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간의 살인혐의 - 81년<박노파 일가족 살해사건>.
한 여름밤의 기괴한 살해사건
81년 여름, 경찰서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실종신고가 들어
온 노인의 가족들이 집안 수색을 요청해왔다는 것이다. 굳게 잠겨
진 노인의 집... 문을 부수고 들어간 형사와 경찰은 등골이 오싹해
지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실내는
무속적인 그림과 장식물로 가득했고, 20여개의 방이 복잡하게 얽
힌 일본식 적산가옥 안은 알 수 없는 악취로 가득했다. 오래되어
거뭇하게 말라붙은 핏자국... 그 끝에 두 명의 여인이 살해된 채 부
패되고 있었고, 2층의 북쪽 끝방에서는 이제 겨우 6살된 소녀가 살
해된 채 발견됐다. 일가족 모두 장도리로 머리를 맞아 살해당한
뒤 목까지 졸려 확인살해된 잔인한 사건이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범행일체를 자백한 조카며느리 정순임
범인이 남기고 간 흔적은 피묻은 장도리와 면장갑 한 짝, 여자 나
이론 장갑, 목을 조르는데 사용한 나이론 끈이 전부였다. 마치 폐
쇄된 성처럼 창살들로 가득한 집안 어디에서도 외부로부터 침입
한 흔적은 없었다.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
까? 피해자의 집 내부사정을 잘 아는 면식범의 소행으로 추정한 경
찰은 곧 살해된 박금자 노파가 수십억원대의 재산가이며, 주변사
람들과의 사이에 원한관계가 많았을 뿐 아니라, 직계자손이 없어
재산을 둘러싸고 친척들간에 분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살해된 박노파의 조카며느리 정순임이 사체발견 며칠 전 박
노파의 집을 기웃거렸으며, 일찍 신고하자는 남편을 말렸다는 이
웃주민들의 말에 따라 그녀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하게 된다. 그
러나 경찰조사시 조카며느리 정순임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
했다. 사건당일의 알리바이를 12번이나 번복하면서도 끝내 버티
던 정순임..... 결국 자신의 집에서 박노파의 패물을 발견하면서 경
찰에 연행된지 6일만에 정순임은 범행일체를 자백했고, 경찰기자
회견장에서 재산상속을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는 박노파에 대한 원
망의 마음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떠오르는 의혹.... 과연 여자 혼자 힘으로 세 명을 살해할 수
있는가?
그러나 정순임의 자백 외에 경찰과 검찰은 그녀가 사건 당일 범행
현장에 있었다는 직접적인 물증을 찾지 못했다. 정순임이 범행직
후 피묻은 슬리퍼와 박노파집 열쇠 등을 길거리 쓰레기통에 버림
으로써 완전범죄를 꾀했다는 것이다. 과연 여자 혼자 세 명을 살해
할 수 있는가?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정순임은 재판 직전 경찰
과 검찰에서의 진술을 모두 번복하고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다. 과
연 조카며느리 정순임은 박노파와 그녀의 양녀, 그리고 가정부 셋
을 살해한 범인인가? 그 진실은 이제 법정에서 가려져야만 했다
살해된 박노파의 예금증서를 가지고 나타난 사나이...
그는 제 3의 범인인가?
직접적인 물증은 없으나, 사건당시 보여준 수상한 행동들과 범행
자백 직후 경찰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뜨거운 참회의 눈물, 그리고
박노파가 사주기로 했던 아파트를 차일피일 미루며 사주지 않아
평소 원망이 많았다는 사실을 들어 검찰은 정순임이 범인임을 주
장했다. 반면 변호인측은 정순임의 경찰에서의 자백이 지독한 고
문에 의한 것이었으며 제 3의 범인은 따로 있다고 주장했다. 양측
의 공방이 팽팽한 가운데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다. 살해된 박노파
의 예금증서에서 돈을 인출하려던 사나이가 검거된 것이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 사건으로 범인은 조카며느리 정순임이 아닐지
도 모른다는 강력한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변호인은 각각 혈액
형이 다른 세 피해자를 살해하는데 사용된 망치에서 A형, 즉 박노
파의 혈흔만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밝혀내면서 제 3의 범인 가능성
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선다. 과연 정순임은 억울한 누명을
썼는가? 진범은 살해된 박노파의 예금통장을 가진 그 남자인가?
그러나 놀랍게도 예금증서를 훔친 범인이 박노파 살해사건을 수사
한 경찰관임이 밝혀지면서 이 사건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법조계의 교훈으로 <박노파 살해사건>의 진실....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고문 때문에 하지도 않은 범행을 자백했다는 정순임의 주장이 설
득력을 얻게 되면서 법정에서는 경찰의 고문 여부를 둘러싸고 팽
팽한 공방이 벌어지게 된다. 과연 정순임은 허위자백을 한 것인
가? 아니면 검찰의 주장대로 극형이 두려워 거짓말을 하는 것일
까? <박노파 일가족 살해사건>은「재산상속」을 둘러싼 조카며느
리 정순임과 박노파간의 오랜 갈등이 빚어낸 비극인가? 아니면 박
노파를 살해한 제 3의 범인이 존재하는 것일까?
결국 <박노파 살해사건>은 재판부의 명판결과 함께 그 진실이 밝
혀졌다. 그 후 몇몇 경찰들은 진범을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
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지난 96년 살인공소시효 15년마저 끝나고
말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아직도 일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피해자 정순임이 <박노파 살해사건>의 진범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다. 22년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은 살인혐의... 그 고통은 과연 누구
의 책임인가?
이번 주 실화극장 <죄와 벌>에서는 우리나라 법조사에 증거재판
주의의 교훈으로 남겨진 <박노파 살해사건>을 통해 심증만으로
진행된 무리한 수사와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 낳은 문제점을 파
헤쳐보고, 당시 증거재판주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재판부의
의미있는 판결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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