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발리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0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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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 폭탄 테러 취재리포트-발리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 경찰

△ 검문

△ 테러현장

△ 짐바란 테러현장

△ 부상자 핸드릭

2005년 10월 1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자살 폭탄테러가 발생했다. 발리 1차 테러가 발생한지 3년만에 재현된 폭탄테러. 3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폭탄테러로 인해 23명이 사망하고 백 여명의 부상을 하였다. 부상자들중엔 한국인 관광객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무사히 국내로 돌아왔다. 신들의 땅이라 불리 우는 발리가 이렇듯 피로 물들고 있다.  

취재진이 발리를 찾은 건 테러 발생 후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우선 발리의 사건현장을 찾았다. 폭탄테러가 일어난 곳은 두 곳, 시내번화가인 쿠타와 해변가인 짐바란이었다. 현지는 많이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거리의 모습이나 휴양객들의 표정에서 테러의 공포를 읽기는 어려웠다. 단지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무장경찰을 통해서 테러가 일어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쿠타의 레스토랑은 테러의 잔해들을 치우느라 한창이었다. 레스토랑은 합판으로 가리워진 현장과 검게 그을린 지붕, 그 앞에 추모객들이 놓고 간 꽃들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막혀 있는 문을 살짝 열자 여전히 그을음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 앞을 지나는 관광객들은 현장 앞에서 연신 카메라를 눌러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은 테러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어린 것이었다. 어느덧 폭탄테러현장은 또 다른 관광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현장에서 잔해를 치우는 레스토랑 종업원들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폭발당시 현장에 있었던 몇몇 직원들은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때문인지 여전히 두렵고 격앙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주위 상인들이나 관광객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별다른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아마도 누구나 테러의 목표가 될 수 있는 테러의 모호함이 생각하기에 따라선 모두가 타켓이 아닐 수도 있다, 즉 난 테러의 목표가 아닐 것이다라는 생각때문인 듯 했다.

짐바란 해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해변을 거니는 관광객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고가 났던 해변의 식당은 한동안 문을 닫았다고 했다. 힌두교의 특성상 힌두교식 추모식을 치르고 나서야 문을 다시 연다고 했다.

썰렁한 해변엔 꽃다발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사고 당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몰린 발리의 상라병원, 취재진이 찾았을 때는 대부분의 희생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영안실에서 고국으로의 이송을 기다리고 있는 호주관광객의 시신1구와 쿠타레스토랑에서 부상을 당해 입원중인 핸드릭. 올해로 18세인 그는 폭발이 있었던 레스토랑에서 일한지 이틀째였다.

폭발당시 머리에 박혔던 두 개의 파편을 제거하고 전날에야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같이 있는 가족들은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폭발의 후유증으로 귀가 잘 안들리고 기억을 잘 못한다고 했다.

또 다른 테러피해자들을 찾아 나섰다. 실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함이었다. 대부분이 퇴원한 상황,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거라곤 병원에서 받은 희생자들의 이름과 주소뿐, 현지 운전기사와 함께 인근지역을 헤매며 수소문한지 반나절이 지나서야 겨우 부상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 역시 내 예상을 많이 빗나갔다. 그 날을 별로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부상을 당한 것이 그다지 억울하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 비록 부상을 입었지만 테러의 목표가 자신들과 같은 발리의 힌두교주민들이 아닌 관광객이기 때문에 테러와 자기들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발리는 주민 대부분이 힌두교이고 테러 희생자들중에도 많은 수가 현지 힌두교주민들이지만 그간에 종교적인 갈등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주민들 스스로 본인들을 노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발리에서 2시간여 떨어진 기안얄지역을 찾았다. 이 곳에는 1일 테러로 희생된 故이와얀씨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이와얀의 집에는 아버지와 故이와얀씨의 아내 그리고 1살된 딸이 있었다. 故이와얀씨는 레스토랑 근처에서 숙식을 하며 생활비를 벌어 보내는 이 집의 가장이었다. 사고 당일에 집으로 가족을 보러오겠다는 이와얀씨에게 피곤할텐데 그냥 발리에서 쉬라고 했다고 했다. 그 얘기만 안했더라도 남편이 희생을 안당했을지 모른다며 아내는 울먹였다. 아직도 밤이면 남편과 같이 있던 행복한 꿈을 꾼다고 했다. 아직 남편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아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같다고 했다. 그의 1살박이 딸 역시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만 들려도 아빠가 오는 줄 알고 밖을 돌아본다고 했다.

△ 희생자 무덤

△ 희생자 유품

△ 경찰발표

△ 용의자 몽타쥬

사고 후 그가 남긴 것은 폭발당시 주머니에 있던 휴대전화와 결혼반지뿐이었다.

