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4월 27일 (일) / 제 29 회

보도연맹 l - 잊혀진 대학살

        "1949년 6월, 대한민국 정부는 
         ''좌익인사''들을 전향시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전쟁 초기, 30만 연맹원 대다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 
         하지만 지난 50년, 그들의 죽음을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1. 전설과 역사 사이에서 
  2001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편 ''보도연맹Ⅰ - 잊혀진 대학살''
은 이 자막으로 시작했다. 기억조차 힘든 50년 전, 조금만 더 있으면 
아예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소재였다. 
  
 잊혀진 과거를 무엇 때문에 파헤치냐는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답변은 간단하다. 이 엄청난 학살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 반성 없이 부와 권력을 누려온 
반면 피해자들은 연좌제로 억눌리고 레드 콤플렉스로 가위눌린 채 50년 
을 살아왔다. 요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위선과 기회주의 
가 판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같은 중대한 사건에 대 
해 진상규명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기를 주저해 왔기 때문이다. 

  보도연맹은 1949년 오제도, 선우종원 등 이른바 반공검사들이 주도하
여 만든 단체로, 좌익인사들을 전향, 교화시켜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 
으로 포섭한다는 취지였다. 당시는 제주4·3과 여순사건을 무력으로 진 
압한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무자비한 숙군 총살을 다그 
치는 등 좌익에 대한 뿌리뽑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군 철수를 앞두고 
38선에서는 이미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위기감에 사로 
잡힌 이승만 정부는 최대의 정적 김구를 살해하고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등 권력 기반을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도연맹은 이러한 시기에 창설됐다. 대한민국 절대지지, 북괴정권 
절대반대, 공산주의 타도분쇄 등 강령에서 알 수 있듯, 보도연맹은 이른 
바 ''좌익전력자''들을 묶어서 만든 반공의 행동부대였다. 그러나 ''좌익''은 
이미 대부분 처형됐거나 월북한 뒤였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대 
부분 시골의 농민과 서울의 문화예술인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터 
지자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모두 검속하 
여 총살했다. 오제도, 선우종원의 증언에 따르면 6.25 직전의 가입자 수 
가 33만 5천명. 증언과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들 중 최소한 2/3에 해당
하는 20만명이 학살됐으리라는 추론이다. 

  2. 살아서 말하라
  기획 단계에서 이미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됐다. 학살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났으니 취재 범위도 전국으로 잡아야 했다. 게다가 ''보도연맹 
원 = 빨갱이''라는 등식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기 때문에 피해 유족들조차 
입 열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예상됐다.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른다''로 일관하거나 인터뷰 자체를 기피할 게 뻔했다. 게다가 
당시 군과 경찰의 명령 계통을 확인해 줄 수 있는 문서를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피해 유족들의 증언에서 시작했다. 그들의 진술은 
어릴 적에 어른한테 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하지 않거나 감정적으로 과장
된 측면이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의견''이 아니라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