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이때 공민왕은 과거에 원나라와 맺었던 것과 같은 종속적인 관계를 재현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민왕은 과거에 중국이나 북방의 유목국가들과 그랬던 것처럼 명나라와 의례적인 사대관계를 정립하려 했다. 동시에 왕은 국가의 실리를 얻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했다. 우선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간 틈을 타서 18년 12월과 19년 8월에 동녕부(東寧府)
정벌을 단행함으로써 북방의 우환을 제거하는 동시에 영토 확장을 꾀하였다.

그런데 명나라는 과거에 원나라처럼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기를 원하였다. 예를 들면 왜구에 대한 고려의 대비책이 미흡하다거나 고려 정치 이념이 잘못되었으니 불교 대신 유교를 숭상하라거나 왕궁을 제대로 지으라는 등 근본적인 데부터 시작하여 시시콜콜한 데에 이르기까지 간섭하고 공민왕을 질책하였다.

대외관계가 이처럼 급격히 변화하였고, 변화한 상황이 고려의 애초 의도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면서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왕은 신돈 집권기와는 달리 고려의
실리를 확보하는 동시에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지닌 인물을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최영이나 경천흥 등 무장들의 필요성을 다시 인식하였다. 이들은 왕권을 지켜내는데
절실한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왕위를 안정적으로 지켜가기 위해서는 관료들의 적극적 지지가 필요하였는데, 이 관료들 중에서도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높은 관직에 올라있던 고위관료
또는 권세가들의 지지가 우선 필요하였다.

무장세력과 기득권을 가진 관료세력 또는 권세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 세력들을 억누르면서 지나치게 비대한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돈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이 시기의 왕에게 신돈은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는
존재일뿐 아니라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