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BEST 10 방송 : 1999.9.12~ 일요일 밤 11시 30분

역사의 그늘을 말하다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독재 정권기 한국사회상에 대한 다큐멘터리

홍 석 률 (성신여자대학교)

 

역사의 그늘을 말해야 하는 이유   

사람들은 흔히 역사의 명암을 가늠하자고 한다. 역사에는 밝은 부분이 있고, 어두운 부분이 있으니 양자를 종합적으로 사고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명암을 가늠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의 밝은 부분은 이미 당시부터 권력에 의해 선전되고, 잘 알려지고,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그늘이라고 하는 부분은 그 당시부터 억압적 권력에 의해 진상이 은폐되고, 왜곡되었으며, 은밀하게 이루어진 만큼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과거의 사실은 결코 공평하게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권력에 의해 선택적으로 전달되며, 특히 억압적인 독재 국가권력이 존재했던 경우 이러한 양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업적 같은 것은 그 당시에도 잘 선전되었고, 사람들이 자주 듣게 되었으며, 이를 보여줄 구체적인 통계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기 고문을 당한 피해자의 숫자를 알려주는 통계 같은 것은 당연히 남아 있지 않고, 아마도 집계된 바도 없었을 것이다. 일부 사실이 드러나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빙산의 일각인지 아닌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역사의 명암을 가늠하기 위해 일단 선결되어야 할 것은 그늘지고, 감추어졌던 부분을 조명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전제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운위하며, 역사의 명암을 현재 남겨진 상태 그대로 가늠하자고 하는 것은 결코 객관적이지도 종합적이지도 않은 역사인식이다.

역사의 그늘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식과 관련된 문제만은 아니다. 역사 속의 남겨진 그늘이 그대로 어둠 속에 남아있게 될 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 그 자체가 이러한 그늘 속에 감추어진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어둠 속에 불행한 과거사를 발생시켰던 여러 문제들이 그대로 남게 될 것이고, 이는 언제라도 다시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다. 재발방지를 위해 잘못된 일들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최근 민주화의 과정에서 각 종 과거사 진상규명 문제가 대두되고, "이제라도"과거의 그늘진 부분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기본적으로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이다.       

대량학살에서 금지곡까지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기본적으로 그늘진 역사에 대해 접근하려 했다. 역사의 그늘진 부분에는 여러 종류와 차원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하였고 광범위하게 자행되었으며, 또한 가장 근본적이었던 문제는 독재 정권기 발생한 인권침해 문제라 할 수 있다. "이제는"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이제는"이 방영한 제 1회 프로그램은 "제주 4.3 사건"이었다. 아울러 노근리 사건(9회), 보도 연맹원 학살 사건(29, 30회) 등 한국전쟁기 자행된 대량학살 문제를 방송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이는 일단 한국 사회에서 그 동안 철저하게 침묵이 강요되었던 '민간인 학살'문제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에서 일단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민간인 학살의 피해자들은 가족이 죽어서 피해자였을 뿐만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말할 수 없었고, 국가권력으로부터 감시를 받는 등 2차적 피해를 또한 감당해야만 했다. 사람들은 피해의식 때문에 좀처럼 이러한 문제에 대해 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제는"을 통해 방송에서 민간인 학살 문제가 보도되자 사람들은 좀 더 쉽게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최근 한 연구자가 한국전쟁기 전라도 어느 마을의 동향을 연구하기 위해 지역 주민을 인터뷰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가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계속 요시찰을 당했제. 우리는 요시찰 가족이여.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제. 그 란디(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런 데서 방송에 나오고 하니까 말할 수 있게 된 것   이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정기적으로 봄, 가을이면 보안대에서 오든지, 경찰서 형사계에서 오든 지 의례껏 와서 그냥 돌아보고 간 사람도 있고,  쓰잘대기(쓸데) 없는 것 물어보 고 간 사람도 있 고... 연좌제 폐지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남아 있어서..." 염미경, 2000 "전쟁과 지역 권력 구조의 변화", 표인주 외, "전쟁과 사람들-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연구" 139쪽

