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와 리얼리즘의 조화.’
MBC TV 사극 ‘주몽’(연출 이주환·김근홍, 극본 최완규·정형수)의 기세가 뜨겁다. TNS미디어코리아 집계 결과 ‘주몽’은 방영 4주 만에 시청률 30%대를 넘어섰다. ‘대장금’ 이후 한동안 부진했던 MBC 사극이 다시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영웅담=사료가 적은 고대사를 다루는 드라마 제작진은 많은 부분 상상력에 의존해 극을 전개시켜야 한다. ‘주몽’은 젊은이의 눈을 끌 만한 판타지와 중장년을 붙들 현실감을 적절히 배합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해모수(허준호)를 찾아다니는 한나라 철기군의 모습에서 영화 ‘반지의 제왕’의 나즈굴을 연상한다.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예언하는 신녀 여미을(진희경)도 극의 신비감을 높인다.
반면 중장년 시청자들은 오랜만에 나온 탄탄한 서사극에 매력을 느낀다. 해모수를 신의 아들이 아니라 고조선의 독립 투사로 그려내 사실성을 높였고, 건달에 불과하던 주몽은 자신의 고귀한 출신성분을 깨닫고는 인간 한계를 넘는 모험을 시작한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영웅이 ‘상서로운 탄생→유아기의 위험→구원자에 의한 평범한 양육→존재 자각→모험과 시련→신에 근접한 영웅 탄생’의 패턴을 거친다고 지적한다. 극중 주몽은 자신이 해모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한 채 핍박받다가 궁밖으로 쫓겨난다. 처음엔 전쟁에 나가기조차 두려워하던 주몽은 왕손의 후예임을 깨달은 뒤, 한나라에 빼앗긴 고조선의 영토를 찾기로 결심한다. 제작진은 주몽의 극전개를 인류 보편의 영웅담으로 꾸밈으로써 시청자의 원초적 감수성을 자극하고 있다.
‘주몽’의 영웅 모험담은 평소 TV를 멀리하던 남성 시청자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주몽’의 남성 30∼50대 시청률은 10%대로, 동시간대 방영되는 멜로물 ‘미스터 굿바이’ ‘101번째 프러포즈’의 1∼2%대와 비교할 수 없다.
◇신화 속의 고구려 등장=1990년대 초반 KBS ‘삼국기’가 삼국시대 초반 역사를 다룬 적은 있지만, 고대 고구려 역사가 전면에 등장한 것은 ‘주몽’이 사실상 처음이다.
지금까지 사극은 관련 사료가 풍부한 고려·조선 시대의 소재를 발굴하는 데 집중했다. 세트와 의상 등 제작 인프라도 고려·조선에 맞게 축적됐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사극 특성상 이미 갖춰진 제작 환경에서 다시 소재를 찾아야 했으므로 ‘고려·조선 소재 발굴→세트·의상 등 인프라 구축→구축된 인프라에 맞는 소재 재발굴’의 순환이 이뤄진 것이다.
그러나 고려·조선 시대에는 더 이상 다룰 만한 소재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였다. KBS2 ‘해신’(통일신라)이나 SBS ‘서동요’(백제)는 소재 고갈에 시달리던 우리 사극이 고대사로 지평을 넓히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MBC 정운현 책임 프로듀서는 “삼국 흥망기는 영웅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이기에 흥미로운 사람 이야기를 찾는 드라마 제작진의 눈길을 끈다”고 말했다.
‘주몽’ 방영 이후에도 김종학프로덕션의 ‘태왕사신기’와 SBS의 ‘연개소문’, KBS의 ‘대조영’ 등 고구려와 그들의 후예인 발해를 다룬 사극이 이어진다. 새 소재를 찾아 헤매는 드라마 제작자들의 눈에 웅대했던 고구려의 기상이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