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4일 (일) / 제 82 회

▣ 1972년 7월 4일, 박정희와 김일성

32년 전 발표된 7·4남북공동성명은 그 후 남북 대화의 이정표가 되
었다.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조국 통일 3대 원칙은 6·15선언
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냉엄한 남북대결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 선언은 곧 통일이라도 될 듯한 기대로 온 국민을 들뜨게 했다. 

그러나 약 1년 만에 대화는 중단됐고 체제 경쟁이 더욱 심화됐다. 
남과 북이 대화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국내외의 요인은 무엇이었
는가? 남과 북의 정권은 체제 유지를 위해 이 선언을 어떻게 활용
하였는가? 당시 회담에 참여했던 당사자들과 북측 인사들의 증언
으로 이 회담의 비화를 알아보고, 최근 기밀 해제된 NARA 문서를 
통해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과 해결 양상을 살펴본다. 

* 미국이 남북대화를 유도했다 - 기밀 해제된 미국 문서로 밝
혀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
부장은 ''상부의 뜻을 받들어'' 남북공동성명에 사인한다. 온 국민
이 놀라워했던 남북의 만남과 대화는 과연 남과 북 두 지도자의 자
주적 결단이었나?

70년대 초, 닉슨 독트린과 더불어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으로 세
계는 데탕트를 맞이했다. 남한과 북한 역시 이러한 국제 정세에 대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후 최초의 남북 대화는 시작되었
다. 

미국은 이 대화의 전 과정을 알고 있었고 초기에는 대화에 나서지 
않으려던 박정희 정권에 대화를 권유하기도 했다. 69년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는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에게 ''북한과 대화''할 것을 
권고하지만 남한 정부는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미군의 추가 철
수를 막을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남한 정
부는 대화에 나선다.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찾은 비밀문서들은 당시 미국이 한반도
의 긴장 완화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미
국의 한반도 정책은 현상 유지, 즉 분단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통일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포터의 메모). 또한 미
국이 종용한 남북 대화는 "전적으로 한국인들의 쇼가 되어야 한
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주한 미 대사 포터는 72년 9월 "남북 대화는 미국의 대한 정책의 성
공적인 결과물이다"(Subject-Numeric Files 1970-1973 Pol Kir N-
Kor S)라는 내용의 전문을 미국무부에 보냈다. 

한반도의 현상 유지-안정화 정책으로 드러난 미국의 개입에 대해
서는 최근 비밀 해제된 미국문서들과 이를 토대로 한 홍석률 교수
의 논문과 증언, 그리고 73년 주한 미 대사였던 클리블랜드 등 미 
정부 관련자들의 증언 등으로 추적한다.

* 미 7사단 철군을 둘러싼 박정희와 닉슨의 갈등과 암투
최근 이라크 파병과 GPR에 따른 주한 미군 철수는 30여 년 전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
을 안겨주고 있다. 

69년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들의 힘으로'' 라는 슬로건의 닉슨 
독트린은 주한 미군 2만 명 철수라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로 인
해 ''데탕트의 한국화''에 크게 반발했던 박정희는 자주 국방 실현
을 위해 중화학 공업 육성에 적극 나서기 시작한다. 

주한 미군 철수를 반대하면서 국군 현대화 등 반대급부를 얻으려 
했던,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핵심 요인들의 증언으로 닉슨과 박정희 
정권의 갈등과 대응을 좇아본다.

* 김일성이 왜 남북대화에 나섰는지 당시 북한의 내부사정을 
소상히 밝힌다.
초기에는 박정희보다 남북 대화에 더욱 적극적이었던 김일성. 그
는 왜 남북 대화에 나섰는가? 놀라운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을 자
랑했던 북한은 60년대 말부터 국방 경제 병진 정책이 난관에 봉착
한다. 김일성은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를 이용, 남한과의 관계 개
선을 통해 군비 부담을 덜고, 나아가 남한 내의 반미 여론과 주한
미군 철수까지 이끌어내기를 기대하였다.

남한의 유신체제와 동시에 북한의 김정일 후계 체제가 공고화되
는 것은 남북한 모두가 내부 체제 정비를 위한 시간 벌기용으로 남
북 대화를 이용했다는 의문도 제기된다. 서구인으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인터뷰한 당시 워싱턴 포스트 기자 샐리
그 해리슨, 중앙 정보부 공산북한과장과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강
인덕, 그들의 육성과 실증적 데이터로 당시의 북한에 대해 알아본
다.

* TV 최초 공개, 남북 대화의 핵심 요인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
부장 증언 녹취록
청산가리를 품고 ''비장한 각오''로 김일성을 만났던 전 중앙정보부
장 이후락. 극비리에 진행된 방북의 전모와 남북 대화의 핵심 열쇠
를 쥐고 있는 그는 박정희 대통령 사후 오랫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완전히 끊고 살아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측근이었던 이후락 부장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
을까? 새벽에 김일성과 단독으로 만난 그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
을까? 김일성과 북한에게 ''민족의 영웅''에서 ''깡패''로 불리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취재진은 이후락 전 부장을 만나기 위해 그가 자주 들른다는 울산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주민들은 최근 그를 보지 못했다며 말도 
잘 못한다는 소식들을 전해주고, 그가 한때 취미 생활로 삼았던 광
주의 도예소는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하남 자택을 찾았지
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건강 악화로 이제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는 이야기만 전해들었다. 하지만 취재진은 남북 대화에 관한 
180분 분량의 증언 녹취를 발굴해 TV 최초로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