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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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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라이베리아. 남한보다 조금 넓은 면적에 약 350만명의
인구. 이 나라가 주목을 받았던 적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이베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잘 모르지만 서아프리카에서 라이베리아의 중요성은 매우 높다.
시에라리온, 아이보리 코스트, 기니 등 인접국의 내전과 난민문제가 모두 라이베리아에서
시작되었고, 라이베리아의 평화정착여부는 서아프리카의 평화와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선거
지난 11월 8일 라이베리아에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두 명의 대통령후보는
죠지 위아(George Weah)와 엘렌 존슨 설리프(Ellen-Johnson Sirleaf). 이 선거는
10월 11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결선투표였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1차 선거에서는 22명의 후보가 출마해 죠지 위아 후보가 29.8%, 엘렌 존슨 설리프
후보가 19.7%를 득표했다. 1차 투표의 득표율만으로 볼 때는 결선투표에서
죠지 위아가 당선될 것이 유력해 보였고 많은 해외 언론이 그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두 후보 중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더라도 아프리카 역사에는 새로운 기록을 남기게
될 상황이었다.
엘렌 존슨 설리프는 하바드대에서 경제학석사학위를 받고 라이베리아 정부 재무부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고, 세계은행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는 경제전문가로 매우 청렴하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 정치적 탄압을 피해 2번씩 망명한 적도 있는 그녀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만일 설리프가
당선된다면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여성국가수반이 탄생하는 것이다.
반면 조지 위아는 라이베리아인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었다. 수도 몬로비아의
빈민가 출신으로 정규교육은 8년밖에 받지 못했지만 유럽의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하며
1995년 FIFA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을 정도로 불세출의 축구스타였다. 유명세를
바탕으로 유니세프친선대사로 활동하고, 국가대표팀을 운영할 여력도 없는 세계 최빈국
라이베리아에서 자신의 사재를 털어 축구 국가대표팀을 훈련시키고 이동경비를 부담하며
2006년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만큼 대중적인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정치경험은 물론 없었고 정부에서 일해 본 적도 없었다.
죠지 위아가 대통령이 된다면 운동선수로서의 대중적인 인기가 정치 지지도로
연결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세계적인 축구스타였고 라이베리아의 젊은이들을 위해
사재를 많이 써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다 하더라도 중학교 중퇴 학력에 정치경험도
없고 특별히 국정운영능력이 있다고 여겨지지도 않는 후보가 대통령선거에서 최다득표를
하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라이베리아의 특별하다고 할 만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이베리아의 험난했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불행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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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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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베리아를 건국한 것은 미국의 흑인 해방 노예들이다. 1800년대 들어 미국에서
퀘이커교도등을 중심으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노예를 해방시켜주기도
하고, 또 일부 흑인노예들은 돈을 모아 노예주로부터 자신을 구매해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해방된 흑인노예들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 정착한
곳이 현재의 라이베리아 지역이고, 1847년 아프리카 최초의 공화국 라이베리아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성조기에서 별의 숫자만 하나로 줄인 라이베리아 국기, 하바드
대학에서 미국 헌법을 본따 작성된 라이베리아헌법이 보여주듯 라이베리아는 건국
초기부터 미국의 영향하에 있었고, 문제가 생길 때마다 미국을 바라보고 살았다.
미국에서 건너온 해방노예들은 원주민 숫자에 비하면 5%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들이
라이베리아의 상층부 엘리트를 구성했고 대통령자리 등 요직을 번갈아 차지하며 나머지
95%의 원주민들을 지배해왔다. 해방노예들이 세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라이베리아
헌법은 원주민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며 미국계 흑인과
원주민 흑인사이에 차츰 혼혈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피지배계급이 되어버린 원주민들의
불만은 누적되어갔다. 그리고 권력이 소수집단에 의해 사유화(私有化)된 가운데 부패는
일상화되었다.
