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고 싶었다 - 남편 살해 여성의 고백
2006년 2월 24일. 서울, 천안, 그리고 마산에서는 같은 혐의의 재판이 동시에 열렸
다. 사건의 피고인들은 모두 여자였으며, 심각한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고, ‘남편
을 살해’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왜 남편을 살해했을까.
28일(화) 방송되는「PD수첩」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남편 살해 아내 사건들을 추적
해 사건 전후의 맥락을 짚어보고, 임상 심리학자를 통해 살인자가 된 아내와 남은 아
이들의 심리를 검사해본다. 그리고 대다수 남편 살해 아내들이 겪어온 ''''매 맞는 아
내 증후군(Battered Woman syndrome)''''이 양형에 법적 기준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의 옥중 인터뷰
“진짜 억울해요. 피해는 내가 다 당하면서 내가 어떻게 가해자가 돼가지고....”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다던가... 하는 것을 제가 차단시켜줬다는 거, 그게 위안이
라면 위안일까요....”
남편을 죽인 죄로 복역중인 여성들의 회한이다.
국내 유일의 여자 교도소인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된 여성의 절반은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살인자의 절반은 바로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이다. 법무부 의
뢰로 충북대 김영희 교수팀이 지난해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청주여자교도소 수형
자 43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성 살인범의 특성, 범죄이유, 그리고 재활가능
성''''에
따르면, 남편 혹은 애인 살인죄로 수감 중인 249명 가운데 82.9%가 남성에게 학대받
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취재진은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 중인 남편 살해
재소자 세 명을 어렵게 만났다. 하나같이 극심한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던 이들
은 자신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눈물로 사죄했지만, 남편과의 1년보다
교도소 안에서의 10년을 택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사는 게 아니라 버티는 것이었다
는, 죽고 싶다는 심정조차 사치라고 말하는 재소자들 -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생생한 증언을 국내 언론 최초로 공개한다.
▶ 창살 없는 감옥 속의 아내들, 탈출구는 없다!
현재 경기도 시흥의 작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A씨는 뇌출혈로 입원 중이다. 원인은
‘남편으로 인한 구타’. 평소 남편은 상상을 초월한 구타 외에도 실탄을 넣은 총을 겨
누며 죽이겠다고 아내를 위협해 왔다고 한다. 취재진을 만난 후에도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호소하던 A씨는 인터뷰 도중 코피를 쏟더니 급기야 신경정신과 진료 후에는
실신하고 말았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교수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여
성들을 ‘테러리스트에 잡힌 인질’에 비유했다. 98년 발효된 가정폭력방지법이 무색
할 정도로, 대다수 가정 폭력은 단순한 학대와 폭언 수준을 뛰어넘어 아내와 자식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치달아 있다. 도망도 갈 수 없는,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
속에 노출된 사람들. 남편이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에 잡혀 있는 아내들은 오늘도
‘죽음’이라는 공포와 싸우고 있다. ‘남편에게 맞아 죽거나 혹은 남편을 죽이거나’의
생존 게임. 이미 그 속에 ‘가정’은 없다.
▶ 반복되는 폭력의 늪, ‘매 맞는 아내 증후군(Battered Woman Syndrome)’
A씨는 남편의 폭력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바로, 폭력 후 약을 사와서 아프냐고 물으
며 치료하는 남편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가정폭력은 남편의 ‘강도 높은
욕설-심한 학대-구타 중지와 화해’라는 악순환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아내들은 언젠
가 남편이 좋은 사람이 될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이 과정을 반복하다가 자포
자기적 행동을 보이며 학습된 무기력감을 느끼게 되는데, 전문가들은 이들이 느끼
는 공포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실제 ‘매 맞는 아
내 증후군’은 심리학자들 사이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하위 개념으로 동일시되
어 사용되고 있음.) 이에 취재진은 장기간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남편을 피해 쉼터
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내 다섯 명의 뇌를 특수 MRI로 촬영해 봤다. 이들의 뇌 신경망
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살아남은 후 ‘외상 후 스트레
스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뇌 신경망과 비교해 본다.
▶ 폭력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
2004년 어머니와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이른바 ‘패륜 모자’이라 일컬어지며 세간
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작년 12월 고등법원 판결에서 ‘매 맞
는 아내/아이 증후군’을 인정받았다. 취재진이 만난 30대의 아들은 어린 시절 아버지
가 장롱 앞에 세워 놓고 칼을 던진 기억을 여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30년 간 아
버지로부터 학대받은 아들은 아버지가 또다시 어머니를 폭행해 기절시키자 결국 아
버지를 살해하는 것으로 ‘공포’를 제거했다. 극한의 자극이 주어질 때 자살 또는 타살
의 충동이 발생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증상이 나타난 전형적 사례인 것이
다. 가정폭력으로 인한 심리적 공황은 아내를 넘어서 자식에게까지 이어져 비극의
고리를 이어가고 있다.
취재진은 평소 온가족에게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어머니가 살해한 가정의 아이를
만나 임상 심리학자에게 정신분석을 의뢰했다. 이제 막 중학교 3학년이 되는 아이의
자살 관념 척도는 89%. 매 맞는 아이 증후군 점수는 38점(20점 이하가 정상)으로 ‘매
우 심각함’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버지는 악마였다, 천벌을 받은 거다”라고 웃으
며 말하는 아이. 아이에게 공포는 사라졌지만 수감된 엄마, 수년 동안 이어졌던 아버
지의 학대,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남겨진 아이에게 ‘외상 후 스트
레스 장애’라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골만을 남겼다.
▶ 미국, 매 맞는 아내의 정당방위를 인정하다
국내에서는 장기간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던 아내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하더라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매 맞는 아내 증후군(BWS)’이 법적으로 인정되고 있지
는 않다. 판사의 작량감경의 사유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이 또한 판사의 재량과 자비심
에 의한 것일 뿐 매 맞는 아내에 대한 재판부의 이해는 여전히 약한 실정이다. 이에
반해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의 판결과정에서 ‘매 맞는 아
내 증후군(BWS)’이 증거로 채택, 무죄 또는 감형의 사유로 인정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이러한 법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재심사가 실시되고 있다.
본 프로그램에서는 국내의 남편 살해 여성들이 재난에 의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보다도 심각한 수준의 심리적 장애 상태임을 밝히고, 따라서 이들을 단죄함에 있어
‘매 맞는 아내 증후군(BWS)’이 법적인 판단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
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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