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쟁 성폭행 피해여성과 사생아들(06/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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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강지웅

△ 옛 유고슬라비아의 정치 지도자 ‘티토’가 사망한 후, 유고 연방은 모두 6개의 나라로 쪼개집니다. 맨 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코소보. 크로아티아는 가톨릭을 믿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코소보는 이슬람교, 나머지는 세르비아 정교를 믿습니다.

‘보스니아’ 하면 대부분의 시청자들껜 생소하게 들리실 겁니다. 심지어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아니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보스니아는 유럽대륙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나라입니다.

예전엔 ‘유고슬라비아’란 이름으로 단일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6개의 민족이 3가지 종교(이슬람교, 세르비아 정교회, 가톨릭)를 믿는 다민족 다종교 사회이긴 했지만 평화롭게 공존하던 나라였습니다. ‘내전’(內戰)이란 비극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죠. 위의 지도는 6개의 나라로 쪼개진 오늘날의 모습입니다. ‘유고슬라비아’란 이름은 ‘옛 유고 연방’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전경. 사라예보는 1984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곳이다.

지난 2월 18일 ''그르바비차'라는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 곰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성폭행당한 여성들의 고통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르바비차‘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인근에 실제로 존재하는 작은 마을입니다. 보스니아 출신인 31세의 여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의 고향마을이기도 합니다.

내전 당시 ‘그르바비차’에는 강제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운영하던 이 강제수용소에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온갖 악행이 벌어졌었답니다. 감독은 내전 당시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제수용소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큐멘터리에 담아내기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대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 영화의 한 장면

△ ‘그르바비차’를 감독한 ‘야스밀라 즈바니치’

영화의 줄거리는, 보스니아 모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 다. 아이는 죽은 아빠가 내전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전쟁영웅이라고 엄마에게 들으면서 자랍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 가지 않죠. 엄마는 결국 12살난 딸에게 진짜 아빠는, 강제수용소에서 엄마를 강제로 성폭행한 이름도 모르는 세르비아계 민병대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후의 영화 전개는 딸이 충격적인 사실에 방황하고 엄마와 갈등하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며 엄마와 화해한다는 내용입니다.

황금 곰상을 수상한 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보스니아 내전이 끝난 지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전범들은 체포되지 않고 유럽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며 “영화의 수상이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소감을 밝혔습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4년간 25만 명 이상이 죽고,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보스니아 내전.

내전은 보스니아 거주민들의 과반수를 넘는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의 독립선언과 함께 시작됩니다. 보스니아는 대한민국의 반 정도 크기의 영토를 갖고 있습니다. 인구는 400만 가량. 3.1절이 우리에겐 국경일이듯이, 보스니아 사람들도 3월 1일을 기념합니다. 이 날이 바로 보스니아의 독립기념일입니다. 1992년 3월 1일 보스니아의 다수를 차지하던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이 옛 유고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 날이죠.

보스니아 사람. 글쎄요 정확히 보스니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설명하기도 좀 애매한 게 사실입니다. 여하튼 보스니아 지역엔 약 40% 가량의 이슬람계 거주민들이 있었고, 30%는 세르비아계 거주민, 나머지 20%는 크로아티아계 거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중 이슬람계 거주민들과 크로아티아계 거주민들이 독립을 지지했고, 세르비아계 거주민들은 옛 유고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반대했습니다. 결국 독립선언과 동시에 내전이 벌어진 것이죠. 내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이들 세 부류의 보스니아 거주민들이 서로 이웃하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던 건 아닙니다.

언어도 같고(세르보 크로아티아어), 민족도 남슬라브 민족으로 같은 계통입니다. 종교가 다르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 이슬람계, 크로아티아계 가톨릭, 세르비아계 정교회 - 지금까지 별 문제 없이 살아오던 사람들입니다.

