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사극, 영웅 신화에 대한 재해석
2005년에도 TV 브라운관을 수놓은 많은 사극들이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경기회복이 더디고, 사회가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옛날 이야기로 잠시 고달픈 현실을 잊고 싶어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삶을 갈망한다. 이러한 시청자들의 심리는 TV 사극의 높은 시청률로 이어졌다.

올해 사극에서 두드러지는 경향은 영웅 신화에 대한 재해석이었다.

사극의 특성상 역사 속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던 인물을 중심으로 픽션이 가미되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영웅의 탄생과 고난, 승리를 함께하는 즐거움을 찾는다.

장보고와 이순신, 2005년 상반기를 흔든 영웅들



KBS '해신'(극본 정진옥 연출 강일수)은 통일신라 시대 반역자로 기억된 장보고를 역사 속에서 다시 불러내 노예에서부터 거상으로 일어선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해신'은 주인공 장보고(최수종)와 정화(수애)의 애틋한 사랑, 그리고 반영웅으로 카리스마를 뽐낸 염장(송일국)의 멜로 라인과 해상 전투, 칼 싸움 등의 전투장면 등 마치 무협지의 호쾌한 전개방식을 연상시키는 스토리 라인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KBS '불멸의 이순신'(극본 윤선주 연출 이성주) 역시 독도 문제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던 시기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로 시청자의 막힌 속을 풀어주었다.

이 작품으로 올해 KBS 연기 대상 최우수상 후보로 오른 김명민은 이순신의 재현으로 환호를 받았다.

또한 이순신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과 거북선 침몰 등의 초기 실패를 다룬 장면 등은 "이순신을 유약하게 그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후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실패와 고뇌를 딛고 일어난 인간적인 영웅상을 창출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제 5공화국에 대한 신화 허물기와 속을 알 수 없는 요승 신돈



KBS가 영웅 신화의 정석으로 승부했다면 반대로 MBC는 영웅 신화 허물기에 도전했다.

10% 초반 시청률에 머물렀지만 올 한해 어떤 드라마보다 많은 화제와 다사다난한 길을 걸었던 '제 5공화국'(극본 유정수 연출 임태우)은 아직도 우리 역사의 상처로 남은 80년대에 대해 정면돌파의 전법을 구사했다.

'제 5공화국'이 허물었던 신화나 영웅은 전두환 그 자체가 아니었다.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도 필요하다'는 개발 도상국 국가의 내면에 뿌리박혀 있는 신화와 그 이면에 숨겨진 '내가 희생 당하지만 않는다면 소수는 희생되어도 된다'는 이기심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자 반성이었다.

따라서 '제 5공화국'은 영웅신화가 가져다주는 달콤함과 심리적 위안보다는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거리두기와 비판의 필요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는 전두환이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비판적 거리두기보다는 자신을 동일화하거나, 무조건 몰입해 보는 일부 시청자의 특성상 초반 '전두환 미화 논란'에 시달리기는 했다.

그러나 결말까지 함께 했던 시청자들에게는 "뚝심있게 현대사의 아픔을 잘 표현했다", "역사는 사실을 떠나 권력을 쥔 자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심리가 스릴러와 같은 재미를 주었다"는 박수를 받으며 막을 내렸다.

실제 5공 인사와의 법적 공방과 아울러 극적 재미와 주제의식, 역사적 사실의 균형위에 서 있는 Faction 드라마의 앞으로의 지향점에 대한 고민은 숙제로 남았다.

170억원을 투자해 화제가 되었던 MBC '신돈'(극본 정하연 연출 김진민) 역시 기존 영웅신화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주인공을 내세웠다.

고려 말 공민왕(정보석)과 신돈(손창민), 노국공주(서지혜)의 일대기를 그린 이 드라마는 선과 악, 야망과 이상이 뒤엉킨 요승 신돈(손창민)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초반 '낯설다'는 반응과 '뭔가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재미있다'는 반응이 나뉘었다.

이순신이나 태조 이성계와 같이 어떤 집단을 이끄는 명분을 내세운 캐릭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신돈'이 '한명회'처럼 처음부터 야망과 출세욕에 불타는 통속적인 인간이라는 성격을 뚜렷하게 하고 그의 성공과 몰락 일대기를 훑어가는 민담같은 재미를 주는 캐릭터로 보기에도 힘들었다.

초반 '신돈'의 선문답과 초인적인 능력, 세상을 바라보는 일견 냉소적인 시선과 연민의 뒤섞임은 우리 사극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캐릭터였다.

이후 유약한 공민왕이 왕좌 자리에서 권력의 풍파에 단련되어 가는 모습이나, 점차 권력의 중심으로 접근해가는 신돈의 모습이 부각되면서 시청률도 상승하고 있다.

낯선 캐릭터도 계속 보다 보면 정이 들고, 세속의 바다로 뛰어든 신돈의 모습과 변화, 주변 인물들의 본격적인 대결이 더해지면서 이후로도 상승세가 점쳐진다.

영웅이 떠난 자리, 세속사에 대한 다시보기



SBS는 박경리 원작의 '토지'(극본 이홍구 연출 이종한)로 전 세대 시청자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1979년, 1987년에 이어 이번에 3번째로 드라마화된 '토지'는 한국의 근대사를 최서희라는 한 여인의 일대기와 함께 방대하게 엮어낸 한국 문학의 거목이다.

김현주, 유준상이 주연한 SBS의 '토지' 역시 긴 이야기를 서희(김현주)의 일대기 중심으로 풀어나가며 당시의 시대상과 사회상에 대한 고증과 재연으로 시청자들을 20세기 초반 조선과 만주 벌판으로 초대했다.

다만 주인공 2세들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몇몇 신인배우들의 연기력 부족으로 극의 흐름 마저 무너진다는 지적을 받았던 것이 옥에 티로 지적됐다.

'대장금'의 김영현 작가, 이병훈 PD 콤비가 뭉쳐 화제가 된 SBS '서동요'(극본 김영현 연출 이병훈) 역시 꾸준하게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서동요'의 향가 한 구절에서 백제와 신라 시대 서동(조현재)과 선화공주(이보영)의 사랑과, 서동이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서동요'는 '대장금'과 같은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아니지만 잔잔한 스토리와 에피소드, 조연들의 탄탄한 연기가 어우러져 월화드라마 가운데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

뚜렷한 영웅의 기개나 야망을 내세우기보다는 재기 넘치는 주인공과 그를 이끌어주는 선화공주의 멜로라인에 중점을 두면서 '허준', '대장금' 이후 주목받고 있는 퓨전사극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 사회학'(오명환, 나남신서)에서는 사극을 '목숨 걸고 만드는 드라마'라고 지칭했다.

재미와 감명, 두 가지를 잡기 이전에 사극은 결국 작가와 제작진의 역사의식과 역사관을 보여주고, 그것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어렵고 척박해질수록 역사의 땅이라는 피신처를 찾는 시청자들은 많아질 것이다. 그 피신처는 대중이 열광하며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는 영웅 신화일 수도 있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서 묻혔던 개개인의 세속사 일수도 있다.

대중적 호응과 역사 의식, 두 가지에 대해 모두 나름의 답을 찾아가고 있는 한국 사극이 2006년에는 또한 어떤 변화를 보일지 주목된다.




조이뉴스24 석현혜 기자(action@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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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4 (1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