갑작스런 가장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슬픔이기에 앞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막막함이었다.

현재 이와얀씨는 집근처 공터에 묻혀 있었다. 막 덮은 듯한 생흙과 추모화환만이 그 자리가 무덤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원래 힌두교식으로라면 화장을 해야하지만 많은 비용이 드는 힌두교식 화장의 특성상 갑작스런 죽음앞에 그 걸 준비할만한 사정이 못되어 임시로 가매장해둔 상태였다. 아내가 딸에게 아빠에게 인사하라고 얘기했지만 딸은 왜 화환에 대고

맨 땅에 대고 아빠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직 전혀 이해하지 못해 칭얼댈 뿐이었다.

매일 4시에 열리는 경찰 측 발표가 있었다. 발리 지역 경찰청을 찾았다. 일주일이 지난 뒤였지만 프레스센터에는 약 10여명 가량의 현지 취재진이 경찰의 공식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경찰이 파악한 용의자는 총 세 명. 용의자들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다른 희생자들과 달리 머리만 남은 시체의 형태가 자살폭탄테러용의자임을 가늠케 하고 있었다.

현재 외신을 통해 용의자의 배후로 제마 이슬라미야(JI)가 지목되고 있는 상황. 제마 이슬라미야는 범 이슬람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이슬람 무장 세력이다. 경찰에게 사실여부를 물었다. 경찰은 강하게 부정했다. 사건이후 경찰에서는 그러한 발표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2000년 1차 테러를 JI가 본인들의 소행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그 후 여러 테러에서 JI의 연관성을 조사 중이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외신의 추측성 보도에도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번 테러조사의 책임자는 본인이며 본인이 얘기한 것만이 사실이고 그것만 보도하라는 얘기였다.

경찰수사는 머리만 남은 사체 상태로 인해 신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모호했다. 단지 인종을 추측하기 위해 DNA검사를 진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범인들의 머리가 남아 몽타쥬를 통해 제보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나마도 그간의 여러 테러사건에서 보듯이 쉽진 않아 보였다. 취재당시에는 범인들과 같은 곳에 머물렀다는 공범용의자를 체포했으나 조사결과 별다른 혐의점을 못 찾아 풀어주고 이후 2명의 또 따른 용의자를 체포해 조사중인 상황이었다.

△ 3주년 추모식

△ 추모비

△ 주민시위

△ 시드니 존스

△ FPI

△ FPI 지도자 알 하빕

10월 12일 쿠타지역의 광장, 2000년 1차 발리폭탄테러 추모비가 서있는 곳이다.

그곳에선 테러3주년을 맞아 3주기 추모식을 열리고 있었다. 광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번의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했다. 라마단기간의 추가테러에 대한 우려때문인지 한층 긴장감이

흘렀다. 삼엄한 경계속에 추모인파들이 속속 도착했다. 호주 외무부장관을 비롯한 정부인사들뿐 아니라 가족, 친구를 잃은 추모객들도 보였다. 희생자의 대부분이 호주인인 탓에 추모객의 대부분이 호주인들이었지만 그 중엔 머리에 흰 두건을 둘러쓴 인도네시아인 희생자가족도 볼 수 있었다. 몇몇 가족들은 나이트클럽 자리에 촛불을 켜거나 꽃을 놓아두기도 하였다. 테러현장은 재건축을 모두들 꺼려 여전히 공터로 남아 있었다.

그 날 오후 발리에서는 희생자가족들과 발리주민의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폭파범 3명의 즉각적인 사형집행을 요구하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케로보칸의 교도소에 난입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당국은 보안을 이유로 케로보칸에 수감 중이던 이들을 하루 전인 11일 자카르타에서 400㎞ 떨어진 누사캄방간 섬의 교도소로 이송했으며 이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바로 해산됐다. 테러범들의 조속한 사형집행을 요구하는 시위는 최근 수차례 열렸으나 이날 시위는 가장 규모가 컸고 시위대가 교도소에 진입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이 이토록 강력한 건 이번 2차 테러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발리테러의 전반적인 상황을 듣고자 자카르타의 국제위기그룹을 찾았다. 국제위기그룹은 위기예방 기구로서 폭력과 갈등의 원인을 분석하여, 위기를 막거나 줄이고 정부나 기부자들에게 정책입안을 하고 있는 민간단체. 동남아시아 지부는 아체, 파푸아 분리문제, 암본과 포소에서 종교 갈등, 칼리만탄에서의 인종문제등으로 인해 2000년 설립됐다. 이번 테러와 관련해서도 코멘테이터로서 가장 많은 외신의 집중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번 사태의 배후가 누구일지 물었다.