‘보스니악’이라 불리는 보스니아 무슬림들도 오랜 터어키의 지배기간동안 이슬람교로 개종한 슬라브인들이었습니다. 동로마제국이 무너지고 발칸반도엔 오랫동안 주인이 없었습니다. 여러 소수 민족들과 이들을 지배하려 욕심내던 거대 제국들의 각축이 있었습니다. 19세기까지 발칸반도를 지배했던 것은 지금의 터키 - 오스만 투르크 - 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지배층의 종교에 융화되가는 것은 역사적 흐름이었습니다.

△ 내전 희생자들이 묻힌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묘지. 멀리 보이는 원형경기장이 1984년 동계올림픽 주경기장이다. 묘비에 보면 대부분 1992년에 사망한 희생자들이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 중심가에 보면 반경 500m안에 이슬람 사원, 정교회 교회, 가톨릭 성당, 유대교회당이 다 모여 있습니다. 저마다 당당한 외양을 자랑하며. 그리고 보스니아의 오랜 풍습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서로 다른 종교의 축제일에 이교도들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엔 무슬림들이 가톨릭과 정교회 가정을 방문하고 덕담을 하고, 라마단 기간 중엔 가톨릭과 정교회 신자들이 무슬림 가정을 방문해서 덕담을 하고. 근래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충돌을논하는 문명론자들이 많지만, 보스니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문화적으로 다종교 다민족을 포용하고 융합시키는 놀라운 지혜를 발휘하던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스페인 지역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받아들인 곳이 바로 보스니아였습니다.

그래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일년내내 종교축제일이라고 얘기할 정도입니다.

△ 사라예보 시내 중심가에 자리잡은 가톨릭 성당

△ 사라예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슬람 사원

 

△ 세르비아 정교 교회당. 바로 옆에 가톨릭 성당이 있고 200m 떨어진 곳에 이슬람 모스크와 유대교회당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평화시에는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이루지만, 한 번 분쟁이 벌어지면 또한 걷잡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됐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의 암살이 일어난 곳이 바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였습니다. 당시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 청년이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를 암살한 것이죠.

1992년부터 4년간 벌어졌던 보스니아 내전은 바로 보스니아의 ‘어두운 그늘’을 보여줬습니다. 서로 이웃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적으로 돌변해버린 것이죠. 그것도 정말 무서운 적으로.

△ 강제수용소에 붙잡힌 보스니아 사람들

내전은 옛 유고연방군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인접한 나라 세르비아의 일방적 지원으로, 세르비아 민병대의 우세 속에 진행됩니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강제추방과 학살을 감행합니다. 바로 인종청소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최악의 인종청소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이후 유럽의 지성과 양심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해왔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죠. 그런데 유럽한복판에서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망령이 부활한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10세에서 60세 사이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집단성폭행과 강제임신이 자행된 것입니다. 강제수용소를 중심으로 여성들을 수 개월에 걸쳐 집단성폭행하고, 이 여성들이 임신하고 나서야, 임신하고서도 최소한 6~7개월은 지나 낙태시킬 수 없을 때에서야 비로소 이 여성들을 강제수용소에서 풀어주는 기가 막힌 일이 ‘인종청소’란 이름으로 자행된 것입니다.

2만 명의 여성들이 성폭행으로 희생됐고, 여기서 태어난 사생아만도 2천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 사라예보를 포위한 세르비아 민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벌집이 된 한 건물

△ 교전으로 폐허가 된 한 교회당

△ 무너진 이슬람 사원

내전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80만 명 가량이 보스니아를 떠나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성폭행 피해여성들은 고향에서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없어서, 다들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힘겹게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 기막힌 일은, 성폭행 가해자들을 대로변에서 만나기도 한다는 겁니다. 내전이 1995년에 미국과 나토의 개입으로 적당히 봉합되면서 보스니아는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연방’과 ‘스루푸스카 세르비아계 공화국’으로 양분됐습니다.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복무하면서 갖은 악행을 다 저질렀던 사람들은 전혀 처벌도 받지 않고, 현직 경찰이나 공무원으로 활동하고들 있답니다. 이들을 잡아 가두려면 과거에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증거를 모으고 증인을 내세워야할텐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성폭행 피해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고 숨어 다녀야 할 판입니다.