다큐멘터리 "이제는"은 타이틀 그대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마련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장기간 억압적인 독재정권이 지속되면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가 계속 발생하였다. 독재 정권기 한국현대사는 억압적인 국가권력과 민주화 운동의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이제는"은 독재 정권기 민주화 운동 탄압 과정에서 자행된 고문(28회), 프락치 공작(97회), 그리고 이와 관련된 녹화사업(18회) 및 의문사(68회)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인권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자행된 인권침해도 문제이지만 이와는 관련 없는 국가폭력 또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할 인권유린이 또한 존재했다. "이제는"은 이러한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 동안 철저히 감추어져왔던 실미도 사건(12회), 북파공작원(50회, 66회), 베트남전 포로 문제(19회) 등이 다루어졌다. 이는 국민을 국가의 부속물로 수단시하는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엄청난 '국가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배경에는 민족의 분단이라는 문제가 존재한다. 분단은 실질적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적인 발전을 억압했고, 수많은 인권침해를 불러일으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제는"이 다룬 연좌제(24회) 전향공작(42)의 문제는 분단과 관련된 인권문제의 실상을 잘 보여주었다.

두 차례 방영된 '삼청교육대' 문제(47회, 55회)도 의미가 컸다. 과거 군사독재정권은 쿠데타로 불법적인 권력 장악을 하는 과정에서 민심수습의 차원에서 거리의 '깡패'들을 순화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연행해갔다. 그러나 이 때 연행된 사람들은 '깡패'뿐만이 아니라 민주노조 관련자 등 민주화 운동가들도 존재했고, 전두환과 '하나회' 세력에게 밉보인 강창성 前보안사령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들이 설령 지탄받는 '깡패'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도 보장받아야할 정당한 권리가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각종 가혹행위를 가하고, 나아가 보호감호 처분까지 내리는 과정은 군사 독재정권의 폭압성을 잘 보여주었다.

"이제는"이 다룬 독재 정권기 언론탄압(언론통폐합 11회, 자유언론실천선언 38회)과 대중가요에 대한 규제(21회), 우민주의적 문화정책(국풍 81 90회, 5공화국 3S 정책 95회) 등도 독재정권이 억압적인 방식으로 국민을 통제하고 우롱했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동안 방영된 내용을 놓고 볼 때 "이제는"은 과거 독재정권의 인권침해와 억압성에 대해 대량학살부터 대중가요 규제까지 나름대로 종합적으로 다루려고 노력했고,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인권의식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흡했던 부분도 존재한다. 민중의 생존권 문제는 다른 부분에 비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민중의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전태일 사건(23회)과 인민노련 활동(91-93회)이 다루어졌고, 노동운동과 관련 있는 박창수 의문사 사건(68회)과 도시산업선교회(41회), 그리고 도시빈민과 관련이 있는 재개발 문제(53회)등이 다루어졌지만 100회에 이른 전체 프로그램 편수를 볼 때 이 부분이 적극적으로 조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민중들의 생존권 문제는 국가의 경제정책 및 도시계획, 사회복지 정책과 직접 맞물려 있는데 이 부분을 다룬 것은 IMF  경제위기 문제(67회)와 강남 땅 투기 문제(79회) 정도이다. '민중'부분은 우리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과소 대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서도 과소하게 평가되고 있다. '인민노련'사건을 다룬 "한국의 진보" 3부작은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해준다는 면에서 의의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초점이 진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세력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어,  노동운동 저변의 흐름과 기층 민중의 삶과 고민 자체를 알려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여성문제도 한미동맹과 관련된 기지촌 문제(61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등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는"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 의식을 한 단계 높이는 역할을 했지만 아직도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문제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과거 그늘진 부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갖지만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될 수 없었던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안주할 수는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이 친일 진상규명, 독재 정권기 인권침해의 실상에 대한 진상규명이 시작되고 있는 단계에서는 단순한 폭로보다는 어떻게, 무엇을 목적으로 진상을 규명할 것인지에 대해 좀 더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의 숨겨진 것을 들추어 보는 것이 곧바로 새로운 역사의식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숨겨진 진실의 폭로와 발굴은 이것이 기존의 역사의식에 무언가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역사상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갈 때 '역사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제는"은 기존의 현대사 관련 방송 프로그램 중에 단연 이러한 문제 제기와 목적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프로그램이었다.   

