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교양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BEST 10 방송 : 1999.9.12~ 일요일 밤 11시 30분

증언의 운동에서 발언의 정치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과거를 먹고 사는 게 아니라, 미래 즉 진보를 먹여 살리는 길을 택해야 한다. 강제가 아닌 유혹으로, 억압이 아닌 외설로 망각을 부추기는 주류 코드에 맞설 반 코드를 체질화시켜야 한다. 지체된 진실, 유보된 증언을 내 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시점은 지났다. 과거지사를 비로소 말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말한다는 결기로는 충분치 않다. 그것은 이미 개혁적 코드, 개량적 주류의 선택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체제도 권력 창출과 그 지속을 위해서라면 물론 전략적이긴 하지만, 과거를 새로이 해석하고 평가코자 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발언의 방향을 과거가 아닌, 훨씬 위태로운 현재와 더욱 불투명한 미래를 향하도록 해야 한다. 현재에서 과거로 되돌아감은 미래를 지향할 때 그 변증법적 역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럴 때 또 하나의 역사 다큐멘터리 차원을 넘어, 진보적 프로그램/텍스트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 요컨대 과거의 증언과 미래의 발언이 다음 100회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서 동시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물론 일차적으로 피디와 작가의 몫이다. 그렇지만 비평가와 학계, 그리고 무엇보다 시청자의 책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MBC의 선택이 아닌, 역사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소수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 하는 발언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을 욕망하는 '우리' 스스로의 언론 실천이기 때문이다. 인정에 인식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애정과 질타, 비판과 격려가 지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게는 더욱 필요한 선물인 듯 싶다.

증언과 기억의 다큐멘터리 정치학

프로그램이고 텍스트며 동시에 사회적 담론인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지금까지 과거사를 주로 다루어 왔다. 최근 약간 감소되었지만, 이러한 경향은 초반에 매우 두드러졌다. 질곡의 한국 현대사 속 많은 진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연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 선택은 또한 7-80년대 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눈으로 목격한, 국가에 의한 수많은 왜곡과 조작을 몸으로 생생히 경험했던, 그럼에도 침묵을 지켰던 자신의 비겁함에 대해 반성하는 지식인의 양심과 열정이 결합한 결과이기도 하다. 바로 그 때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벙어리같이 입을 다문, 모순의 권력을 비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권력에 빌붙어 이를 옹호한 과오에 대한 뉘우침의 일단이기도 하다.

특히 프로듀서라는 이름을 달고 방송사를 다니면서 감수해야 했던 권력에의 굴종, 그로 인한 수치감을 '이제' 이런 프로그램/텍스트로 떨쳐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방송사 내 소수 양식 있는 지식인 세력의 역사에 대한, 사회를 위한, 민중을 향한 반성문에 해당한다. 지난 시절의 불량함에 대한 양심선언이다. 보다 큰 모순이 배태한 언론 모순, 매체 모순에 대한 고해의 노력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길화 피디는 자기 모교의 후배 기자와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서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보상적 실천'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이름 붙인 바 있다. “침묵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조언은 어떻게 보면 옳지 않은 침묵을 지켰던 자신의 원죄의식에 대한 (무)의식적 고백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제주 4 3으로부터 시작해 미국의 세균전, 실미도 특수부대, 인혁당 사건, 보도연맹, 국가보안법, 반민특위, 김재규, 12·12와 미국 등 은폐되고 조작된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보도하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꾸준히 반성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 이는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한데도 비겁하게 침묵으로 일관한 사내 기자 저널리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수구에 대한 진보의 추궁, 권력화 세력에 대한 역능 주체의 도전이었다. 이런 피디저널리즘의 생성은 결국 방송사 내부 말의 무기를 지닌 자, 즉 지식인 사이의 이데올로기 다툼으로 비화된다. 전자에 대한 기자의 부정과 냉소, 거부의 태도가 이를 잘 반증된다. 아무튼 어둠에 묻혔던 진실을 발굴하고, 과거사를 전혀 새롭게 해석하며, 그럼으로써 새로운 역사(歷史)를 만들어내는 역사(役事)로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 못한/안한 기자저널리즘 체제를 내부 고발자로서 통렬하게 재판했다. 아울러 이렇게 만들고 이를 방조한 방송사 내외부의 구태의연한, 부패한, 관료화한 권력체제를 치명적으로 찔렀다. 요컨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선전의 유혹으로 비틀리고 말랑말랑한 연성뉴스로 거세된 주류 텔레비전 영토 내 소수적으로 구성된 전복의 지점, 저항의 비트였다. 변이적 기억의 처소였으며, 진보적 흐름을 생성해내는 튼실한 언어-기계였다. 바르뜨(R. Barthes)의 말의 표현대로라면, 밋밋한 방송의 지대(stadium)에 난 변태적 구멍(punctum)이었다. 반(反)담론의 운동이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나아가 사회 내 지배적인 기억의 공학, 역사의 기획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저항한다. 역사적 글쓰기의 문제설정을 권력의 손에서 떼어내 해석의 주체로서 학계, 그리고 판단의 주체로서 인·민(person/people)에게 정확하게 위치시킨다. '언론'이라는 말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와 같은 프로그램/텍스트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실천 권리로서 되돌려진다. 아렌트(H. Arendt)가 말한, 역사의 인간화는 바로 이런 공적영역 내 담론화 과정을 통해 이 땅에서 강화된다. 사회 내 공론의 넓이를 확장시키고 그 깊이를 심화시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의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국가 독점의 단일 역사, '국민' 중심의 균질 사관을 소수 분열적 지식/담론으로 풀어 헤친 성과는 이미 많은 사학자와 언론학자들이 평가한 바 있다. 해체의 무게감은 지난 해 소위 '박정히 때리기'라며 이 프로그램/텍스트의 '편파성'을 문제 삼은 조·중·동 삼각편대의 집요한 시비, <월간조선>이 제기하는 음모론, 우파정치세력의 선동에 비춰보더라도 쉽게 실감할 수 있다. 그들에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말 그대로 진보의 구체화된 주적에 해당했다.