1971년 텁맨 대통령이 임기중 사망하고 부통령이던 톨버트가 대통령직을 계승하고,
이어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이때에 이르러 정권의 부패와 이에 따른 국민생활의
피폐, 원주민차별에 대한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된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이
톨버트 대통령의 쌀값 인상정책이다. 원래 흑인들은 고기보다 생선, 밀보다 쌀을
좋아한다. 그러나 라이베리아에서 쌀은 100%수입 곡물. 쌀 가격 인상의 명분은
국내에서 쌀 재배를 촉진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당시 라이베리아의 쌀 수입업자는
대통령의 인척이었고, 인상된 만큼의 수입은 오로지 대통령 일가의 것이 되었다.
결국 1980년 민중폭동의 여파 속에 발생한 쿠데타로 대통령이 살해되었다. 쿠데타
주모자는 28세, 중학교2년 중퇴 학력의 육군중사 사무엘 K. 도(Samuel K. Doe)였다.
도는 이어 13명의 각료 - 대부분 톨버트 대통령의 친인척 - 를 요식적인 재판을
거쳐 처형하고 집권했다. 라이베리아 국민들은 도의 잔인함보다는 처음으로 원주민이
집권했다는 사실을 더 기뻐했다.
친미성향의 정권이 쿠데타로 붕괴된 후 미국은 특사를 파견하는 등, 도의 성향을
파악하기위해 분주했다. 그리고 도가, 정권을 잡으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일은 저질러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국 정부는 도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당시는 냉전의 절정기였다. 레이건행정부는 서아프리카에서 소련에 맞설 발판이
필요했다. 도의 인권유린과 부정부패는 극심했으나 레이건은 1982년 도를 국빈으로
초청, 융숭하게 대접했다. 또 라이베리아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했고 도는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를 격렬히 비난함으로써 미국의 지원에 보답했다. 그러나 원조금은 모두
도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도의 인권탄압은 더욱 심해져갔다. 특히 도를 제거하려는
군사쿠데타가 실패한 후 쿠데타 주모자의 출신지인 북부지역을 탄압하자 이 지역
부족의 상당수가 국경을 넘어 시에라리온으로 탈출했다.
시에라리온에서 도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합한 것이 찰스 테일러였다. 찰스 테일러의
집안은 해방노예의 후예로 다른 부유한 미국계 라이베리아인이 그렇듯이 그 역시
미국에서 공부했다. 도의 쿠데타 후 라이베리아로 돌아온 테일러는 도 정권하에서
상당한 예산을 취급하는 정부요직을 맡기도 했으나 백만 달러 이상을 횡령하고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라이베리아와 미국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협정이
체결되어 있었고 찰스 테일러는 미국에서 체포되어 매사추세츠주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라이베리아로 송환되기 전에 감옥을 탈출한다. 테일러의
탈옥에 관해서는 감옥의 쇠창살을 톱으로 잘랐다는 설과 간수를 매수했다는 설 등이
분분하다. 몰래 서아프리카로 돌아온 테일러는 라이베리아민족애국전선(National
Patriotic Front of Liberia, NPFL)을 조직, 198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100여명의
무장반군을 이끌고 시에라리온에서 국경을 넘어 라이베리아로 들어오며 도 정권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이 14년간 지속된 라이베리아 내전의 시작이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해 지탱하던 도 정권은 냉전이 끝나면서 이용가치가 없어졌고,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자 홀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수도 몬로비아로 진격하며 계속
세력을 불린 찰스 테일러는 몇 달 만에 라이베리아를 접수하는 듯 했으나 1990년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평화유지군이 개입하면서 일진일퇴의 내전은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 도 대통령은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사실상 무정부상태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수차례 평화유지군, 반군, 부족들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지고 다시 깨어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내전은 25만 명의 라이베리아 인이 목숨을
잃고 더 이상 파괴할 것이 없어진 다음에야 이해 세력들 간의 타협에 의해 끝이 났다.
