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표...설기현..그리고 아드보카트 ② 설기현 편

민병호 기자 fairplay@mbc.co.kr

2. 벌써 애가 둘이나 된 순박한 청년 설기현

기자들은 가끔 선수들에 대해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응, 나 걔랑 친해..내가 잘 알지..”...전 아직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선수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맘을 열고 지내는 선수가 있다면 설기현 선수입니다. 뭐 친하게 된지는 얼마 안됐지만요...

3년전인가....설기현 선수가 벨기에에 있을 때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지금 첫째아이 인웅이가 6개월인가 됐었는데... 그때 생후 9개월용으로 옷을 사갔었는데 애 머리가 들어가지 않아서 조금은 곤혹스러웠던 기억도 납니다^^...암튼 이번엔 잉글랜드 울버햄튼에 새롭게 자리잡은 설기현 선수 집을 찾았습니다. 첫째 인웅이는 이제 훌쩍 커버렸고 둘째는 태어난지 3주도 안된 너무 예쁜 모습이더군요...아직 미혼인 저로서는 상당히 부러웠습니다만..어쨌든 울버햄튼에 한국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다니..조금은 외로웠던 설기현 선수 집이 간만에 북적거렸습니다.

영국의 최남단 브라이튼 원정경기에 나섰던 지난 1일...외의로 설기현 선수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가기 전에도 몇 번 통화했지만 최근 팀의 전술 변화로 선발보다는 교체 출장이 잦았기 때문에..또 아드보카트 감독이 지켜보러 왔는데도 후반 막판에 투입됐기 때문에....팀도 약체와 1-1로 비겼기 때문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경기가 끝나고 나서 설기현 선수는 웃음을 머금은 모습으로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습니다...몇분동안 얘기를 나눴습니다. 오른쪽 공격수가 편하다는 약간의 깜짝 발언과 함께(뭐 이런 얘기들도 뉴스에 나왔으니까 생략하구요)..그리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습니다...“형, 내일 몇시에 올거에요?”

많은 분들도 아시겠지만 설기현 선수는 자수성가형 유럽파 선수입니다. 지난 2000년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벨기에로 건너가서 고생도 많이 했죠. 앤트워프를 거쳐 안더레흐트에서 주목할 만한 활약을 펼쳐구요. 거기서 챔피언스리그 무대도 밟아봤죠. 그리고 지난해 울버햄튼으로 이적했습니다. 울버햄튼이 얼마전 까지만 해도 프리미어리그에 있던 팀이라 1부리그 승격도 조만간 무난해보였기 때문에 아마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는 설기현이 될거라는 예측도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럽게 박지성과 이영표의 프리미어리그 진출이 성사되면서 그 꿈은 버려야했습니다. 뭐 박지성.이영표 두 선수도 맘고생이 많았겠지만 그래도 둘은 함께 있으면서 서로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현역선수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설기현은 정말 외로운 싸움들을 해왔다고 할 수 있죠...그래도 만나면 불평 한마디가 없습니다. 그냥 순박한 웃음뿐...

조심스레 이런 얘기들을 털어놨습니다. “이젠 팀만 보고는 못 갈 것 같아요..”...이 얘기는 자신의 꿈도 중요하지만 부인이나 아이들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전에 벨기에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울버햄튼도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도 거의 없고 한국 식품점이나 음식점도 멀리 있기 때문에 가족들은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런던 근처에 있는 팀들이 인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설기현 선수가 울버햄튼과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계약기간도 많이 남았으니까요...일단 팀을 1부리그에 올려놓는 게 첫 번째 목표...그리고 두 번째는 아마도 가족들도 행복할 수 있는 곳을 연고지로 가진 팀으로 옮기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죠...

설기현 선수의 첫째 아이 인웅이는 아빠 경기를 보러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좀 웃깁니다....울버햄튼의 마스코트가 팀 이름처럼 늑대인데요...인웅이가 아빠 경기를 보러 경기장에 갔다가 늑대 인형 옷을 입은 마스코트를 만났다지 뭡니까...근데 너무 무서워서 울고 질겁을 하고 말았답니다...그래서 경기장에는 못간다네요...설기현 선수도 마찬가집니다...지난 번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식사를 할 기회가 한번 있었습니다...그래서 메뉴를 정하다가 ‘회나 먹을까?’ 했더니 이젠 더 이상 회를 안 먹는답니다. 이유인 즉슨..전날 친구들과 회를 먹고 나오는데 횟집 어항에 있는 물고기들의 눈이 너무 슬퍼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이젠 회를 못 먹겠다는..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충격적인(?) 얘기를...아마도 인웅이가 아빠를 닮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든 선수에게 그렇겠지만 설기현 선수에게는 오는 월드컵이 중요합니다.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느냐 아니면 지금에 만족하느냐가 달려있는 중요한 무대이기 때문이죠. 요즘 매일 잘 때마다 대표팀에 가서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이번에 현지에 가서 직접 지켜본 설기현 선수는 확실히 다른 선수들과 구분 될 만큼 좋은 플레이를 보여줬습니다. 국내 팬들은 작고 빠른 윙을 선호하지만..아니 익숙하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설기현 선수가 볼을 좀 끈다는 비판도 있지만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는 그런 플레이가 더 위력적입니다. 또 설기현 선수도 생각보다(?) 무척 빠릅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좀 더 부담스럽습니다. 팬들은 설기현 선수에게 더 높은 기대를 하고 있고 본인도 항상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가끔씩 “미쳤다”고 표현할 정도로 한경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는 깜짝 스타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실력을 매경기 보여주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진정한 프로라고..실력 있는 선수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설기현 선수도 그런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헤어지면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유럽에 오고 싶어 하는 선수들 많은 거 알아요.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이 얘기는 해주고 싶어요. 꿈과 목표는 높고 크게 잡되 서두르지는 말라고...어디에서 시작하든 꾸준히 실력있는 모습 모여주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으니까요....”

조금 전 전화가 왔습니다. 설기현 선수..금방 귀국했다는군요..제가 농담으로 그랬습니다. “야 내가 갔을 때 골을 넣어야지..사람들한테 네 골 장면도 보여주고 그러지..나 떠난 다음에 넣으면 어떡하냐?ㅋㅋ” 그러자 설기현 선수도 “그래도 형 왔다가니까 잘 되네.. 그니까 내가 더 있으라니까...” 전화기 건너 들려오는 목소리는 참 밝았습니다. 어머님 건강도 안 좋으셔서 맘고생도 심했었는데... 이번 평가전에서 얼마만큼의 기회가 주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줄 거라는 믿음이 들었습니다.....제가 아는 설기현 선수는 프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