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  ㅣ  2005-12-18   
다시보기:
조회 :

2005년 12월 18일 

난징대학살 - 3부 증언 1937년 겨울

■ 무카이 106, 노다 105 - 100명 목 베기 경쟁 연장전 돌입 

  1937년 난징에서는 일본군 장교 무카이 토시아키와 노다 타케시
가 중국인을 상대로 전대미문의 살인 게임을 벌였다. 이른바 ‘100
인 목베기 경쟁’. 당시 일본의 신문들은 ‘무카이 106, 노다 105 - 목
표를 이미 넘어서 중국인 100명 목베기 시합을 계속하고 있는 두 
병사’란 제목으로 이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무카이와 노다 소위는 
종전 후 이 기사들이 증거로 작용해 1948년 중국에서 전범으로 처
형당했다.
  그로부터 68년이 지난 2005년 8월, 일본에서는 ‘100명 목 베기 경
쟁’ 기사의 진위를 가리는 재판이 있었다. 무카이와 노다의 유족들
이 선전용으로 있지도 않은 사실을 과장보도 했다며 당시 언론사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 일본 재판부는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유족들은 상고를 준비중이다. 
  그러나 취재진은 당시 일본에서 ‘30여명을 베는 체험’ ‘60명을 닥
치는 대로 베다’ ‘인간을 베는 심경을 듣는 좌담회’ 등 중일전쟁 참
전군들의 다른 기사들을 찾아냈다. 또한 두 소위의 사진을 촬영한 
사진기자, 사토씨를 만나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노
다 소위와 같은 부대원이었던 모치즈키의 자서전에 두 소위의 살
인게임이 자세히 묘사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당시 일본 사회에는 왜 이런 기사가 
필요했는가? 그리고 68년이 지난 오늘날 100인 목 베기 경쟁 기사
의 진위 논쟁이 다시 불붙은 이유는 무엇인가? 

■ 증언 - 1937년 그 해 겨울

  1937년 7월, 이른바 노구교(盧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파죽지세로 텐진, 베이징 등을 거처 11월 상하이를 점령했
다. 일본의 다음 목표는 장제스 국민당 정부가 수도로 삼고 있는 
난징. 별다른 저항과 전투가 없었는데도 일본군 난징 시민을 상대
로 6주간의 대학살을 시작했다.

1) 난징전 참전 일본군의 종군기 “살인, 강간, 방화는 천하가 허락
했다”
  당시 난징전에 참가했던 한 일본군의 종군기에는 ‘강간, 강도, 살
인, 방화는 천하가 허락했다’라는 글이 남아 있다. 난징을 점령한 
후에도 일본군의 악행은 계속됐고 더욱 악랄해졌는데 그 중 가장 
심했던 것이 강간이다. 난징전에 참전한 한 일본군은 ‘젊은 여성들
은 닥치는 대로 강간했고, 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그렇게 여성
을 강간하는 걸 사이코, 사이코라고 했다’ 고 말했다. 또 ‘중국이어
서 가능했지, 일본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2) “먹일 게 없어서 죽였다”
  난징전에 참전한 한 일본군은 ‘부대원이 56명이었는데, 수백명
의 사람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손 쓸 도리가 없었다’고 증언
한다. 일본군의 포로 학살은 식량이 부족했던 것에서 기인했다는 
것. 또 일본군의 선민의식과 중국인에 대한 폄하가 학살의 이유였
다고 밝혔다. 포로 학살은 국제법에 위반되는 사항이었지만 난징
에서 포로학살은 일상적으로 행해졌고, 방법도 칼로 찌르고, 휘발
유를 뿌려 태우는 등 매우 잔혹했다.


3) 12월 13일 오후 2시 “여단 명령에 의해 포로는 전부 죽인다”
  난징전에 참가했던 일본군 대부분은 자신들의 악행이 명령에 의
한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들은 ‘중대장이 강도, 강간, 방화, 살인은 허락한다고 했다’, ‘도
쿄 본부에서 난징의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고 
밝혔다. 실제로「동경전사자료집」에는 1937년 12월 13일에 여단
명령에 의해 포로는 전부 죽이라는 명령서가 남아있다. 명령에 의
한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게 그들의 논리인데 과연 명령에 의한 행동에서 개인의 책임은 없
는 것인가?

4) “전쟁이니까... 천황의 군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