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21일 (일) / 제 35 회
정부여당의 총선패배는 노태우에게 후계자로 가는 길목이 되었으
나, 개각으로 장세동은 전두환의 확고한 정치적 신임를 받게되고
또한 경질이 예상되었던 노신영에게 총리직을 맡김으로써 전두환
은 차기후계 구도를 자연스럽게 노태우-노신영-장세동 라인으로
형성한다.
또한 전두환은 예상 밖의 신민당 총선승리로 정치규제자들의 해
금 문제가 정치적 이슈로 부상할 것을 우려해 전면적인 해금조치
를 단행. 이로 인해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적으로 부활하며 이들
에 의해 야권통합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진다.
한편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80년 광주 미문화원 방화 사
건과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뒤이은 것으로 광주문제가
학원가의 최대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1985년 이후, 광주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한 대학가와 총선 1주년을
맞아 김대중, 김영삼을 중심으로 새롭게 탄생한 신민당은 전두환
의 영구집권을 막기위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추진 1천만서명운동을
시작하며 전두환을 양면에서 압박한다.
곧이어 부산 광주 대구에서 개헌추진대회가 연달아 열리면서 개
헌 열기는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자 민중혁명을 우려한 5공 세력은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건국이후 최대의 사기극 금강산땜 조
작사건을 꾸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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