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베스트 극장 - 적루몽> 촬영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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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갑니다! 조용히 하세요!” 조감독의 외침이 넓은 마당을 가르자 둥그렇게 늘어서 있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속삭임이 이어진다. “뭐 찍는 거야?” “<궁S> 아냐?” “아닌 것 같은데.”
한낮의 민속촌,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남녀라는 힌트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는 1월 27일 방송을 앞둔 MBC 베스트 극장 <적루몽>(赤樓夢)의 촬영 현장이다. 대개 단막극은 미니 시리즈 입봉을 앞둔 젊은 감독들의 몫인 경우가 많지만 <적루몽>은 <천생연분> <도로시를 찾아라> 등을 연출한 20년차 최용원 감독이 연출을 맡아 눈길을 끈다. 열흘에서 2주 사이의 빡빡한 촬영 일정과 겨울 강추위라는 난관을 뚫고 단막극에서는 흔치 않은 사극을 시도하는 것은 이 작품이 2006년 베스트 극장 극본공모 당선작 가운데서도 놓치기 아까운 대본이라서였다는 게 감독의 설명이다.
조선 중기, 가문이 역병으로 몰락해 세책방에서 책비(책 읽어주는 여종) 노릇을 하던 진영(유연지)과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사이였던 현도(정태우)는 현도가 부모의 엄명으로 양반가의 딸과 혼인한 후에도 서로를 놓지 못한다. 어느 날 책비들을 대상으로 상금 천냥이 걸린 시화 경연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진영은 글을 잘 짓는 현도와 그림을 잘 그리는 자신이 함께 출전해 상금을 받아 함께 외국으로 도망치자는 제안을 하는데 사실 이 대회를 연 노론의 거두 김찬기의 집안에는 가슴 아픈 비밀이 있다.
정태우가 여장을 한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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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에서 사랑과 현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섬섬이’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신인 유연지는 목을 훤히 드러내는 저고리에 얇은 한복 치마를 입어 볼이 빨개졌지만 데뷔작이었던 EBS <겨울아이>를 찍으며 워낙 추위에 단련되어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웃는다. 심지어 오대산에서 있었던 사흘간의 촬영도 그리 고생스럽지 않았다고 하니 보기완 달리 체력이 상당하다. 옆에 있던 댕기머리의 다른 아가씨가 입을 열자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데, 돌아보니 책비로 변장하기 위해 여장을 한 정태우다. <용의 눈물> <여인천하> <무인시대> 등 유독 사극에 자주 출연했던 배우지만 여장한 모습은 처음인 듯. 쓰개치마를 쓰고 있던 그를 보고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은 “여자 옷 입으니까 부끄러워서 다 가렸나봐”라며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린다.
“말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냐!”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이 굳은 건 스태프과 연기자들만이 아니다. 보는 눈이 많아 긴장한 탓도 있는지 대문 앞에 매여 있던 말 역시 몸이 굳어 스태프들이 워밍업을 해주고 조심스럽게 배우를 태운다. <해신>에서 중달 역을 맡았던 배우 강성필이 제법 자연스럽게 말을 타고 힘차게 달려나가지만 문제는 “컷!” 소리가 들려도 말이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 이쪽에 모인 스태프들 모두 한 목소리로 “워~워~” 하고 외치고 나서야 걸음이 멈췄다.
겨울 사극 촬영장의 가장 큰 적은 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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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촬영, 그것도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겨울 촬영에서는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바쁘기만 하다. 아흔아홉 칸 기와집 여기저기에 조명이 설치되는 동안 차례를 기다리는 배우들은 마당 한구석에 모여, 마루에 잠시 앉아 추위를 달랜다. 짚신을 벗고 휴대용 난로에 버선발을 쬐고 있는 배우도 있다. 단, <주몽> 팀에서 일했다는 한 스태프는 어지간한 사극의 고통(?)은 다 겪어보았는지 “이 정도 추위쯤이야”라며 굳센 태도를 보인다.
감독님도 못 말리는 비행기 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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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추위와 구경꾼들에 이은 제3의 어려움이 있었으니, 바로 비행기 소음. 용인에 위치한 민속촌 상공으로는 과천과 잠실 근처 서울공항을 오가는 비행기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겨우 세팅을 완료하고 큐 사인을 내리려는 순간 또 비행기 소음이 들려오자 녹음 팀의 스태프들은 “전쟁났네, 전쟁났어”라며 헤드폰을 벗어 든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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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자꾸 어두워지고, 추위는 점점 더해가는 가운데 정태우가 모두에게 돌린 따뜻한 캔음료로 현장 분위기를 북돋우며 촬영이 재개된다. 어떻게 보면 <적루몽>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진영과 현도의 이별 장면. 먼저 길 떠나는 현도를 곧 따라가겠노라며 절을 올리던 진영, 그런데 이렇게 비장한 각오로 절을 올릴 때는 어떤 절이어야 할까? 이럴 땐 연기 경력 40년이 가까워오는 중견 배우 서권순에게 묻는 것이 최고다. “서 여사님, 도와주세요!”
오전 아홉 시경 시작된 촬영은 저녁 여섯 시가 되어서야 낮 장면이 일단락되었다. 이미 어두워진 민속촌의 골목을 헤치고 촬영팀은 또 다시 밤 촬영을 위해 이동한다. 한 땀 한 땀 공들여 지은 한복처럼 60분을 공들여 쌓아 만든 단막극, 두 배우의 애틋한 눈빛이 마음을 끄는 <적루몽>이 더욱 기다려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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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지은 guilty@cine21.com
(사진) 이원우 macqueen505@cine21.com
(취재지원) 이지원 smila@cine21.com (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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