마침내 1997년에 실시된 선거에서 찰스 테일러가 압도적 다수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찰스 테일러가 당선된 것은 그가 가장 강력한 무장 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주면 라이베리아에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국민들이 기대했기
때문이지만 찰스 테일러가 당선된 뒤에도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찰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의 반군인 RUF(Revolutionary United Front)를
지원했다. 가나와 나이지리아는 1999년 찰스 테일러를 반군지원을 이유로 전범으로
기소했고, 미국과 영국은 라이베리아에 대한 경제지원을 중단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찰스테일러는 계속 RUF반군에게 다이아몬드를 받고 무기를 팔았고, RUF반군은
7000여명의 소년병들에게 마약을 먹이고 총을 들려주어, 이들이 무자비한 살육과
사지절단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았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찰스 테일러를
전범으로 기소했고, UN은 라이베리아의 다이아몬드와 목재에 대해 금수조치를 내렸고,
라이베리아 정부관리에 대해서는 해외여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한편 기니에서는 찰스 테일러에 대항하는 반군이 조직되었다. 반군들은 1999년
찰스 테일러 타도를 기치로 라이베리아 국경을 넘어 공격을 시작했고, 찰스 테일러는
기니의 반군지역을 공격하는 와중에 수 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런 종류의 소규모
전투가 계속되면서 반군들이 점점 수도 몬로비아로 접근, 2003년 3월에는 반군이
몬로비아 북부 10Km지점까지 점령했다.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자신의 전범혐의를 부인하며 시에라리온의 반군을 계속 지원해
온 찰스 테일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를 가나에서 계속했고, 서아프리카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항공모함을 라이베리아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찰스 테일러에
대한 사임압력을 넣었고 찰스테일러도 더 이상 버티다가는 반군에게 잡힐 것이 분명해지자
스스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03년 8월 나이지리아에서 평화유지군이 도착하자
안전을 확보한 찰스테일러는 나이지리아로 탈출했다. 이어 UN은 15,000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라이베리아의 치안을 확보하고 무장해제, 군대해산조치에 들어갔다. 이것은
UN이 수립된 후 최대 규모의 평화유지 활동이다. 이어서 과도정부가 수립되고 2005년
가을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일정이 정해진 것이다.
전쟁이 남긴 것
14년간의 내전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다.
발전시설이 파괴되어 라이베리아 전역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도심지의 신호등은
녹이 슬고 새들이 안에 둥지를 틀어놓고 있었다. 부자들은 경유를 사용하는 발전기를
사용하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전기 없이 살고 있었다. 밤에 양초라도 마음 놓고
켤 수 있는 집은 좀 나은 편이고 많은 주민들이 그냥 어두운 채로 살고 있어 밤이
되면 도시는 말 그대로 암흑천지가 되어버렸다.
유선전화망도 모두 파괴되어 버렸고 통신수단은 론스타 등 외국 무선통신사업자의
핸드폰이 유일했으나 이나마도 통신상태는 매우 불량해 시 외곽은 말할 것도 없고
시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통화가 안 되는 곳이 많았다.
상수도도 없어 라이베리아의 젊은이 중에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역시 발전기를 운영할 정도의 재력이 되는 사람만이
집근처에서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하수를 대규모로 퍼 올려
가정에 파는 물장수는 젊은이들이 많이 하는 일중에 하나였다.
이런 상황이니 산업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실업률은 85%에 달해
거리에는 그저 할 일없이 오락가락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났다.
주택문제도 심각했다. 내전기간동안 반군을 따라 전투원으로 수도
몬로비아까지 올라온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대로 몬로비아에 남았다. 자신들이 원래
살던 마을은 모두 파괴되어 숲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갈 곳이 없고 고향으로
가도 먹고 살 방법이 없고 돈도 없으니 차라리 구호품이라도 받을 수 있는 몬로비아가
훨씬 살기에 낫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몬로비아 곳곳의 폐허 같은 건물 속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특히 건설
중에 버려진 정부 건물들은 거대한 아파트였다. 국방부 건물로 짓다가 버려진 건물,
복지부 건물로 짓다가 버려진 몬로비아 시내의 5층짜리 건물들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몇 명이나 사느냐고 했더니 한 건물에 3000여명이 산다고 했다. 이런 폐허라도 방을
차지하고 있으면 나은 편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냥 대충 복도에서 자는 식이었다.
