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난징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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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출생.
일리노이대 신문학과 졸업 후 <AP 통신>과 <시카고 트리뷴>에서 기자로 활동.
저작으로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 췐쉔선>, <화교 미국인>, <난징대학살>이 있음.

26세 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후 97년, 어릴 적 부모님으로부터 전해들은 난징의 참상을 생생히 기록한 <난징대학살>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책이 출간된 후 일본우익들로부터 많은 항의와 협박을 받기도 했다. <난징대학살> 출판 이후, 아이리스는 심각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지난해 11월 9일(미국 시간) 권총으로 자살했다.

 

중국인들 사이에 ‘난징의 살아있는 부처’라 불린 욘 라베는, 일본군이 난징에 도착하기 오래 전 대부분의 독일인 친구와 동료들이 중국을 떠난 데 반해 중국에 혼자 남아 선교사를 비롯한 다른 서양인들과 함께 중국난민을 위한 피난처, 국제안전지대를 설립했다.

또한 일본대사관과 히틀러에게 끊임없이 난징에서의 학살을 묘사한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일본대사관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믿었던 히틀러에게서도 답을 받지 못한다. 급기야 라베는 독일로 돌아간 후 베를린의 게슈타포에게 심문을 받게 되고, 불행한 노후를 보낸다.


욘 라베가 히틀러에게 보낸 편지.

그는 히틀러에게 난징시민을 구해달라고 호소했다.


 

 

 

 

안전지대의 사진
국제 안전지대에 모인 중국인들, 중국인들에게 안전지대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였다.



 

일본군은 중국인을 상대로 100명 목베기 시합을 벌였다.
그 주인공은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다케시.

일본 언론은 ‘무카이 106, 노다 105 - 목표를 이미 넘어서
중국인 100명 목베기 시합을 계속하고 있는 두 병사‘란
제목으로 난징의 살인시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두 사람은 1948년 이 기사가 증거가 되어,
남경 양화대에서 중국측에 의해 총살당했다.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한 후 군대의 총검 훈련에 중국인 포로를 이용했다.

서투른 병사에게 걸린 포로는 수십 번을 찔린 후에야 겨우 죽을 수 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운전수였던 무라세 모리야쓰는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닌
단지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들이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무라세가 당시 찍은 사진들


난징대학살에 참가했던 일본군들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림을 그렸다. 왼쪽 그림은 줄지어 양쯔강으로 향하는 중국인을 학살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 오른쪽은 중국인을 불에 태워 학살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린 것이다.




난징대학살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리슈잉은 일본군이 휘두른 총검에 37차례나 찔리는 부상을 입었으나, 미국인 의사 로버트 윌슨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리 할머니의 모습은 당시 난징대학살을 기록한 존 마기 목사의 필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일부 서방 목격자들의 일기와 편지에도 언급됐다. 리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4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샤수친은 대학살 당시 13명의 가족 중 11명을 잃었다.









 

예취평은 난징대학살 당시 11살이었으며, 가족 8명이 모두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반성하지 않는 일본 민족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혼다 가츠이치는 신변의 위험 때문에 방송에 출연할 때면 항상 선글라스와 가발로 변장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