 장하다, 장해. 얘, 얘, 텔레비젼 그만 좀 보고 밥상이나

치워.

지옥 나, 이거 보잖아. 언니가 좀 치워.

연옥 나, 금방 퇴근해서 힘들어 죽겠어. 니가 좀 치워.

지옥 난 고3이잖아.

연옥 고3이 텔레비젼이나 보고, 자알 한다.

지옥 보고 떨어지나 안 보고 떨어지나 마찬가지 아냐?

연옥 넌 어떻게 된 애가 떨어질 생각부터 하냐?

지옥 그래, 언니 잘났어.

연옥 이 기집애가.

아버지 (못참겠다) 테레비 좀 보자. 테레비 좀 봐. 시끄러서 하나도

안들리잖아!

엄마, 연옥, 지옥, 일제히 아버지를 돌아본다.

아버지 (꽥) 당신은 상 치우고! 넌 가서 공부하고! 넌 가서 씻고 자!

세 모녀, 두 말없이 벌떡 일어나 후다닥 밖으로 나간다.

아버지, 고요해진 방 안에서 다리를 쭉 펴며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버지 여보세요. ... 그렇습니다마는? ... 이 밤중에 누구시죠? ...

사장님이요? 잠깐만 기다리시죠. 미스리! 전화!

S #12 연옥의 방 (밤)

연옥 알았어요. (수화기 들며 아버지에게) 전화 끊으세요.

여보세요?

S #13 공중전화 (밤)

성기, 보따리 하나를 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전화를 하고 있다.

성기 나야.

연옥 누구세요?

성기 나라니까. 벌써 사장 목소리도 까먹었어?

연옥 ... 무슨 일이세요?

성기 회사 잘 다니지?

연옥 그런데요?

성기 저번에 부탁한 거 말이야, 어떻게 됐어? 빨리 좀 안될까?

연옥 자격이 안된다 그랬잖아요.

성기 미스리 빽으로도 안돼?

연옥 안돼요.

성기 아니, 무슨 카드가 그렇게 발급이 어려워? 사장도 안돼?

연옥 (기가 막히다) 카드이름이 신용이잖아요.

성기 내가 좀 급한데.

연옥 정 급하시면 강만호씨한테 부탁해 보세요. 우리 회사

다니니까. (끊는다)

성기 뭐? 여보세요? 여보세요?

S #14 사무실

만호,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데 진상과 미래,

장차장, 오대리, 김대리가 회의를 하고 있자

서둘러 회의테이블에 의자를 끌고 가 회의에 참여한다.

허과장은 자기 자리에 앉아 장차장을

아니꼬운 눈으로 신문 뒤에서 째려보고 있다.

장차장 지금 스타카드 쪽에서 어떤 제안이 들어갈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거든? 오대리하고 김대리는 스타카드쪽에 라인을 좀

뚫어봐.

김대리 그 쪽도 보안이 철저할 텐데요?

장차장 컴퓨터를 훔쳐 오든지 안되면 여직원을 납치해 오든지.

오대리 전 약속이 있는데요.

장차장 온 사원이 힘을 합쳐도 제휴를 따낼까 말깐데 지금 약속이

문제야? 오늘 내일 약속 잡힌 거, 취소할 건 취소하고 미룰

건 미뤄. 그리고 현미래씨는 최진상씨하고 같이 백화점에

나가서 분위기 좀 알아 봐. 김과장이 미래씨 좋아하잖아?

미래 (불쾌하다) 저한테 미인계를 쓰란 말씀이세요?

장차장 이번에 백화점하고 제휴건만 성사되면 다음 휴가는 괌으로

가는 거야. 괌! 아, 그리고 강만호씨는 말이야.

만호 예.

미스심 차장님, 전환데요.

장차장 누구야?

미스심 서울백화점 김과장님인데요.

장차장 그럼, 나가서 일들 봐. (미스 심에게) 저 방으로 돌려.

장차장,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오대리, 김대리, 허과장에게 인사하고 나가고

미래와 진상도 옷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간다.