건설 중 내전으로 버려져 콘크리트뼈대만 남아있는 건물에 살고 있는 모세스 깁슨을
만났다. 그는 2002년부터 여기서 살았다고 했다. 테일러 부대에서 10년 이상을 복무했다는
그는 문도 없는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복도에서 구멍가게를 하며 살고 있었다. 상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는지 궁금할 정도였는데, 취재진을 안내해 준 현지인은 이 중에 하루
2끼이상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지붕이 있는 곳에
사는 사람은 나은 편이다. 인구의 20%가 벽이 없는 곳에서 잠을 잔다고 했다. 라이베리아가
열대지역인 것이 다행이었다.
취재과정
모든 인프라가 파괴된 상태이니 취재는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벨기에 브뢰셀을 출발한 SN 브뢰셀 항공이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에서 기름을
넣고 승무원을 교대한 후 다시 이륙해 몬로비아 공항에 도착, 계단을 내려오니 오후
8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후끈한 열기가 얼굴로 확 올라왔다. 플래쉬 불빛의 안내를
따라 활주로 옆을 걸어 도착한 출입국사무소는 60년대 한국의 읍내 버스터미널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입국심사를 위해 줄을 서려고 하는데, 한 미국인이 다가오더니 자신을 마이크라고
소개하며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냐고 물어왔다. 그렇다고 했더니 취재진을 마중 나오기를
했던 조선생은 교통사고가 나서 자신이 대신 왔다고 했다. 조선생은 라이베리아에
살고 있는 몇 명안되는 한국인중 유일하게 취재진을 안내해 주겠다고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공항으로 오던 조선생부부가 캄캄한 밤길에 도로위에 고장난 채 방치되어
있던 트럭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충돌해 부인이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전기가
없는 나라이니 공항과 시내를 연결하는 도로에도 가로등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수 밖에. 영국계 건설회사 소속으로 민간경찰업무를 담당하는 마이크가 마침
지나가다 발견한 것이 다행이었다. 둘이는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마이크 일행이
조 선생 부부를 병원으로 옮기고 조 선생의 부탁으로 취재진을 마중하러 온 것이라고
했다. 갑자기 어떻게 취재를 풀어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앞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출입국관리는 여권을 펴고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못 알아듯는 척하고 가만히 있으니 계속 손가락을 비비며 “스몰,
스몰” 이라고 했다. 조금만 달란 뜻이리라. 얼마를 주어야하나 생각하다 10달러짜리를
주니 입국도장을 쾅 찍어준다.
마이크와 함께 병원에 가보니 부인은 얼굴을 10바늘을 꿰맸다는데 윤곽을 알 수
없게 퉁퉁 부어있고, 온 몸에 유리파편이 박혀 피투성이였다. 다행히 조 선생은 경상이어서
움직이는데 어려움은 없었지만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사관도 없고 한국인도 거의 없고 의료시설도 빈약한 나라에서
대형사고를 당했으니 막막했으리라.
일이야기는 꺼낼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냥 몸조리를 잘 하시라고 말하고 병원을
나왔다.
