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여자들> vs <사랑과 야망>

TV는 언젠가부터 ‘나쁜 여자’들의 천국이 되었다. 바보같이 순종하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망부석 같은 여인네는 <주몽>의 부영이처럼 중도하차하는 세상이다. 결국 눈앞에서 악다구니를 내뱉거나, 조용히 복수를 준비하는, 바야흐로 나쁜 여자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TV의 주시청자층이 여성임을 감안한다면, 그런 변화는 어쩌면 철저한 고객관리에 따른 여성 판타지의 적극적인 복종일 것이다. 최근 20년 전 작품을 리메이크한 <사랑과 야망>이 뒷심을 발휘하는 가운데, <발칙한 여자들>이 가세했다. 강명석 기획위원이 남녀관계의 헤게모니를 확 뒤집어놓은 <발칙한 여자들>의 다양한 여자들을, 차우진 기자가 <사랑과 야망>이 탄생시킨 세기의 여성 캐릭터 미자를 살펴보았다.

편집자

착한 여자는 하늘나라로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로든 간다

MBC <발칙한 여자들>

 
<발칙한 여자들>의 ‘발칙녀’들은 그리 발칙하지는 않다. 자신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 전남편 정석(정웅인)에게 “뽀솨버릴 거야!”라며 복수를 다짐하는 송미주(유호정)는 유호정 그 자신이 출연했던 <청춘의 덫>부터 존재했던 캐릭터고, 남자를 휘어잡는 김은영(임지은), 사랑과 조건 사이에서 고민하는 양다림(오주은),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시어머니에겐 아이를 낳으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고상미(사강) 등은 기존 드라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다.

역전한 남녀 관계, 그 발칙한 복수극

오히려 변한 건 남자들이다. 정석(정웅인)은 전-현 부인에게 쉴 새 없이 당하기만 하는 별 볼일 없는 남자고, 송미주의 새로운 사랑은 재벌 2세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다독여줘야 할 10살 연하의 장우진(이기우)이며, 그나마 과거의 위압적인 남성과 비슷한 고상미의 남편 양지환(장동직)은 설정에 따르면 게이다. 그래서 <발칙한 여자들>의 남녀관계는 역전돼 있다. 송미주와 김은영은 걸핏하면 정석에게 큰소리를 지르며 정석을 압박하고, 장우진의 연인인 양다림(오주은)은 송미주에게 그를 뺏길 처지긴 하지만, 그 자신도 철저한 계산으로 장우진과 부유한 백억년(정준하) 사이를 오간다.

또 불륜을 했으면서도 당당한 김은영과 그런 김은영에게 화조차도 내지 못하는 조태준(최우재)의 관계는 기존 드라마에서 묘사하던 남녀의 불륜관계를 역전시킨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발칙한 여자들>의 여성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고, 죄책감도 없다. 송미주는 정석에게 미련을 두지 않고 통쾌하게 정석을 응징하고, 장우진과의 사랑 역시 이혼녀라는 사실이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고 일반적인 남녀의 사랑처럼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로 진행된다.

‘발칙한 여자들’ 때문에 ‘위기의 남자들’이 된 요즘 남자의 모습을 반영

과거에는 <청춘의 덫>의 춘희(심은하)처럼 여성들이 복수를 하면서도 스스로 상처 입어야 했다면, 송미주는 전남편에게 복수하고, 아들은 아버지 없이도 반듯하게 자랐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매력적인 연하남을 새로 얻는다. 그만큼 <발칙한 여자들>은 여성 판타지를 보다 ‘화끈하게’ 만족시키고, ‘발칙한 여자들’ 때문에 ‘위기의 남자들’이 된 요즘 남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발칙한 여자들>은 도발적이다. 남성으로 인해 인생의 변화를 겪는 여자들이란 설정은 동일하되, 그 상황에서 여성들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죄를 저지르고 권모술수를 쓴다 해도, 그들은 과거의 ‘착한 여자’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이런 여성의 발칙함은 오히려 남성들의 ‘원죄’를 씻게 만든다. 정석은 송미주에게 구박당하는 ‘약한 남자’가 돼 과거의 죄는 묻고, 아들에게 말이라도 붙여보려는 남자가 돼 동정을 산다. 그의 죄가 부성애에 묻혀 흐지부지되는 것은 여성의 입장에서는 미진한 단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남녀 관계는 쿨하게 관계 정리하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잇는 것이야말로 발칙한 여자들과 그 여자 때문에 당황하는 요즘 남자들의 절충선은 아닐까. 그래서 앞으로 <발칙한 여자들>은 좀더 발칙해질 필요가 있다. 꼭 남자들과 화해를 하거나, 진실한 사랑을 하지 않아도, 타인에게 욕을 먹는다 해도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여자. 그리고 그 선에서 정리를 할 줄 아는 남자. <발칙한 여자들>이 그 발칙함의 선에 도달할 수 있을까.