방송사 내 발언의 공간이 피디와 기자의 다툼을 통해 확장되었다면, 사회적 토론의 공간도 바로 이런 수구 권력과 진보 역능 간 치열한 싸움을 거치며 확보되어 갔다. 과거에 대한 100회에 걸친 지속적인 말 걸기는 역사/기억을 환기시켰으며, 우리의 지난 삶에 관한 새로운 논의/인식의 양식을 제공했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학계가 내놓은 어느 텍스트보다 더 의미 있는 교과서로서 역사가 사회적 논쟁, 담론적/지적 투쟁의 상대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시리즈로 나온 한국전쟁의 경우, 상당히 드문 두터운 교재였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선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는 피해야 한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이 프로그램/텍스트가 지닌 명백한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가 분명 소수의 투쟁의 산고이고 또 사회적으로 매우 유효한 울림을 가져온 게 사실이지만, 방송사의 기회주의를 무시할 수 없다.

만약 '말할 수 있다' 대신에 '이제는'에 평가의 방점을 찍는다면, 이 프로그램/텍스트에 대한 아쉬움은 매우 커진다. 1999년의 시작은 한참 늦다. 역사적으로 너무 지체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 대한 지나치게 인색한 평가라 할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프로그램/텍스트의 진보주의를 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국 사회의 변화는 방송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다. 민주 언론을 위한 사내 투쟁을 인정하더라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외부의 선취된 변화에 대한 제작자들의 피할 수 없는 응답에 가깝다. 7살이 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가 93년의 문민화 이후에도 상황이 한참 바뀌고 나서야 탄생했다는 사실은 뼈아픈 유감으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침내 진보적 현실을 진보적 관점에서 진보적 언어로 말하려는 소수자적 욕망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발언과 증언의 책무를 봉쇄하고 자기 검열한 다수자적 의지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 의지가 언제 다시 프로그램/텍스트로 구체화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아직 불확정적이다. 불예측적인 잠재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를 통해 표현되는 진보적 열망, 비판적 의식이라는 것은 복잡한 현실/콘텍스트를 조건으로 해, 혹은 그 상황을 적극 활용해 구성된 문화정치적인 효과성에 다름 아니다. 후자가 일방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를 맥락에서 떼어내 논하는 것은 한마디로 부적절하다. 프로그램/텍스트를 현실과 긴밀히 연관시킨 상태에서 평가하는 비평의 태도가 필수적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를 피디의 정치적(무)의식, 저널리즘 양식, 방송 상황, 그리고 사회 분위기라는 다층적 구조, 둘러싸는 환경 속에서 다각적으로 접근하는 게 필요한 셈이다. 그 주고받음의 상호과정이 지닌 성질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 행방을 앞서 읽어내며, 이를 바람직한 실재 현실로 (재)견인하는 게 급선무다.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이렇게 된 조건은 무엇인지 짚는 것은 틀림없이 옳다. 그러나 그 상황이라는 게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 예측하고, 그 속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가 무엇을 어떻게 달리 실천해야 하는지 구상하는 것이 문화정치학적으로 더욱 긴요한 작업이다.