다시 마이크가 운전하는 차에 탔지만 갈 곳이 없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조 선생에게 호텔예약을 부탁했었는데 조 선생은 호텔은 치안이 안 좋아 위험하니
자신의 집에 묵으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조 선생이 입원을 했으니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마이크에게 호텔소개를 부탁하니 마침 자신의 막사에 빈 침대가 있으니 오늘
밤은 그곳에 묵어도 좋다고 했다. 일단 하루는 그 곳에서 자기로 했다. 텍사스가
고향이라는 마이크는 미군으로 한국에 근무한 적도 있고 당시 한국여성과 결혼해
잘 살고 있다며 취재진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마이크의 막사에서 맥주 한 캔을 얻어 마시고 담요도 없는 맨 매트리스에 누우니
이틀에 걸친 20여 시간의 비행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았다.
안내를 해주겠다던 조선생은 병원에 있고, 처음 와보는, 아는 사람도 전혀 없고
모든 것이 망가진 나라에서 어떻게 취재를 할 지 난감했다.
다음 날 아침 조 선생이 전화를 걸어, 자기 대신 우리를 안내해 줄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하더니 오후 늦게 현지 라디오 방송사 사장을 만날 수 있게 주선을 해주었다. Love
FM 사장인 필리버트 브라운씨는 전직 국방차관출신이었다.
내전의 막바지에 조선생의 얼음공장 부근이 시가전의 중심지가 되었을 때 브라운사장이
조선생 가족을 피신시켜 주었고, 발전기사업도 하던 조선생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브라운의 집에 발전기 2대를 설치해준 것이 인연이었다.
브라운씨는 운전기사와 차를 한 대 쓸 수 있게 주선해주었고 처음 하루는 시간을
내서 함께 다녀주었다. 다음 날부터는 자신은 시간이 없다며 라디오 토크쇼 DJ를
한 명 소개해주었다. 제로이(Jeroy)라는 이름의 DJ는 오전 11시까지는 생방송을 하고
그 뒤부터 함께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11시전에는 가이드 없이도 할 수 있는 촬영을
하고 11시 이후에는 가이드의 안내가 필요한 촬영을 하는 식이었다.
제로이는 오랜 방송생활 덕에 발도 넓고 눈치도 빨랐다. 우리가 어떤 내용을
취재하고 싶다고 하면 누구를 만나고 어디로 찾아가야하는지 얼른 생각해내고 금방
선을 대었다. 정상적인 취재상황이라면 미리 전화를 해서 섭외를 하고 약속시간을
정하는 것이 순서겠지만 유선전화는 아예 없고 무선전화는 연결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아 무작정 찾아가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다행히 이런 무작정 찾아가기 방법이 성공률이 높았다. 일단 취재대상을 만날 수만
있으면 거의 성공이었다. 제로이가 우리를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라고 소개하면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시간을 내 주었다. 또 미리 연락을 해야 할 경우에는 브라운씨가
인맥을 이용해 핸드폰 번호를 금방 알아내주어서 연락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수도 몬로비아는 인구 100만 명 정도의 크지
않은 도시였지만, 도로가 엉망인 곳이 많이 차가 빨리 다니기는 어려웠다. 길이 움푹움푹
파여 있는 곳은 보통이고 심지어는 맨홀이 뚜껑도 없이 입을 벌리고 있는 곳도 있었다.
또 차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도로를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는 좌판들과 계속 도로
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무법에 가까운 택시들로 교통상황은 엉망이었다. 교차로에서
한 번 차가 엉키면 2,30분을 기다려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도 약속시간에 2시간 정도 늦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저녁 6시정도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해가 지고 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전기가 없으니 조명을 켤 수가 없어 야간 촬영은 당연히 할 수 없고 밖에 나가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주위의 이야기였다.
오랜 전쟁으로 사람들이 심성이 황폭해지기도 했고 높은 실업률로 거리에는 일없이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넘치는데, 그 중에는 외국인을 노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했다. 더구나 시중에는 회수되지 않고 있는 총기가 엄청나게 많을 것이라고 했다.
소년병
라이베리아의 실업률은 85%에 달한다. 산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자리가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더구나 내전기간동안에 학교도 다 문을 닫고 있었으니
문맹률도 높고 특히 젊은층의 문맹률은 65%가 넘는다.
