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일 (일) / 제 92 회
▣ <한국의 진보> 3부작
제 2 부 : 인민노련 혁명을 꿈꾸다!
*1987년 대선, 독자 후보 백기완 진영의 중추세력 인민노련
1987년 대통령 선거는 6월 항쟁이 끝나고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최초의 선거였다. 군정종식에 대한 국민의 여망은 높았지만 야당
지도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후보단일화를 외면하고 만다. 당시 민
중운동 세력의 다수는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기완 후보는 민주연립정부를 주장하며 등장한
다. 당시 대학로 백기완 후보 연설장에 모인 30만 명의 지지자들,
그들은 보수 야당과 구별되는 새로운 세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
러냈다. 야당 후보 단일화뿐 아니라 긴 안목에서 민중의 정치세력
화를 이루고자 이들은 등장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인천지역민주
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있었다.
* 1987년 6월 26일, 한국 전쟁 이후 최대 지하조직 인민노련
발족하다.
1985년부터 조직의 뼈대가 형성되기 시작한 인민노련은 1987년 2
월 7일 박종철의 추모 집회장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인민노련
은 ‘살인・고문・강간 정권 타도투쟁위원회(타투)’ 라는 이름으로
서울 지역 원정시위에 나섰다.
6월 항쟁의 함성이 이어지던 부평역, 1987년 6월 26일 5천여 명이
모인 투쟁의 현장에서 인민노련은 발족식을 갖는다. 당시 인민노
련 조직원이었던 노회찬, 조승수, 송영길 의원과 주대환, 황광우,
최봉근, 신지호 씨 등이 비밀 지하조직의 형성과정을 공개한다.
* 인민노련, 1987년 10월 대의원대회에서 주체사상파와 결별
하다.
1980년 광주학살의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혹이 커지면
서,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에는 반미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다. 반미의식이 확산되는 데 커다란 계기가 되었던 것은 김영환 씨
가 쓴 <강철서신>. 그것은 곧 대학가 전체로 퍼져나갔고 학생들
사이에 ‘주체사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 씨에게 최초로 주체사상을 소개한 사
람은 노동자 심진구 씨였다. 심진구 씨는 광주 학살에 대한 의문으
로부터 북한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당시 주체사
상을 수용했던 학생회 간부들이 주체사상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밝힌다.
운동권에 주체사상이 확산되어 갈 무렵, 인민노련은 주체사상파
와 대립해간다. 당시 인민노련 조직원들은 김일성 중심의 수령론
과 비민주주의적인 북한 사회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당
시 주체사상파가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을 무시한 채
미국의 일방적인 식민지로만 한국사회를 바라보았다고 비판했다.
결국 인민노련은 1987년 10월에 열린 2박3일 간의 비밀 대의원대
회를 끝으로 주체사상파와 결별하게 된다.
* 1989년 구속된 인민노련 조직원들, 법정에서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다.
1989년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으로 회귀하며 민중운동 세력에 대
한 압박에 나섰다. 청와대의 ‘좌경세력 대책회의’에 이어 공안 당국
은 ‘선동 배후세력 즉시 검거’를 선포한다. 인민노련 조직원들은 당
시 ‘A급 비상경계령’을 발동하고 조직 보위에 들어갔다고 증언했
다. 누군가 항상 미행하고 있을 거라는 전제하에, 약속 장소에 5분
만 늦어도 사는 집까지 즉각 철수 하는 등 보안의 생활화를 했지
만 국가 기관의 수사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당시 인민노련 사건
의 치안본부 수사팀장이 인민노련 지도부를 구속하기까지 집요한
추적과정을 공개한다.
당시 구속된 윤철호, 오동렬 등 조직의 중앙위원들은 당시 법정에
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며 자신의 사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 또 한번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인민노련, 1991년 8월 전국적 지하정
당을 결성하다.
인민노련은 노동현장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인텔리 중심
으로 운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직원의 절반을 노동자로 유지했
다. 인민노련을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는 지하조직들이 통합을 모
색하면서 1991년 8월 그들은 전국적인 지하정당을 결성한다. 이 지
하 정당은 전국 20여개 지역에 지부를 두었으며 정조직원만 600명
을 넘었다. 조직원들은 사상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당시 상황에서
는 불가피하게 지하조직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한다.
몇 달 후 이들은 한국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실체를 드러
내고 5천명의 지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기인 대회를 갖는다. 10
년의 지하생활을 마치고 그들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냈을 때의 감
격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감격도 잠깐, 금방이
라도 세상을 뒤엎을 것만 같았던 이들 앞에는 거대한 역사의 해일
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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