"이제는"의 제작진은 방송의 취지로 '강자와 승자에 의해 왜곡되거나 은폐된 일이 허다한 우리 현대사에 숨어 있는 진실의 규명'을 내세웠다. 즉 기존의 현대사 인식은 강자와 승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구축되었고, '억눌린 자, 소외된 자, 패배한 자들의 항변'을 담아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재 권력에 의해 은폐된 역사적 사건의 진상규명을 추구함으로써 강자 중심의 현대사 인식을 극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정길화, 2000, "나와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말한다" 『월간 말』11월호 ; 정길화, 2001, "역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2001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 출사표-"

 http://www.jungpd.co.kr/1.html.

약자의 목소리, 그늘진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 일단 가장 직접적으로 걸리는 문제는 사실적 근거를 확보하는 문제이다. 역사 속에 남겨진 사실 자체가 권력관계를 반영하기 때문에 약자의 목소리는 실질적으로 잘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역사의 그늘진 부분을 조명하는 작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사회적 통념과는 배치되거나 전혀 몰랐던 생소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듣게 하는 일이다. 이때 문제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렇게 재조명된 생소한 진실을 수용할 것인가이다. 즉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용될 수 있는 사실적 근거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이제는"은 '진실규명'과 증거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이를 방증할 만한 문서자료를 찾아냈고, 경산 지역의 코발트 광산 갱도를 다이너마이트로 뚫고 유해를 발굴하였다. 각종 프로그램에서 최근 비밀해제 된 미국자료들이 자주 등장했다. 관련자의 증언도 넓게 수집했다. 관련 학자를 비롯한 전문가 그룹과의 협조 관계도 지속적으로 구축하였다. 또한 제작진의 열의와 더불어 방송국이 보장해주는 제도적, 경제적 힘은 사실적 근거의 확보 면에서는 수공업자에 불과한 역사연구자들의 능력을 압도한 측면도 있었다고 인정한다. 제작진의 한 사람은 소장 역사학자에게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넘겨줄 때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이채훈, 2001, "아직도 말할 수 없는 한국 현대사" 『역사비평』가을호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일단 근거를 찾아내는 작업은 기본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특히 과거에 은폐되거나 금기시되었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더욱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노근리 사건을 전 세계적으로 쟁점화 시킨 AP 통신의 기자는 수개월 동안 노근리 주민의 증언을 입증할 설득력 있는 자료를 찾기 위해 문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이제는"의 제작진들에게 허용된 제작기간과 비용은 이러한 작업을 허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보다 설득력 있는 사실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학자 및 전문가 그룹과의 협조관계도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구축될 필요가 있다.

사실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문제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각과 목소리를 폭넓게 반영하는 문제이다. 강자의 목소리와 문제 제기는 항상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것으로 인정받아왔고, 반면 약자의 목소리와 문제 제기는 항상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약자와 강자의 구분도 실질적으로는 상대적이라서 우리가 흔히 약자라고 하는 소외된 계층 내부에서도 다시 강자와 약자의 목소리가 나누어질 수도 있다.

기존의 다큐멘터리들은 이미 중요하다고 인정된 사건과 인물들의 증언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사람들이 잘 생각해 보지 못한 사소한 소재 속에서, 또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증언 속에서 보다 의미 있는 내용들을 찾아 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소재와 증언들이 평범하고, 역사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역사에 보다 다가서고, 관심을 갖게 만드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치인과 운동가들의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그 저변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광범위하게 남겨 놓고, 공유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가 사소하게 생각했던 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노력도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