만호, 회의테이블에 혼자 남아 멀멀하게 나가는

동료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허과장과 눈이 마주친다.

만호, 머쓱해져서 자기 자리로 가 앉지만

할 일이 없어 괜히 책상 정리를 하는데

허과장이 장차장이 들어간 방쪽을

한 번 힐끔 보고 만호에게 다가온다.

허과장 (혼잣말로) 괌 좋아하네. 어이, 강만호씨. 당구 칠 줄 아나?

만호 좀 칩니다.

허과장 (마음에 든다) 오, 그래?

만호 당구 좋아하세요?

허과장 이따 퇴근하고 한 게임 칠까?

만호 그러죠.

허과장 몇이야?

만호 한 500 칩니다.

허과장 (깜짝 놀라며) 정말이야? 가만, (갑자기 부산을 떤다) 이대리,

이대리, 이대리가 자리에 있나?

허과장, 급한 마음에 책상 저편에 있는

전화기에 손을 뻗느라 책상 위에 거의 엎드려 전화한다.

허과장 보세요? 이대리. 오늘 약속 없지? 있어도 취소해. ...두고

보면 알아. 이따봐. (전화 끊고 뿌듯한 얼굴로 만호에게

애정어린 눈빛을 보내다가 약간 걱정하며) 이대리가 좀 짠

삼백인데..

만호 참고로 말씀드리면 아직까지 내기당구에서 물려본 적은

없습니다.

허과장 (반색) 정말이야?

미스심 강만호씨, 전화요.

만호 네, 에이스카드 강만홉니다. ... (반색하며) 아, 가맹점

가입하신다구요? 위치가 어디죠? (받아 적는다) 예, ... 예. ...

그럼, 곧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제가 담당인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보세요? 여보세요?

허과장 가맹점 가입한대?

만호 예. (일어나 옷을 챙겨든다) 다녀 오겠습니다.

허과장 어디래?

만호 단란주점이라는데요.

허과장 업장 꼼꼼하게 살펴봐. 이 바닥에 골 때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거든. 탁 보면 이놈들이 깡하는 놈들인지 아닌지 바로

알 수 있어야 된다 말이지. 아, 그리고 나가서 어려운 일

있으면 내 이름 대. 이 동네 유흥업소에 나 모르는 애들

없다. 나 처음에 어땠는지 알아? 기도, 영업부장, 영업상무,

닥치는 대로 상대했잖아.

만호 다녀오겠습니다.

허과장 어, 그래.

만호, 나가자 허과장 불현듯 생각난다.

허과장 당구!

S #15 백화점 회의실

진상과 미래, 백화점 김과장과 만나고 있다.

김과장 미래씨는 어떻게 갈수록 예뻐져요.

미래 고맙습니다.

진상 스타 쪽에서는 정식제안서가 들어왔나요?

김과장 아직이요. 미래씨 아직도 애인 없어요?

미래 왜 이러세요, 저 남자친구 많아요.

김과장 (능글맞게) 그런 거 말고, 진짜 애인.

진상 어쨌든 저희 쪽에서는 스타카드 보다는 좋은 조건을

제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김과장 글쎄. 양 쪽 제안서를 다 받아보고 결정할 일이니까... 아,

그리고 에이스에 설계사는 그 아가씨 밖에 없어요?

진상 예? 무슨 말씀이신지.

김과장 저번에 그렇게 문제를 일으켰는데 교체를 안하시더라구요.

내가 진심으로 에이스 카드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스타쪽 아가씨들하고 너무 비교되지 않아요? 행사기간

동안이라도 우리 미래씨만큼은 못되도 좀 제대로 된

아가씨들이 나와 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진상 아, 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때 인터폰이 울린다.

소리 과장님, 스타카드에서 오셨는데요.

김과장 알았어요.

진상과 미래, 서로 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래 이만 가볼께요, 과장님.

진상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김과장 (미래에게) 섭섭한데요. 미인하고 좀 더 있고 싶은데.