젊은이들 중에는 10대 초반에, 심지어는 10살도 되기 전에 전투원으로 전쟁에
가담한 소년들도 많았다. 바로 소년병들이다. 소년병은 반군과 테일러군에 모두 있었다.
소년병들은 전투원이 모자라는 양측진영이 미성년자들을 징발한 경우도 있지만 일부는
호구지책으로 자발적으로 전투원이 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오랜 내전 중에 전투를 치르며 성인이 되어버리기도 했고 전쟁이
끝났을 때에도 여전히 미성년자인 경우도 있었다. 미성년 전투원은 유니세프에서
관리하면서 교육시키고 철저히 보호하고 있어 접근이 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실제
총을 들고 어른들이 시킨 마약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던 이들 중에는 살인중독에 걸린
아이들도 있어 정신치료가 필요한 아이들도 상당수 있다고 했다.
어른이 된 전투원들도 학교교육이건 직업교육이건 교육받을 기회를 놓친 것은
마찬가지. 유엔평화유지군은 총기반납을 유도하기위해 총을 가져오는 과거 전투원들에게는
미화 $300을 지급하고 우선적으로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300은
라이베리아에서는 공무원의 한 달 급여가 넘는 금액이어서 3만정이상의 소총과 로켓발사기등이
반납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회수되지 않고 남아있는 총기가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다만 덥고 습기가 많은 날씨 때문에 감춰놓은 총기들이 몇 주만 지나면 녹이 슬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위안이 되는 상황.
20살을 훌쩍 넘긴 과거 전투원 중에는 다시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기로 한 사람들도
있지만 어린 학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기보다는 직업교육을 받기로 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기자명단에 올려놓고 한참을 기다려야하는 상황이다.
몬로비아 교외의 몬로비아 직업훈련소(Monrovia Vocational Training Center)를
찾았다. 원래는 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직업훈련을 시키던, 라이베리아 최대
규모의 직업훈련소라는 이곳은 넓은 터에 건물만 남아 있을 뿐 교육시설이라고 할
만한 곳은 거의 없었다. 양재과에는 재봉틀이 몇 대 남아있는 정도이고, 토목,
건축과에서는 진흙을 개어서 나무틀에 넣고 두들겨 벽돌을 찍어내고 있었고, 자동차
정비과에는 거의 껍데기 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는 자동차 1대가 유일한 실습도구인
정도였다. 한 때는 라이베리아 최대의 시설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내전 기간중 반군이건,
테일러군이건, 폭도화한 주민들이건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뜯어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곳에 들어오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고 했다.
취재진을 안내해 준 모리스 카이네시스 국장은 정말로 자신의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는 듯 했다. 한국은 잘 사는 나라이니 훈련소를 좀 지원해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그러겠다고 했는데, 이틀 뒤 취재를 위해 이동 중 빵빵거리며 뒤에서
?아오는 차가 있었다. 차를 세우고 보니 바로 카이네시스 국장이었다. 노란 서류봉투를
내미는데 열어보니 지원희망품목이 3쪽에 걸쳐 가득 적혀 있었다. 그중 자동차정비과의
요청사항만을 예로 들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자동차정비교재, 시청각자료, 작동 가능한 엔진, 트랜스미션, 브레이크, 충전기,
훈련용 중고차 1대 이상.
카이네시스 국장은 취재진을 만나기 위해 몬로비아 시내를 하루 종일 무작정 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발 이런 것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한국의 기관에 꼭 전달해 달라고
했다. 공항 입국시 노골적으로 돈을 달라던 출입국 관리와 함께 라이베리아 취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공무원이다.