사생아들 문제가 보스니아 내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사생아들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나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92년에 내전이 발생했으니, 빠르면 93년에 출산했다고 가정해도 지금 한국나이로 14살입니다. 작년에 유니세프(국제아동기금)에서 보스니아내 사생아들에 대해 대대적인 실태조사를 했지만, 아직까지도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보고서를 다 만들어 놨지만 보스니아 정부의 압력으로 발간하지 않는다는 설이 있습니다. 보스니아 정부로서는 ‘뜨거운 감자’인 사생아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기가 곤혹스러웠겠죠.

유니세프 관계자를 사라예보에서 만났는데 인터뷰 촬영은 당연히 안 되고, 보고서 사본도 보여줄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간혹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이들이 친엄마를 찾아 달라고 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있답니다. ‘전쟁피해여성연합’(Women's Victims of War)의 대표인 ‘바키라’ 여사는 취재팀에게 그런 아이들이 보낸 편지와 사진을 잠깐 보여줬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촬영은 물론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도 안된다고 손사래를 치셨지만 말입니다. 특히 세르비아 지역에서 자란 사생아들의 경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게 현실이랍니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의 친엄마를 찾아주기도 그렇고, 설령 친엄마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대체 어떻게 친엄마가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할 지... 솔직히 정말 난감한 상황입니다. 전쟁피해여성연합의 바키라 대표는 사생아들 문제는 해법이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사생아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엄마를 포함한 모계 가족들에겐 ‘적’이자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한 경우가 많고, 버려지거나, 때론 세르비아 지역으로 보내진 아이들도 많습니다.

△ 알렌과 알렌의 양아버지 무하렘씨

취재팀이 만난 ‘알렌 무힉’이란 소년의 경우는, 엄마가 그 아이를 낳은 지 3일 만에 병원에서 달아나 버리고, 결국 병원 경비원이었던 지금의 양부가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나이로 14살입니다. 알렌은 사라예보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 ‘고라즈데’라는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당연히 알렌의 입양소식은 그 마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 돼버렸죠. 알렌은 보스니아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이 공개된 아이가 돼버렸습니다.

2004년엔 알렌의 사연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답니다. 어린시절 알렌은 주변에서 ‘뻬로’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뻬로는, 우리 이름의 철수와 영희처럼, 세르비아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주변의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알렌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불편했었을 거라는 짐작이 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동급생들로부터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알렌은, 무척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다큐멘터리엔 이때의 사연들이 담겨있답니다.  

어떤 지역신문의 경우는 알렌의 사연을 실으면서 신문제목을 “호랑이 새끼를 자식으로 키우다니”라고 뽑았답니다. 아이가 감당하기는 너무나 힘들었겠죠. 알렌의 양부인 무하렘씨도 그때 생각만 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취재팀은 알렌을 고향인 ‘고라즈데’에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알렌과 알렌의 양아버지 무하렘씨가 그 먼 고라즈데에서 버스를 타고 사라예보까지 직접 오신 겁니다. 인터뷰 잠깐 하려구요. 고라즈데에 방송 카메라를 들고 취재팀이 오면 또 마을사람들이 수근댄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친 엄마 보고 싶지 않냐?’는 취재팀의 상투적인 질문에 웃으면서 ‘보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는 알렌의 천진한 모습. 그 모습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알렌의 외로움과 상처를 보여주는 거 같아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작년부터 성폭행 피해여성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보스니아 정부 내에서 입법 추진되고 있습니다. 피해여성들에게 의료비와 생활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에선 성폭행 피해여성들에게 엄격한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하고 있답니다. 금전적 보상을 노린 허위 성폭행 피해신고를 방지하기 위해, 성폭행 피해여성들은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라는 것을 입증할 ‘증거’와 ‘증인’을 내세워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폭행 피해여성으로 입증되면, 한 달 10유로. 우리 돈으로 18,000원 정도의 돈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취재팀의 생각에, 과연 누가 미쳤다고 ‘자신이 성폭행 피해자라고’ 나설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보스니아 정부의 태도는 상식 밖이었습니다.