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지가 미완의 숙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가 보여주는 지금 모습이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은 절대 금물이다. 역사의 산물이고 정치의 효과이며 사회적 표현으로서 이 프로그램/텍스트가 편성/배치의 치열한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 진보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을지조차 결정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일이다. 진보의 선을 확실히 다지는 작업이다. 조·중·동에 맞서는 것이 자동적으로 미디어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언론 민주화는 분명 그 구조의 파열을 조건으로 하지만, 훨씬 넘어선 곳에 목표를 둔다. 욕망과 신념, 의식과 주체성의 가차 없는 표현 및 공감 영역 확대가 미디어 진보의 지향점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바로 이 '부단하게 앞서 나감'이라는 유일 조건을 충족될 수 있는 한 진보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밖에는 죽음이다. 주류화의 방심, 수구화의 늪뿐이다. 온건한 타협의 나태만 존재한다. 사실 수구 진영, 수구 체제도 분주하게 운동한다. 주변적인 것, 소수적인, 전복적인, 탈주적인 흐름을 재 영토화 시킬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주류적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사회의 주류 세력은 여전히 강고하다. 진보적인 것을 봉쇄하고 궁극적으로 말아먹기(roll-back) 위한 만만찮은 공세를 적극 펼친다. 10대, 20대를 시장으로 호명해 내고 이들의 지지를 아래로부터 끌어내 도덕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헤게모니 정치에 능수능란하다. 이건희 회장에게서 볼 수 있듯이, 가부장적 구태를 인자한 관용으로 감추는 치장술 또한 보통 아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심지어 <동아일보>도 자신의 생존과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변신한다. 독자를 끌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태세다. 바로 이게 기회주의 신문이 지금까지 보여 온 행태다. 청년을 유혹하기 위해 펼쳐놓은 그들의 미끈한 지면, 화려한 메뉴를 보라!

권력에 저항하는 반 담론의 구상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까지와 같이 왜곡된 과거에 대해 발언하는 것, 망각된 진실에 대해 증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자본에 의해 주도되고, 국가에 의해 지원받는 시대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말의 주제를 지금보다 훨씬 다변화시켜야 한다. 제대로 말 못한 과거뿐만 아니라, 사회가 말하기 꺼려하는 바로 지금의 모순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21세기 초입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과거처럼 말을 구금하는 폭압적 국가 권력이 아니다. 훨씬 선량한 얼굴을 지닌 재벌이다. 청년 세대의 소비욕망에 자애로운 자본이라는 맹주다. 억압과 배제의 기술로써 기득권을 지탱해 온 과거 권력과 달리, 대자본 중심의 오늘날 권력 통치술은 매우 세련되어 있다. 모든 걸 교환법칙에 따라 시장 안으로 빨아들이는, 그럼으로써 영향력을 배가시키는 과학경영을 구사한다. 한국사회 대자본은 블랙홀이다. 경제는 물론 정치와 문화, 예술, 스포츠, 교육, 미디어 등 모든 걸 가리지 않고 끌어들인다. 담론까지 매도(賣渡)한다. 그래서 담론 천국 상태를 완성시킨다. '개똥녀'가, '누드 해수욕장'이 공적 영역을 장악한다. 이를 둘러싸고 논쟁이 치열하다. 그럼으로써 김우중 문제, 삼성의 문제는 자연스레 사회적 토론 과정으로부터 지워진다. 이는 결코 음모의 결과가 아닌, 자본지배의 상황이 낳은 당연한 언론 풍경이다. 현재의 외설 천국은 매체 자본의 협조, 거대 자본의 지지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요컨대 지금은 발언을 억압하고 증언을 금지하는 시대가 결코 아니다. 더욱 말할 것을 부추기고 더욱 생생한 화면으로 보여주기를 꼬드기는 과잉 담론의 시대다.

