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7일 (일) / 제 26 회
비서실보좌관 허화평, 사정수석 허삼수, 민정수석 이학봉, 공보담
당 허문도 등 전두환은 보안사 핵심참모들을 그대로 옮겨 청와대
진용을 짜고 외무장관에 노신영, 경제수석에 김익재를 임명한다.
노신영은 전두환에게 우리 경제의 미국의존도를 설명하면서 미국
이 문제 삼고 있는 김대중 사형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줄 것을 건
의한다. 전두환은 노신영의 설명을 듣고 수긍하는 모습이다.
허문도는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을 상대로 언론통폐합의 필요성
과 지금이 그 적기임을 설명한다. 하지만 노태우와 정호용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더이상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한다. 듣고만 있던 전
두환은 회의직후 허화평을 통해 최대한 문제점을 없애는 선에서
언론통폐합 안을 만들어오라는 지시를 내린다.
80년 9월 17일 김대중의 선고공판이 열린다. 김대중에게 사형이 선
고되자 방청석의 가족들이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합창한다.
권정달은 신당에 참여할 정치인 포섭에 나선다. 황낙주를 회유 협
박하고 신민당 대변인까지 했던 박권흠은 김영삼을 떠나 전두환
밑으로 들어간다.
미국 40대 대통령으로 레이건이 당선되자 전두환은 미국의 지지
를 얻기 위한 모정의 거래를 준비한다.
전두환은 언론통폐합을 통해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자주국방과
핵개발 포기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백악관 방문이라는 선물
을 받아 국제사회에서 정권을 인정받는 과정을 거친다.
81년 2월 25일 체육관 선거에서 90.2%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
령에 당선된 전두환은 그해 3월 3일 제5공화국 정권을 출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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