△ 세르비아 민병대 중 민간인 학살과 성폭행으로 특히 악명을 떨쳤던 ‘아르칸’ 부대. 일명 호랑이 부대

△ 민간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세르비아 민병대

W에서 취재했던 ‘암라’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지금 나이가 34인 암라는 16살짜리 아들과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삽니다. 남편은 군인이었는데 내전 때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암라도 내전 때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갔는데, 이 병원에서 밤마다 성폭행을 당합니다. 물론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서죠. 1년가량 성폭행 당했답니다. 그때 암라의 나이 불과 19살이었고, 아들은 11개월의 어린 아기였습니다. 친정 엄마는 다른 마을에 살아서 이 사실을 전혀 몰랐구요. 암라는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숨겼습니다. 혹시나 아들이 알까봐 노심초사했답니다.

그런데 우연히 1년 전에 아들이 엄마의 ‘과거’를 알아버렸습니다. 아들이 알게 된 계기가 너무 황당합니다. 암라는 불과 1년 전까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헛간 같은 데서 아들이랑 살았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집다운 집을 가지기 힘들었죠. 그런데 정부에서 남편 앞으로 보상금 비슷한 게 나옵니다. 남편이 군인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조그만 집을 지을 수 있게 보조금도 나옵니다. 필요한 서류를 관공서에 제출하고 보상금과 주택보조금을 받는 과정에서 그만 공무원의 실수로 엄마의 아픈 과거가 아들에게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부턴 날마다 혼자 방안에서 울고, TV에서 엄마랑 비슷한 사연이 나오면 TV 보면서 울고, 마지막 희망인 종교에 매달려 매일 이슬람교의 신인 ‘알라’만 찾는다고 합니다.

현실에 너무 절망하고 상처받아서겠죠.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는 엄마의 심정은 오죽하겠습니까? 아들한테 차마 말도 못 붙이고 그냥 엄마나 아들이나 ‘그 일’에 대해선 모르는 척,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취재팀에게 병원에서 성폭행 당했던 일과 남편 죽을 때의 일을 얘기하면서도 의연했던 암라가, 아들 얘기로 들어가자마자 그 큰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더군요. 이분들에게 내전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 진행중’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증거와 증인을 제시하라는 정부의 요구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킬 만합니다. ‘전쟁피해여성연합’의 바키라 대표는 이 얘기를 하면서 어찌나 화를 내던지 취재팀이 몸둘 바를 모를 정도였습니다. 바키라 대표도 역시 성폭행 희생자입니다. 그녀는 10대의 큰딸이 집에서 세르비아 민병대에게 성폭행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저항하다 그녀도 끌려가서 3번이나 성폭행을 당합니다. 결국 고향을 떠나 멀리 사라예보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죠. 그녀는 입버릇처럼 자신이 이렇게 고향을 떠나 사라예보에서 이런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되뇌었습니다. 바키라 대표를 비롯한 몇몇 용감한 성폭행 피해여성들의 노력으로, ‘전쟁피해여성연합’은 내전 당시 성폭행 피해여성들의 피해사례를 많이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회원이 이제는 1,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모두 성폭행 피해여성들입니다.

이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사례를 공개하고, 성폭행 관련 증거들을 수집하는 이유는 성폭행 가해자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성과도 거뒀습니다.

2001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보스니아전범 국제재판소에서는, 보스니아의 ‘포차’란 지역에서 벌어졌던 조직적 성폭행을, 최초로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성폭행 가해자들에게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늘 전쟁의 부산물로 간과되던 전쟁 중 성폭행을 전쟁범죄로 규정하고 가해자를 처벌한 것은 처음 있었던 일이랍니다. ‘전쟁피해여성연합’ 관계자들에겐 정말 감격적인 순간이었죠. 정부의 도움 없이, 때론 정부 내에서 암약하는 전범들에 의해 조사활동이 방해받으면서 이뤄낸 뜻깊은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보스니아 내전을 보스니아 내부사정으로만 치부하고, 전범재판에 소극적인 게 사실입니다. 일례로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국가들이 유대인 홀로코스트에 기울이는 관심과 노력에 비하면 보스니아의 전쟁범죄들에 대해선 '무관심‘이란 말이 적합할 정도로 신경을 안 쓰는 게 사실입니다. 보스니아 사람들이 이슬람 신자여서 그럴까요? 실제로 보스니아 사람들은 내전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유럽인이라는 생각을 많이 버리게 됐답니다. 세르비아 민병대가 무력의 우위를 앞세워 자신들을 침탈하고 학살하고 강제추방하고 성폭행하는 동안 서구의 입장은 철저히 중립적이었거든요. 양편 모두 서로 ’자제‘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균형논리를 앞세워서요. 그래서 보스니아 사람들은 ’내전‘이란 표현도 무척 싫어한답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는데 ‘내전’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내전’이냐는 것이죠.

