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판 <GQ>에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의 인터뷰가 실렸다. 옷을 만드는 사람이 아닌 ‘옷을 입는 개인’으로서 마크 제이콥스가 가진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기사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마크 제이콥스가 쇼핑을 몹시 싫어한다는 대목이었다. 아래는 그 기사에 실린 마크 제이콥스의 말.
“세상에 저 같은 사람만 있으면 남성복 브랜드는 다 망할 거예요. 제게 잘 맞는 셔츠 파는 집을 몇 군데 아는데 매번 거기만 가거든요. 그것도 일년에 한 번 갈까 말까…. 똑같은 셔츠를 세 벌 정도 사다가 낡아서 못 입게 될 때까지 매일 그것만 입어요.”

세계에서 가장 옷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 쇼핑을 죽도록 귀찮아 할 뿐만 아니라 매일 똑같은 옷을, 그것도 떨어질 때까지 입고 다닌다니 재미있지 않은가(실제로 그는 패션쇼를 할 때마다 매번 베이식한 모직 팬츠와 셔츠-날씨가 추울 땐 니트 풀오버를 덧입기도 하지만-에 컨버스 스니커를 매치한 룩으로 등장하곤 한다).

멋내기에도 ‘득도의 경지’가 있다

톱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왼쪽)와 칼 라거펠트.

하긴, 매 시즌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고, 세계 패션계를 좌지우지 하는 주제(?)에 언제, 어디서나 똑 같은 옷차림을 고집하는 디자이너가 어디 마크 제이콥스 뿐이랴. 샤넬의 칼 라거펠트도 발렌시아가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도 버버리 프로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도 각기 스타일은 다를지언정 늘 비슷한 옷차림을 고수하기는 매한가지. “옷을 잘 만드는 것과 옷을 잘 입는 것은 다르지 않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들이 이토록 스스로의 옷차림에 무심할 수 있는 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득도의 경지’처럼 그들이 ‘멋내기의 어떤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 모두는 분명 한동안 ‘옷’ 혹은 ‘멋내기’에 정신을 잃을 만큼 푹 빠져 살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그 ‘매혹의 최면 상태’에서 깨어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딱 하나’를 발견해냈으며, 종국엔 이전보다 훨씬 객관적인 시각으로 옷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스카프 하나에도 스타일이 살아 있는 그녀

<90일, 사랑할 시간>에 등장하는 고미연(김하늘 분)의 옷차림에서도 마크 제이콥스 비스무리한 자신감과 여유가 묻어난다. 이 드라마에서 김하늘의 옷차림은 별로 눈에 띄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트렌드가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스카프를 고미연의 여성스럽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키 아이템’으로 선택한 데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지는가 하면, 그렇게 매번 스카프를 착용하면서도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스타일링함으로 써 촌스러움을 피해가는 데에서는 감각이(도전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스카프를 촌스럽거나 ‘오버’스럽지 않게 연출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스키니 진의 광풍에도 끄떡 않고 자신의 스타일대로 부츠 컷 데님 팬츠를 선택하는 데에서는 ‘거장 디자이너 풍’의 배짱과 여유가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고미연의 옷차림은 요란하지 않고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우면서 다른 누구의 옷차림과도 비슷하질 않아서, 고미연이라는 사람이 ‘뿅’하고 사라지는 순간에는 그 옷들까지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다.

당신만의 스타일, 계속 공부하세요!

반면 <눈의 여왕>의 김보라(성유리) 때문에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지만 ‘트렌드쯤이야!’ ‘남의 취향쯤이야!’ 하는 여유와 배짱이 느껴지는 김하늘에 비하면 성유리는 옷의 카리스마에 사람이 경도된 느낌을 준다.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발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모피 머플러와 스팽글 톱, 가죽 소재의 울트라 미니스커트, 허벅지까지 올라오는(thigh-high) 부츠 하나하나가 다 예쁘지만 이 아이템들 어디에서도 보라만의 취향이나 옷에 관한 ‘생각’이 묻어나질 않는다. 보라는 옷 입기의 매력에 빠져서 “이거 예쁘네” “저거 예쁘네”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예쁜 옷들을 닥치는 대로 사 들인 다음, 이렇게도 입어보고 저렇게도 입어보는, 멋내기에 폭 빠져 있는 철부지 같아서 예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멋진 아이템들을 전시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보라에겐 시간이 더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바르르 물이 끓은 다음, 서서히 뜸이 들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먹을 수 있게 되는 밥과 마찬가지로, 스타일 역시 세상의 모든 멋진 옷들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헤매고, 방황하는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만 찾아지는 법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