글 강명석

어른 아이, 혹은 팜프파탈의 여성 캐릭터

SBS <사랑과 야망>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욕망은 폄훼되거나 부정되어왔다. 특히 하위문화로서의 여성 문화가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경우, 작품에서 형상화된 여성은 단순히 욕망이 없거나 좌절되어 처벌받는 존재로 그려졌다. 그러나 최근의 드라마에서는 여성성이 보다 미묘하고 복잡하게, 그러니까 좀더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단순한 틀로 해석하기에는 캐릭터와 캐릭터를 움직이게 하는 욕망의 내러티브가 보다 정교해지고 복잡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거대한 욕망의 집합체 미자

그런 점에서 20여년 만에 리메이크된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의 미자는 조금 특별하다. 김수현의 작품들이 사실은 가족주의를 수호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무색케할 만큼 1987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얻은 <사랑과 야망>은 기이한 여성 ‘미자’(차화연/한고은)를 내세워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개발독재 시대의 낭만주의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자는 거대한 욕망의 집합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한 집착이 강한 만큼 사람들을 괴롭히지만 동시에 그들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가진 인물이다. 다시 말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한 간판 없이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성공하는 미자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바로 질투심과 두려움이다. 이런 그녀의 라이벌 의식과 공포심이 오롯이 작동하는 지점은 운명적인 연인인 태준(남성훈/조민기)과 교차되는 평생의 관계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반복하지만,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필생의 라이벌이자 샴쌍둥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관계에 속한 미자와 태준의 관계가 핵심적인 내러티브로 작용하는 <사랑과 야망>의 진짜 주인공은 그래서 미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자의 욕망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녀에게 성공은 독립과 같은 의미이지만, 그녀는 그 방법을 모른다. 따라서 그녀를 지배하는 욕망은 유아적인 단계에 머물 뿐이다. 그것이 그녀를 해석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만든다. 그녀는 피터팬 증후군에 시달리는 어른아이면서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가부장제를 위협하는 팜므파탈이다.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난감하며 가장 비극적인 여성 캐릭터

미자는 제 정신이 아닌 여자로 보일 정도로 순수하게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태준의 성공에 자극받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고 거기서 온갖 시련을 겪으며 배우로 성공한다. 겉보기에 그녀는 매력적이고 자신만만한 현대 여성이지만, 태준 앞에서 그녀는 무엇을 해도 용서되는 아이이길 바랄 뿐이다. 그녀의 욕망은 태준 때문에 발현되고, 태준 때문에 좌절되며 태준 때문에 구제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가부장제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보이지만, 그녀의 존재가 자기 모순과 자기 배반을 통해 증명된다는 점에서 그녀는 독자성을 가진 캐릭터이다. 그녀의 자의식은 완성되거나 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미자는 한국 드라마 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난감하며 가장 비극적인 캐릭터이다. 그녀의 비극은 그녀가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질주하는 결과로 돌아온다.

원작 <사랑과 야망>의 마지막 회를 기억해보자. 그녀는 초로의 나이에 재벌 회장에 오른 태준에게 축하가 아닌 독설을 퍼붓는다. 80년대 당시, 재벌 회장 부인이라는 위치는 한 남자의 아내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태준에 대한 질투심과 라이벌 의식이 작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녀의 욕망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고, 과연 그것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인지조차 밝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가 단지 과도하게 히스테릭한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교적인 관념과 개발 독재가 팽배한 시대에 태어나 한 번도 스스로의 욕망과 정체성을 해석해본 경험이 없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녀는 상징적 의미로서 ‘괴물’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욕망이 삶의 아젠다가 되는 시대에는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랑과 야망>이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꾸준한 관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순수하게 모순적인 욕망에 지배당하는 미자의 캐릭터가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글 차우진







2006-08-22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