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소관八字所關이란 말이 있다. 풀이하면, ‘타고난 운수로 인하여 운명적으로 겪는 일’을 말한다. 요즘의 N포 세대들은 ‘금수저’, ‘흙수저’란 용어를 써가며 자조적으로 자신의 팔자를 구분 짓기도 한다. 나의 어머니도 곧 잘 당신의 신세 한탄을 ‘팔자’에 빗대어 말씀하시곤 한다. 그럴 때 나는 오히려 그 팔자를 세련되게 포장한 영국 소설가, 찰스 리드의 말을 떠올린다. 생각은 곧 말이 되고, 말은 곧 행동이 되며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격이 되어 결국 운명이 된다. 운명... 하지만 이러한 세련된 포장지로도 통용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2016년 5월 17일.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23세, 꽃다운 나이의 사회 초년생이 무참히 살해됐다. 체포된 직후 범인은 이렇게 진술했다. “여성들로부터 무시를 당해서 범행을 저질렀으며, 피해자와는 모르는 사이”라고. 다음 해인 2017년 3월 29일엔 과연 그들이 낙원여인숙을 찾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여덟 살 난 어린 여자아이가 10대 소녀에 의해 유괴, 살해됐으며 시신까지 훼손당했다. 범행 직전 범인과 공범이 나눈 SNS상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 사냥 나간다.”라고. 이 무서운 인연을 우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이 피해자들에게 ‘팔자소관’이란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이들의 죽음을 단순히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의 중심엔 죽음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믿는 태평이 있다. 그는 ‘죽음 직전의 순간을 보는 신비한 능력’을 타고 났다. 하지만 유일하게 죽음이 보이지 않는 준영을 만나게 되면서 태평은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살인이 의도된 죽음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못난 인간의 선택에 의해 비롯되며 그 운명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그것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살인마에게 살해될 운명을 타고 날 리 없듯이 살인자의 운명을 타고난 이도 없다. 다만 그의 불행한 환경이 그를 잠식시켰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나쁜 상황에 처하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지혜롭던 사람도 불행한 환경에 놓이면 좌절하듯이 모든 인간은 실수를 범한다.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가 그의 저서 <이웃집 살인마>에서 서술했듯이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 칼을 들지 않아도 사람의 세치 혀가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고, 행동 혹은 무관심이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어 놓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도하건, 의도치 않던 간에 상황에 따라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도 모를 ‘괴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 괴물을 쫓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이며, 또한 한 인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빚어진 비극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그 참극을 미리 볼 수 있다면,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뒤바뀔까? 부모세대 때부터 이어진 악연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까? 나에게 다가오는 고통은 선택할 수 없지만, 고통을 어떻게 대응할지는 선택할 수 있다. 설령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만회할 기회는 언제나 있다. 당신이 그 기회를 볼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