보스니아의 이슬람 신자들은 ‘술도 먹고, (이슬람교에선 금기시되는) 돼지고기도 먹는’ 사이비 이슬람 신자로 ‘악명’을 떨쳤습니다. 서구 유럽이 종교개혁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고 신앙이 개인적으로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쳤듯이, 보스니아의 무슬림들도 중동의 무슬림들과는 달리 많이 세속화된 이슬람 신자들이었던 것이죠. 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하지만 내전이 벌어지고, 다른 유럽 국가들이 보스니아 내전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 걸 보고 오히려 중동의 국가들에 더 가까워집니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들도 더 늘었다고 합니다. 여성들도 이슬람식으로 ‘히잡’이라 불리는 머리 수건을 꼭 쓰고 다니게 되고요. 1970년대까지 많이 세속화돼가던 중동의 이슬람 신앙이 1980년대를 거치면서 보다 더 ‘원리주의적’인 모습으로 ‘퇴행’해 간 현상과 몹시 유사합니다. 이 역시 그 배경엔 미국과 서구세계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무지와 편견, 그리고 현실세계에서의 탄압이 그 원인으로 작용했죠.

그런데 세르비아 사람들은 왜 이웃의 무슬림들을 그렇게 박해했을까요? 그렇게 다정하게들 지낸 사이면서. 여기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명이 있지만 가장 주요한 원인은 정치지도자의 거짓말과 여기에 동조하는 언론의 탓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인 밀로쉐비치는 보스니아의 독립시도로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 거주민들에게 무자비한 강제추방과 학살이 곧 다가올 것처럼 선전해댑니다. TV와 라디오에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의해 살해된 세르비아 사람들의 시체가 반복적으로 비춰지고요. 밀로쉐비치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르비아 사람들의 역사적인 ‘피해의식’을 자극한 것입니다. 오도된 민족주의인 것이죠. 세르비아 사람들은 이 선전에 놀아납니다. 자신들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다고 실제로 생각하게 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중도적인 입장의 양심적인 목소리들은 묻힐 수밖에 없었고요. 지금도 세르비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분리주의자들을 제압하고 옛 유고연방을 지킬 수 있었는데, 미국과 나토의 부당한 개입으로 영토를 뺏겼다고 생각한답니다. 진심으로.

△ 믈라디치.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 전범으로 기소 도피중

△ 라도반 카라지치. 세르비아계 정치 지도자. 전범으로 기소 도피중

당시 세르비아의 정치 지도자 ‘카라지치’와 발칸의 도살자라 불리던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 ‘믈라디치’. 그리고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 밀로쉐비치 이렇게 세 사람은 전범으로 기소돼 있습니다. 밀로쉐비치는 2002년부터 헤이그로 압송되어 계속 전범재판을 받고 있지만 자신의 관련 사실을 일절 부인하고 있습니다.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는 여전히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지역에 숨어 있습니다. 잡히지 않았습니다. 현지의 세르비아 주민들은 그들을 여전히 영웅으로 대접한답니다.

이들 전범들이 모두 잡혀서 처벌당해야 보스니아 내전의 피해자들이 조금이라도 미소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내전의 상처가 아물려면 멀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스니아 전범들을 응징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인륜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을 인류의 양심으로 꼭 응징한다는 선례를 남겨야만 향후 세계의 다른 곳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