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10일 (일) / 제 52 회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2002년 2월 28일 <친일반민족 행위자 명단> 발표 !
그 속에 노덕술이 있다 !
지난 2월 28일,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
단''을 발표했다. 이로써 19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53년만에 친일파 문제를 공론화
시킨 것이다.
미군정 하에서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놓쳤지만, 1948년 온 국민의 열망과 관심 속에
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친일파를 척결
하고 민족정기를 수립할 수 있다는 기대가 가득했다. 그러나 1949년 6월 6일, ''특위
습격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사실상 와해되었고 일제 청산의 과제는 해결되
지 못하고 말았다.
이미 지난해 ''반민특위 - 승자와 패자''를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친일파 문제를 천착
해 온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는 2002년 3월 10일(일요일) 밤 11시 25분, 53년만
에 사라졌던 ''역사의 법정''을 연다.
반민특위에 의해 전격 체포되었던 친일경찰 노덕술. 그는 ''일경(日警)의 호랑이''로
악명이 높았으나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으로 중용되었으며, 이후 1948년 10
월 ''반민특위 위원 암살 사건'' 모의를 주도하는 등의 악행을 계속했다. 이렇게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던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승만 정권의 비
호를 받으면서 전봉덕, 이익흥 등의 친일경찰 세력들과 함께 독재정권의 핵심 역할
을 했다. 2002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에서는
대표적인 친일경찰 노덕술을 통해 이 시대 친일파 청산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
형''인 이유를 찾아본다.
일경(日警)의 호랑이, 고문 경찰 노덕술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 “박처원, 이근안으로 이어지는 한국대공경찰의 맥은 노덕술로부터 시작된다”
1947년 1월 수도청장 장택상을 저격했던 한 청년의 시체가 한강 얼음 구멍에 버려졌
다. 그 후 몇 달 뒤 본명 박성근, 일명 임 화라 불렸던 이 청년을 고문한 끝에 죽게
한 경찰이 검거되었다. 일명 ''임 화 고문치사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장본인은
바로 수도청 수사과장인 노덕술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문에 의해 죽은 사람은 비단
박성근(임 화)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해방 전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고문해서 죽게
한 일제 시대 고문경찰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당시 일제 경찰 경시를 지낸 8인 중의 한 명!
이병창(반민특위 특경대장)
- “수도청에서 비호했으니 잡는데 석 달이나 걸렸지”
1899년 울산 장생포에서 출생한 노덕술은 일제 치하에서 경시까지 오른 몇 명 안되
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이다. 일본인 상점의 급사로 출발. 경남 순사 견습소를 나와 말
단 경찰 생활을 시작한 노덕술. 보통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력에 집안도 그리 좋지
못했던 그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일제 시대, 동래고보 독립 시위 사건, 흑조회 김규직 고문치사 사건, 통영 M.L당 김
재학 고문 사건 등에서 독립운동가를 3명이나 고문해서 죽였던 노덕술.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경험자''가 필요하다는 미군정에 의해 ''수사 기술자''로, 수도청 수사과장
으로 중용되었다. 그리고 이후 반민특위 제3조 -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
한 자-에 해당되어 검거되었지만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사건 이후, 노덕술
은 보석으로 출감했고 그 이후 이승만 정권의 비호 속에서 헌병대로 피신했다. 그에
대한 반민 재판은 종결되지 못했으며, 어떠한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일제를 위한 반공에서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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