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4월 14일 (일) / 제 56 회
            
  '' 73인의 외침''-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기획의도
	  
  지난 2월18일, 한총련 대학생들이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며 미 상공
회의소를 점거한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에 대한 반미 감
정이 거세지는 가운데 부시방한의 큰 목적 중 하나가 무기판매라는 것을 그들은 국
민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 
  17년 전, 1985년 5월 23일, 서울 5개 대학생 73명이 미문화원을 점거 농성하는 사건
이 일어났다.73명의 72시간의 점거는 혈맹으로만 알았던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서라면 독재정권의 살인만행에도 눈감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
던 것이다

  1985년 전국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상규명 문제로 학생운동의 움직임이 일어나
고 있었다. 2.12총선 승리의 여파로 그 어느때보다도 광주민중항쟁의 문제가 강도 높
게 재기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85년 5월23일, 서울시내 5개 대학생 73명이 미문화원
을 점거했다.
학생들은 그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광주 민중항쟁의 진상 규명
과 전두환 군부독재에 대한 미국 지원 철회를 주장했다. 미국측의 입장과 한국학생
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다가 결국 점거 72시간만에 끝나게 됐다.
남북적십자회담(85년 5월27일), 미국과의 견해 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이유로 자진해
산 됐지만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미국이 광주학살과 관련
되었다는 사실이공개적으로 드러나고 거론되기 시작한 중심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17년이 흐른 지금,당시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했던 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
건을 돌아보고 80년대 군부 독재의 암울한 시기에 일어났던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
의 의미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의 주역, 그들의 증언!

1985년 5월 14일, 연대 전학련 3차 결성식에서 <광주사태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각 대학
팀원과 농성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파급효과와 명분면에서 미대사관이 적절하지만 
점거성공여부가 불확실한 이유로 미 문화원을 점거하기로 결정,그 과정속에 이들은 
놀라운 정보력 및 보안유지로 새삼 관심을 모았다.
 점거 첫날, 그들은 ''광주사태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과하'', ''국정조사권 발동하
라''는 유인물 을 붙이고 미국대사와의 면담과 내외신 기자와의 회견을 주장했다.
당시 미국을 혈맹국이자 우방국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그들의 점거 시위는 해방 
이후, 첫 도전이자 시위였고, 아무것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측과 학교 관
계자, 미정부측은 대책마련조차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광주 사태 진상규명과 미대사와의 협상이 결렬된 채 72시간 5차례에 걸친 면담은 남
북적십자 회담을 앞두고 막을 내린다. 그러나 미문화원 점거 투쟁은 미국의 광주학
살 개입이라는 문제의 핵심고리를 강타함으로써 반미의식을 확산시키는 이정표가 
되었고 광주학살의 진실을 세상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
다
 
▶사건 후,17년만에 공개하는 미국정부측의 숨겨진 일화

미문화원 사건은 그들에게 하나의 도전이자 충격이었다.
당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책방법 조차 찾기 힘들었던 미국은 평화적이고 민
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였는데...정부측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들
은 왜 끝까지 경찰투입을 거부했던 것일까? 그리고 워커 미대사는 72시간에 걸친 학
생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면담을 거부했는지 17년간 공개되지 않았던 그 이면의 이
야기를 처음 공개한다

▶전두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