취재 중 만난 전투원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조셉 듀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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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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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3년 내전이 막바지일 때 촬영된 사진의 주인공으로 꽤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수소문해 그를 찾아갔다. 동네에 가서 사진을 보여주니 주민들이 바로 사는 집을
알려주었다. 현재 31살이라는 그는 테일러군에서 대테러부대를 지휘하는 준장이었다고
했다. 군대에서 10년 이상을 보냈다는 그는 온 몸이 화상과 관통상의 흉터 투성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 살 된 아이의 아버지였고 중병을 앓고 있는 아내의 남편으로 하루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는 처지였다.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직업은 없는 상태,
요즘 중학교 2학년과정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지난 세월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니
“지난 20여 년 동안 동물처럼 살았으니 이제는 인간답게 살고 싶다”
고 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니 그냥 어깨만 한 번 으쓱한다. 라이베리아에서
미래를 말하기는 아직은 이른 모양이다.
대부분의 전투원들이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다. 다만 다행이라면 어는 편에서
싸웠건 이제 서로 간에 적대감은 없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이베리아 선거, 왜 관심인가?
그리고 마침내 선거가 실시된 것.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다만 누가 더 적임자인가가
문제였다. 두 후보의 지지층은 분명하게 나누어졌다. 죠지 위아를 지지하는 층은
저학력, 저소득의 젊은층이었고, 특히 소년병출신들은 거의 죠지 위아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그동안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라이베리아를 망쳤으니
높은 학력이 대통령이 되는데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 유니세프 친선대사를 경험했으니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반면 엘렌 존슨 설리프 지지자들은 상대적으로 고학력, 중장년층이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려면 어느 정도 학력도 필요하고 국정운영 경험도 있어야한다는 것이 이들이
주장. 엘렌은 도 정권의 부패를 고발하다가 도의 탄압을 받았고 한 때 반군의 우두머리인
찰스 테일러를 지지했으나 테일러가 집권한 뒤에는 테일러에게 반역죄로 몰려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경력 때문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라이베리아 정치인들 중에는
드물게 청렴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엘렌 지지지들 사이에서는 죠지 위아를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더구나 일차투표에서 탈락한 후보중 부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정치인들이 죠지 위아 지지를 선언한 것이 오히려 죠지 위아에게는 해가
되었다. 죠지 위아가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죠지 위아를 당선시킨 후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선거전은 대중유세와 라디오 연설 위주로 진행되었다. TV채널이 하나 있지는 하지만
자체제작능력은 거의 없어 CNN이나 BBC를 위성으로 받아 송출하거나 VHS로 촬영한
내용을 편집하지 않고 방송하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라이베리아유일의 이 TV방송의
소유자가 바로 죠지 위아였다. 죠지 위아는 자기 소유의 TV를 선거에 최대한 활용했는데,
내용은 거의 선전, 선동수준이었다. 상대 후보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는데, 아마 TV보급률이 너무 낮기 때문에 무시해도 될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세장은 항상 광적일 정도의 축제분위기였다.
음악과 리듬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율동이 나오는지라, 항상 춤을 추고 있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고 시가행진 중에도 반은 춤을 추며 걷고 있었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충성도는 거의 맹목에 가깝다고 할 정도였다. 특히 죠지 위아 지지자들의
열기는 옆에 서 있기가 무서울 정도로 광적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물어보면 엘렌 지지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반면 지지후보를 밝히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죠지
위아 지지자였다.
두 후보가 미디어를 상대하는 방식도 크게 달랐다.
특히 라디오 토론에서 죠지 위아가 몇 번의 말실수를 한 후 죠지 위아 진영의
선거전술이 많이 바뀌었다.
엘렌은 세계 각국 미디어의 인터뷰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했고 인터뷰를 할 때에도
미디어를 잘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취재진은 도착한 다음날 인터뷰 요청을 해두었는데,
이틀뒤에 하자는 연락을 금방 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는 이태리의
RAI-TV가 인터뷰를 먼저 하고 있었고, 이어서 MBC가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30분을
할애 받은 취재진이 인터뷰를 마칠 즈음에는 프리랜서 다큐멘터리제작자와 아사히신문
기자가 약속된 인터뷰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LOVE FM의 브라운 사장이 죠지 위아 인터뷰를 위해 인맥을 동원해 섭외에 나섰지만
죠지 위아 측에서는 아예 가타부타 대답을 보내주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죠지 위아가 인터뷰만 하면 말실수를 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인터뷰를 참모들이 못하게
막고 있다고 했다.
