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4일 (일) / 제 78 회

▣ 79년 10월, 김재규는 왜 쏘았는가

올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25주년. 박정희 전대통령과 동향 출
신이고 군대동기(육사 2기)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보안
사령관(68-71년), 중앙 정보부 차장(74년) 건설부장관(75-76년), 
중앙정보부장(76-79년)을 역임한 김재규는 ''고향 형''처럼 절친한 
박정희 대통령을 왜 쏘았는가?  이제 10.26에 얽힌 이면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 궁정동의 ''유일한 생존자'' , 김계원 전 비서실장 10.26을 말
한다!
10.26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 비서실장이 오랜 침묵 끝
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10.26 만찬에 참석, 김재규의 총격과 대통
령의 최후를 목격했던 비운의 비서실장 김계원. 김계원에 따르면, 
10.26은 이후 계엄 하 합동수사본부에서 발표한 것과 같이 김재규
가 집권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다분히 우발적
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김 실장의 목격으로는 그 날  "유독 박대통
령이 차지철의 말에 역성을 들고, 화제를 바꾸면 또 차지철이 김재
규를 공격" 하는 분위기가 반복되면서 김재규는 점점 말이 없어졌
고 두 세 차례 왕래하다가 갑자기 총을 쐈다고 한다.
10.26을 김재규의 충동적인 오판으로 보는 김계원은 "계획이 있었
다면 왜 권총을 50m나 떨어진 별관에 두었겠느냐"며 반문한다. 김
계원은 대통령에게 총을 쏘던 순간 김재규의 얼굴은 ''인간이 아닌 
귀신''처럼 변해 있었다고 전한다.
김재규의 거사가 계획적이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증언자에 의
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10.26 당일 김재규와 정승화 육군참모 총장
이 탄 차를 육본으로 몰았던 운전기사 유석문의 최초 증언을 통
해, 10.26에 얽힌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그 날 차에서 북
의 도발을 염려하는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과 김재규의 대화를 들
은 중정 전속부관 박흥주 대령이  "그럼 육군본부가 낫지 않습니
까"라고 즉흥적으로 제안했다고 전한다. 박흥주 대령의 제안 한 마
디로 남산 중앙 정보부 쪽으로 이미 진입했던 차를 돌려 육군본부
로 향했고 이후 역사는 바뀌었다. 이는 김재규가 거사 후 어떤 조
치를 취할지 목적지조차 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단서이며, 그만
큼 ''김재규의 거사''는 치밀하게 준비돼 있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10.26 현장 생존자들의 증언 이외에도 김재규의 최 측근이
었던 김학호 중정 감찰실장, 윤일균 중정 해외담당 차장은 한결같
이 ''10.26은 계획 거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만약 계획적인 거
사였다면 아마도 ''내게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협의는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그들은 전했다. 
  
▶파국에 몰린 79년!  김재규는 무엇을 고민했나?
1979년은 18년 이어진 박정희 유신 체제 내에서 국내외적으로 첨
예한 갈등이 부딪히는 파국의 시기였다. 특히 미국은 박정희 대통
령의 장기집권과 인권 탄압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강압적
인 유신 체제를 완화하고 인권 개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창구 
중 미국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미국 관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재규는 ''부도덕한'' 박정희 정권
에 몇 안 되는 민주주의에 관심 있는 ''특이한 중정 부장(a unique 
chief)''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10.26을 일으키기 직전 김재규는 
미국 측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던 것일까? 
최근에 공개된 미 CIA 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79년 초 ''박 대
통령의 권력 승계 위기'' 문제를 거론하고 있고, 다른 미 국무부 문
서에는 10.26 한달 전인 79년 9월 26일 김재규와 주한 미 대사 글라
이스틴이 만나 ''권력승계 문제''를 논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26 이후 한 달 뒤에 작성된 이 문서에서 글라이스틴은 ''김재규
가 나와 내 전임대사가 박정희에 대항하라고 부추겼다고 주장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리고 글라이스틴은 작고하기 전 99년 
인터뷰에서 ''미국은 10.26에 의도하지 않게 연루됐다''는 의미심장
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최근 공개된 미 국무부, CIA 문서를 통해 김재규가 거사 전에 ''최
소한 박대통령의 제거를 미국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 본다.

▶김재규가 바란 것은 ''민주화합·국민화합''이었다!
김재규는 왜 형제 같이 지내왔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쏘았는
가? 김재규는 육군 형무소에서 자필로 쓴 옥중 수양록에서 국가 권
력 2인자인 중앙 정보부장으로서 ''양심과 직책의 틈바구니에서 고
민했다''고 밝히고 있다. 
10.26 열흘 전인 10월 16일에는 일반 시민이 대거 참여한 부마시위
가 발생했고 김재규는 부산으로 내려가 현장을 목격했다. 당시 중
앙 정보부 감찰실장 김학호는 ''김재규가 부마항쟁의 원인 보고에
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주요 원인''으로 보고했다고 증언
한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파악한 부마시위는 국민들이 자발적
으로 참여한 체제 전반에 대한 민란 수준의 저항이었으며 이는 차
지철로 대변되는 강경파와 대립하는 ''온건파'' 김재규의 위치를 보
여준다. 
 
▶丈夫決心七年成, 10.26은 7년만에 이룬 거사였다! 
김재규는 80년 2월 육군 형무소에서 ''丈夫決心七年成''(장부결심 
칠년성)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가 7년 동안 생각했던 결심은 무엇
이었을까?
70년대 초반 김재규 당시 3군단장이 민주화 운동 인사인 장준하 선
생과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프로그램에
서 김수환 추기경은 74년, 민청학련 사건 배후로 지학순 주교가 구
속되자 김재규 당시 중앙 정보부 차장이 찾아와 추기경에게  "박정
희 대통령을 ''환자''에 비유"했던 정황을 증언했다. 당시 유신 정권
의 대변인이라 생각했던 김재규가 ''대통령을 환자''에 비유해 추기
경은 몹시 놀랐고, 김재규는 ''병든 환자에게는 굳은 음식 대신 연
한 음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의 만
남을 주선했다. 
74-5년 이후 김재규 당시 중앙 정보부 차장은 시국 사건이 있을 때
마다 김수환 추기경과 교류했다. 30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의 입을 
통해 최초로 밝혀지는 김재규의 고민과 제안. 김재규는 김수환 추
기경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제 3의 안''을 만들자고 권고했다
는데, 과연 김재규가 생각한 제 3의 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