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5일 (일) / 제 94 회

▣ 무등산 타잔 박흥숙

* 무등산의 비극 “무등산 타잔 박흥숙”

“광주 무등산 무당 마을서 마을청년이 망치로 때려 4명 사망”
“집 헐리자 차례로 묶고 구덩이에 쳐 박아 쇠망치질”
    - 당시 기사 中-

1977년 4월20일, 광주 무등산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자신
의 무허가 집이 철거되는 것에 격분한 21살의 청년 박흥숙이 철거
반원 4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사건 후 그는 “무등산 타잔”이라 불리며 평소 엽기적인 행각으로 
살아온 인물로 보도된다.

* 구명회원들이 말하는 “인간 박흥숙”
구명운동 참여자들이 살인자를 살리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78년 5월 박흥숙의 사형 판결이 난 후, 각계각층에서의 구명운동
이 시작 된다. 당시 구명회원 참여자 이양현은 이야기 한다. 그 사
건은 오갈 곳 없는 도시빈민의 마지막 아우성이었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늘어갔다. 제2의, 제3의 박흥숙 사건이 다시는  일
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했다고 이야기 한다. 63명 정
도의 회원을 시초로 광주 전역에 구명운동 확산되기 시작한다.

* “무등산 타잔 박흥숙”여동생 박정자 인터뷰
오빠는 평소 효성이 지극했으며, 똑똑하고 공부도 잘 했다. 살아 
있었다면 나라의 큰 일꾼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런 대책이 없었던 
우리로선 유일한 안식처였던 무허가 움막집은 우리 가족의 전부였
다고 고백, 그날의 강제 철거가 없었다면 우리 가족의 삶도 달라지
지 않았을까? 28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편히 제대로 웃어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한다.

* 박흥숙이 독학으로  공부를 하기 위해 녹음했던 육성 녹음 
테잎
불과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였지만 사법고시에 대한 꿈이 있던 그
는 열심히 공부했다. 평소 운동과 법에 관심이 많았던 박흥숙, ‘법’ 
공부에 관심이 많아서 책 내용을 녹음해서 반복해 들으면서 자신
만의 공부방법을 터득해 갔다. 너무 자주 들어 늘어진 카세트 테잎
을 통해 공부에 대한 열정을 엿 볼 수 있다. 

* 사건 현장을 목격한 오모씨의 생생한 목격담
당시 사건 현장 목격을 바탕으로 77년 9월 1심, 재판의 증인을 섰
던 오모씨. 보통 철거를 하면 때려 부스는 정도로 끝내던 것과는 
다르게, 사건 당일은 불을 질렀던 것으로 기억했다. 다시는 그 같
은 사건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 도시빈민의 진정한 아픔은 무엇인가
수출 100억불 달성의 그늘에 가려진 이농민들의 현실은... ...
초등학교 졸업 후, 영광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지만 지독한 가
난으로 입학포기.
고향인 전남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를 떠난다. 그 후 광주 무등산 
덕산골 무허가촌 도시빈민이 된 박흥숙은 이농민의 단면을 보여준
다. 박흥숙 사건이 일어났던 1977년부터는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한국 경제는 중화학 공업으로 전환, 수출주도형 산업으
로 진행되면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커져가고 있었다. 
농촌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한 이농민들은 국가의 무관심속에 불안
정한 취업, 열악한 주거환경, 교육, 의료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
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당시 전남 광주 또한 도시빈민이 늘고 
있었고 그 속에 박흥숙이 있었다. 엽기적인 살인을 한 청년 박흥숙
의 살인 사건 속에서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이농민의 아픔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 박흥숙 자필로 쓴 최후 진술서 최초 공개!
박흥숙의 자필 진술서가 최초 공개된다. 1980년12월 26일 사형당
하기 직전 최후 변론에서 살인범 박흥숙은 피해자 가족에게 깊이 
사죄하며 죄를 인정한다. 하지만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
권을 무참히 짓밟는 국가 권력에 대한 일침을 가한다.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도시빈민이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과
정에서 발생한 범죄는 개인의 문제와 책임으로 끝나야 하는 문제
인 것인지 생각해 본다. 

* 생존철거반원 김모씨의 공권력의 개입에 대한 최초 철거
상황 고백 
당시 생존 철거반원 김모씨는 당시 철거 상황에 대해 철거후 소각 
처리에 대한 상부지시에 대해 입을 열었다.
아무런 이주 대책도 제시하지 않고 이주 많을 강요했던 것이 사실
이라고 고백. 결국 그날의 살인 사건은 가해자인 박흥숙도 패(敗)
하고, 피해자 철거반원들도 패(敗)했던 싸움이다. 진정한 승자는 
정부가 아닐까라고 이야기 한다. 
  
* 도시빈민 운동가였던 “김혜경, 이철용, 손학규”바라본 도시
빈민 실상
공권력으로 밀어 붙인 강제철거의 본격적인 시작은 1971년 경기
도 광주 대단지 사건.
이 사건을 필두로 도시빈민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크고 작은 투쟁과 저항, 그리고 충돌을 계속 일으킨다. 이러한 과
정 속에서 빈민들은 자살, 구속, 그리고 계속되는 가난으로 고난 
받는다. 당시 경기도 광주는 도로나 배수시설이 전혀 없었던 황무
지였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스스로 먹고 살 것이 생길 것이라며 
생각하고 인간이 살수 없는 곳에 인간을 내몰았던 것이다. 이렇듯 
전남 광주 무등산 덕산골 또한 도시빈민이 늘고 있었고
그 속에 도시빈민 박흥숙이 있다. 가진 것은 없었으나 열심히 살
기 위해 노력했던 도시빈민 박흥숙은 나라의 대책 없는 철거 정책 
속에 묻혀 갔던 것은 아닐까?

*「망치부대, 일용직 철거반원」과 유가족 인터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던 일용직 노동자 위치의 철거반원.
당시 광주시 동구청 소속의 철거반원들은 ‘망치부대라’ 불리며 무
등산 일대, 무허가촌의 주민의 불청객으로 인식되었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집안의 가장을 떠나보내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
다고 한다. 유가족들이 이야기 하는 철거반원들의 애환과 아픔을 
들어보았다. 

* 계속되는 강제철거 진정한 승자는 누구인가
오 갈 곳 없었던 도시빈민 살인자 박흥숙. 망치부대 일용직 철거반
원 사망자들. 도시빈민에게 정부는 대책 없는 철거정책을 시행했
고, 당시 강제 철거를 도맡았던 철거반원들은 일당을 받고 정부를 
대표했다. 무허가 움막집의 주인 박흥숙은 살인자가 됐다.
도시빈민 박흥숙과 철거반원 4명의 사망자들 중 어느 쪽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1977년 4월20일의 살인 사건은 가해자인 박흥숙도 패(敗)하고, 피
해자 철거반원들도 패(敗)하고만 결국 진정한 승(勝)은 정부가 거
머쥔 것은 아니였을까?
2005년 지금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되는 강제철거가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