선거 다음 날 무작정 죠지 위아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앞에는 지지자들과 수행원, 경호원 등 30여명 모여 있었다. 인터뷰요청을 했더니
지금은 죠지 위아가 낮잠을 자고 있으니 2시간 뒤에 오면 할 수 있다고 했다. 2시간
뒤에 가니 아직도 자고 있으니 저녁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내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죠지 위아는 이런 식이었다. 일대일 인터뷰는 하지 않았고,
공동기자회견에서도 질문에는 거의 참모들이 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선거, 그 후
선거는 매우 평온하게 진행되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국 3000여개 투표소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배치되었지만
우려할 만한 사태는 없었다.
엘렌이 투표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새벽에 엘렌의 집으로 가니 20여명이 담벽에
기대어 있었다. 여기서 밤을 새웠다고 했다. 열렬한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밖에서
그냥 밤을 새운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문이 열리고 엘렌이 투표하러가는
차가 나오자 지지자들이 차를 에워싸고 계속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보니 투표장까지 가는데 교통편이 없으니 차를 태워달라는 것이었다.
“당신을 찍으러 투표하러가는 것이니 차를 태워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 이들이 논리였다.
태워줄 차도 없거니와, 엘렌은 24시간 경호원이 붙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지만
이런 것들이 그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결국 엘렌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그들에게 교통비를 나눠주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투표소에서 만난 유권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경제를 살릴 사람을 원한다고 했으나, 구체적으로 누구를 찍었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오랜 전쟁으로 몸에 밴 방어본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신시설과 도로부족으로 선거결과가 확정되려면 1주일은 걸린 것이라는 예측이었으나
라이베리아인들이 높은 관심을 반영한 듯, 선거후 이틀이 지나자 엘렌의 당선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죠지 위아측에서는 즉시 부정선거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일부 투표함에서 유권자수보다
많은 투표용지가 나왔다는 것이 죠지 위아측의 주장이었으나 사람들은 대체로 무관심했고
대세에는 지장 없다는 반응이었다. 유엔이나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의 선거감시단도
이번 선거가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라는 성명을 내놓았다.
죠지 위아 지지자들은 선거를 다시 해야한다며 가두 시위를 했는데 그들이 최종
목적지는 미국대사관이었다. 미국대사관 앞에 모인 시위대는 몇 번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자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일부 시위대가 죠지 위아가 속한
CDC정당 당사까지 행진을 하기는 했지만 별 소란은 없었다.
최종결과는 엘렌 존슨 설리프 59.4%, 죠지 위아 40.6%득표였다.
부정선거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죠지 위아 맹렬지지지외에는 거의 없는 듯 했다.
그렇지만 죠지 위아 지지자 수 백명의 시위는 한 때 경찰과 대치할 정도로 과격해
지기도 했으나 그냥 한 번 화풀이를 해보는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죠지 위아는 부정선거
여부를 법정에서 다투겠다고 했다가 이내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이마저도 그만 두겠다며 슬쩍 꼬리를 내렸다.
대통령당선자가 된 엘렌은 취임식도 하기 전에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유는 중국에 경제원조를 부탁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라이베리아에서 가장
큰 외국공관은 미국대사관이고 다음이 중국대사관이다. 중국이 개발도상국에 외교적으로
착실하게 투자하고 있는 것은 종종 느끼는 바이었지만, 라이베리아에서 그런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엘렌은 선거공약으로 6개월 안에 수도 몬로비아에 전기가
들어오게 하겠다고 했고, 중국은 전기시설을 복구시켜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엘렌의 중국방문은 그 약속에 감사함과 동시에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노혁진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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