침묵이 아닌 말을 조장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현실/진실을 은폐하는 권력의 작동은 비단 국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쟁하는 미국/제국 또한 그 폭력적 '하드파워'를 선전적 '소프트파워'로 보완한다. 그럼으로써 병 주고 약 주는 일방주의를 관철시킨다. 그 작동 반경은 중동, 동구,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가히 전 지구적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그 현실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본에 대해, 미국/제국에 대해 제대로 발언하지 못했다. SOFA나 기지촌에 관해, IMF와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재개발에 대해 일회적으로 다룬 것이 고작이다. 그럼으로써 여타 시사 다큐멘터리와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권력의 본질을 제대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사실 그 이름과 달리 자본과 제국에 대해서는 매우 무기력했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할 수 있는 데도 못한 것인가? 역사 다큐멘터리의 길을 선택한 것인가? 벤야민(W. Benjamin)이 말하는 '역사를 거꾸로 빗질하는 작업'은 과거사를 재해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당장의 진실을 드러내고 미래의 현실을 적극 상상하는 실천까지 포함한다. 그 변증법적 시각의 회복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에 시급하다. 자본이라는 실체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한국의 울타리를 넘어 미국/제국의 작동에 심문의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문세광에 관해, 허문도와 3S 정책에 대해, 무등산 타잔에 대해, 궁정동 사람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의미 있으나 만족스럽지 않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가 과거에 대해 발언하고 증언한 것은 옳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진보의 담론은 과거와 함께 현재, 미래까지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국을 넘어 세계에 대해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로부터 시작해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질 자본의 실체, 미국/제국의 본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프로그램/텍스트의 역사적 선택이다.

물론 이런 담론의 진화가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자본의 규칙, 신자유주의 이념이 방송 질서를 크게 바꾸어놓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장과 산업, 경쟁 논리가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현실은 방송의 공공성, 프로그램의 공익성 가치를 치명적으로 훼손시키면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와 같은 프로그램/텍스트를 계속해서 압박한다. MBC 내부 진보적 담론정치의 퇴조, 비판적 저널리즘의 침체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2580>의 연성화는 한두 해의 문제가 아니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가 일요일 심야에 배치된 것도 나름대로 의미심장하다. 편성의 측면뿐만 아니라 내용의 측면에 있어서도, 재정 위기에 빠진 지상파 TV에서 선정적 소재의 유혹이 앞으로 더욱 드세질 것이다. 시청률 압박이 훨씬 강화될 것이다. 실제 선정주의는 뉴스와 다큐멘터리, 교양과 오락을 가리지 않는다. 이와 함께 외부의 관심과 애정은 훨씬 줄어들었다. 진보적 의식을 지닌 시청 층이 얕아지고 있으며, 미래 세대의 역사에 대한 무지, 이념에 대한 냉소는 매우 우려스러울 정도다. 이런 모든 게 자본 권력이 득세한 시대의 징후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악화된 조건 하에서 피디 저널리즘만 변이성, 소수성, 급진성을 고수해 나갈 것이라는 기대는 가당치 않다. 386과 그 이전 학번 출신 소수 의식 있는 피디들로 구성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가 얼마나 재생산될 지 보장이 없다. 새로운 권력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시비함으로써 진보에 대한 사회적 욕망을 표현해 나갈 수도 있지만, 여러 내외부적 이유로 말미암아 실패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100회를 맞이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를 축하만 할 심정이 아닌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앞으로 심화될 위기, 그 타개 전략에 대해 고민해 보자는 제안이 훨씬 다급하게 느껴진다.

진보적 의제를 발굴하고 이를 유효한 언어로 처리해 미래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전략을 구상하지 않고는 수구화의 경향에 맞서기 힘들다. 국경을 모르는 자본과 이를 거스르는 진보의 과제를 찾아 아시아와 세계를 여행하는 게 급선무다. 사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여성과 지역, 이주 노동자, 장애인, 성적 소수자 등 억압된 주체의 삶과 연관된 드러나지 않은 주제들을 적극 발굴해야 한다. 100회를 거치며 여성 문제를 다룬 것은 선정적인 정인숙씨 사건 딱 한 차례에 불과했음은 프로그램/텍스트의 치명적 약점이다. 삼성의 비리, 재벌의 범죄, 자본의 권력에 대해 침묵하는 것과 더불어 다중의 막중한 현실을 도외시 하는 것은 더 이상 허락될 수 없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의 진보적 재구성이 급선무다. 자본의 시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는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과 함께 미래의 평등 · 평화 · 평온한 삶을 상상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그게 100회, 200회 문턱을 넘어 진보적으로 살아남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