미래 (마지못해 웃는다)

김과장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김과장, 회의실 문을 열어준다.

진상과 미래, 문을 나가는데 스타카드의

직원 (소리1)이 들어서다가 진상과 엇갈리며

진상을 잽싸게 훑어본다.

S #16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진상과 미래, 나란히 내려가고 있다.

미래 어으, 재수없어. 저 사람만 보면 속이 다 뒤집어진다니까.

우리 기분전환이나 할래요?

진상 네?

S #17 백화점 의류매장

미래, 닥치는 대로 옷을 골라 입어보며

진상에게 지퍼를 올려달라고 하기도 하고

옷맵시를 봐달라고 한바퀴 돌기도 한다.

진상, 미래의 요염한 포즈에 얼굴이 빨개진다.

S #18 구두매장

미래, 이 신발, 저 신발, 신어보며 신을 산다.

진상, 그런 미래의 옆에서 쇼핑백을 잔뜩 들고 서 있다.

S #19 백화점 입구

에이스카드와 스타카드의 좌판이 마주보고 있는 출입구.

연옥, 의욕을 상실한 얼굴로 스타카드의 쭉쭉빵빵을 보고 있는데

쇼핑백을 잔뜩 든 진상이 백화점 안 쪽에서 다가오자 깜짝 놀란다.

연옥 어머, 안녕하세요?

진상 (부드럽게)수고가 많아요. 잘 돼요?

연옥 그렇죠, 뭐. 근데, 쇼핑 나오셨어요?

이때 미래가 안에서 나오다가 연옥을 보고 흠칫 놀란다.

연옥도 미래를 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져 외면해버린다.

미래 문제 일으킨 설계사가 이 설계사예요? 정말 비교되네요.

연옥 (미래를 노려보는데)

진상 그럼, 수고해요.

연옥 예.

진상 (미래에게) 가시죠.

진상, 앞서 가면 미래, 괜히

연옥을 한 번 더 째려보고 간다.

연옥, 기분 더럽다.

S #20 거리

유흥업소들이 밀집해 있는 뒷골목.

만호, 두리번거리며 찾다가 한 술집 입구로 다가가는데

건장한 기도 한 명이 앞을 막아선다.

기도 아직 영업시작 안 했는데요.

만호 에이스 카드에서 왔습니다.

기도, 만호를 아래위로 슥 훑어보고 길을 내준다.

만호, 들어간다.

기도 (품에서 무전기를 꺼낸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S #21 술집 안

만호, 안으로 들어와 텅 빈 홀을 기웃거리는데

갑자기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어깨들이 우르르 나타나 만호를 둘러싼다.

만호 (뭔가 이상하지만) 안녕하세요. 에이스 카드에서 왔습니다.

사장님은 어디 계시죠?

이때 어깨들 뒤에서 대협이 나타난다.

대협 오랜만이야.

만호 ...

대협 그 새 날 잊었나?

만호 뭐하는 짓이야?

대협 강만호. 너희들이 아닌 척하면 내가 끝까지 모를 줄 알았지?

같은 회사에 사이좋게 다니고 있더군.

만호 (픽 비웃는다) 뭐?

대협 너하고 박성기, 그리고 그 이연옥인가 하는 발칙한

아가씨까지 모두 한 통속이라는 걸 내가 진작에 알았다면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거야. 날 우롱한 대가가 어떤

건지, 우리 돈을 떼어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다. 얘들아!

총련과 어깨들, 만호를 둘러싸고 공격을 시작하고

대협, 테이블 의자에 폼나게 앉으며 담배를 꺼내 무는데

어깨 한 명이 테이블 위로 날아온다.

대협, 깜짝 놀라 얼른 옆으로 피한다.

어깨, 대협의 옆을 스치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진다.

대협,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만호에게 밀리는 부하들을 보며 점점 초조해진다.

정면공격으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총련,

슬그머니 만호의 뒤로 돌아가 만호에게 의자를

내리친다. 만호, 한 쪽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어깨들, 우르르 달려들어 만호를 짓밟는다.

대협,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입구에

보스가 나타나자 벌떡 일어나 담배를 끈다.

보스 그만.

어깨들, 만호에게서 떨어지고 보스에게 길을 열어준다.

보스, 바닥에 쓰러진 만호를 슥 보고 대협이 앉았던 자리에 앉는다.

보스 앉혀라.

부하들, 만호를 일으키는데

만호, 부축하는 부하들의 손길을 탁 쳐내고

들고 온 서류가방을 집어들고 보스 앞에 앉는다.

보스, 만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섭게 노려보며 품 안에서 작은 장부책을 꺼낸다.

보스 우리 전부장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샐러리맨으로

위장취업해서 박성기를 돕고 있다고?

만호 (기가 막히다) 당신, 누구요?

대협 당신? 이 자식이!

보스, 손을 들어 대협을 말리고 장부를 펼친다.

깨알같은 글씨로 숫자가 빽빽히 적혀 있다.

보스 박사장이 나한테 가져간 돈이 얼만지 알아? 자그마치 천

오백이야. 젊고 성실해 보여서 내가 특별히 싼 이자로

빌려줬지. 딱 두 달만 쓰겠다 그래서 두 달치 선이자 구십만

원 까고 생돈 천 사백 십만 원을 현찰로, 그것도 빳빳한

현찰로 빌려줬는데, 사라진 거야. 삼 년 전에. (부들부들

떨다가 가까스로 진정한다) 삼년이면 이자가 얼만 줄 알아?

원금은 새 발의 피야. 얼마 전에 겨우 찾아내서 잡으러

갔는데 자네가 방해하는 바람에 또 놓치고 말았어. 어떻게

할거야? 박성기를 넘기든지, 돈을 대신 갚든지, 양자택일해.

아니면 넌 죽어.

만호 (보스를 빤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한다) 이렇게 하죠.

보스 어떻게?

만호 박성기를 넘기겠습니다.

보스 그래? 잘 생각했어.

만호 대신 나도 조건이 있습니다.

보스 조건?

보스, 긴장하는데 만호, 가방을 열어 가맹점 가입신청서를 꺼낸다.

만호 저희 카드 가맹점 신청서 하나 작성해 주십시오.

보스 (누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한다) ... 은행곈가?

만호 아닙니다.

보스 그럼, 안돼.

만호 왜죠?

보스 수수료도 비싸고 결제도 늦어. 거의 우리 수준이야.

만호 그럼, 나도 못 넘깁니다.

보스, 만호를 뚫어지게 보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살짝 비친다.

보스 좋아.

만호 (맞은 것도 순간 다 까먹는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사업자

등록증 있으시죠?

S #22 미래네 집 근처(밤)

진상의 차 안.

진상, 운전하고 있고 미래, 옆자리에 앉아있다..

미래 내가 볼 땐 두 분이 성격이 굉장히 다른 거 같아요.

진상 누구하고 누가요?

미래 강만호씨하고 김진상씨하고요.

진상 (기분 나쁘다) ... 최진상입니다.

미래 어머, 죄송해요. 최진상씨.

진상 괜찮습니다.

미래 강만호씨 여자 친구 있어요?

진상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미래 두 분이 친구라면서요?

진상 친구는 아니구요,

미래 같은 학교 나왔다던데?

진상 학교가 같다고 다 친구는 아니죠.

미래 ...

진상 에이스에는 언제 입사했어요?

미래 작년에요.

진상 회사일은 재미있어요?

미래 회사, 재미로 다녀요?

진상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미래 아버지 때문에 할 수 없이 다니는 거예요.

진상 아버님 때문에요?

미래 아, 여기서 세워 주세요.

진상, 차를 끽 세우고 얼른 내려 뒷트렁크에서 미래의 짐을 내리는데

뒤에서 온 차의 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에게 비춘다.

곧 서비스될 예정입니다 곧 서비스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