“여러그룹이 섞여있고 지도자인 제마 이슬라미아와 노딘 모하메트 탑과, 아사리 후세인등 두명의 말레지아인도 관련됐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은 조사결과를 기다려야 할것이다. 제마 이슬라미아가 활동할 좋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모든 테러범들이 전부 제마 이슬라미야라고 생각진 않는다. 특정 작전 팀을 어떻게 짜는가를 봐야 한다. 왜냐하면 두 명의 제마 이슬라미야가 폭탄 테러를 계획할 때 외부단체에서 사람을 데려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시드니 존스/국제위기그룹 동남아지부장

그렇다면 이슬람 단체의 생각은 어떨까. 평소 강경한 입장과 행동으로 이슬람 닌자라고도 불리우는 강경단체 FPI를 찾았다. 테러배후로 지목되는 제마 이슬라미야에 대해 물었다.

“사실 소위 JI라고 하는 제마 이슬라미야 조직은 미국과 그 우방국들이 만들어낸 가공의 조직일 뿐입니다. 제마라는 단어는 ‘공동체’를 의미하며 이슬라미야는 말 그대로 이슬람교를 뜻합니다. 따라서 제마 이슬라미야라는 말은 ‘이슬람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국민의 대부분이 회교도인 인도네시아 국민이 제마 이슬라미야인 것입니다.

3년전의 발리 폭탄테러 용의자의 종교는 이슬람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만행은 이슬람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의도와 계획인 것입니다.“

-알 하빕/FPI 지도자

폭탄테러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FEI는 팔레스타인과 같은 전쟁터에서 아이가 몸에 폭탄을 지니고 이스라엘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 터트리는 행위는 지지합니다. 목표가 확실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나쁜 일을 저질렀고, 테러리스트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장이나 레스토랑에 폭탄을 터트리는 것은 안됩니다. 인도네시아는 전쟁국이 아닙니다. 발리폭탄테러나 꾸닝안에서 일어났던 폭탄테러등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탄테러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의 17살 소녀의 사례를 들겠습니다. 수년전, 한 소녀는 폭탄조끼를 착용했습니다.  그렇게 무장한 그녀는 레바논에 주재한 미군기지에 쳐들어가서는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그 폭탄폭발로 인하여 230명의 미해병들이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하드인 것입니다. 공격목표대상은 바로 적군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시장, 레스토랑, 일반주택단지,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불특정 다수를 살상 대상으로 삼는 이것은 지하드가 아닌 바로 자살폭탄테러인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테러 배후에 대한 또 다른 주장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발리폭탄테러의 배후세력이 오히려 호주가 아닐까 의심이 갑니다. 제가 발리 폭탄테러 배후세력을 호주로 지명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호주는 인도네시아의 국내정세 이해관계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하도록 조정을 함으로서 인도네시아가 서방 국가나 호주에 그 도움을 의탁하도록 만들기 위함인 것이죠.

둘째, 폭탄테러가 발생하도록 함으로서 폭탄테러의 배후세력으로서 현재 수감 중인 제마 이슬라미야의 정신적 지도자인 바시르의 형량을 더 가중시키도록 만들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번 발리폭탄테러 때 자살폭탄 용의자로 주목받았던 사람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았던 장면 기억하시죠?  아직도 의문점이 제기되고 있슬니다. 어떻게 그 배낭을 짊어지고 다닌 그 사람을 용의자로서 카메라에 잘 담을 수 있었는지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그 비디오테이프는 촬영 후 호주로 보내진 후에야 인도네시아로 전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당신과 당신의 친지 가족들 혹은 친구들과의 파티가열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파티장소에서 어느 한사람이 파티에 나타난 한 사람을 표적으로 계속 카메라가 따라갔다고 봅시다.  마치 그 사람이 몸에 폭탄을 장착했다는 사실을미리 알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곳 발리에는 대규모의 마약 밀거래가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한 젊은이에게 1달러를 주면서 특정인에게 폭발물이 들어있는 비밀 가방을 전달해줄 것을 청탁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청탁을 받은 사람은 회교도로서 단지 돈이 필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발리 폭탄 테러 이후 더욱 현지의 경계가 강화되는 이유는 바로 라마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라마단은 아랍어로 '더운 달'을 뜻하는데 천사 가브리엘이 마호메트에게 <코란>을 가르친 신성한 달로 여겨, 이슬람교도는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5번의기도를 드린다. 이 기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뿐만 아니라 담배, 물, 성관계도 금지된다. 예로부터 라마단기간동안에 희생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전해지는데 일부 과격단체들이 이러한 것을 내세워 라마단 기간의 테러를 부추기거나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은 곳은 자카르타내에서도 조금은 엄격한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는 이슬람학교. 학교 곳곳에는 교복인듯 보이는 흰색 희잡과 전통복장을 한 학생들이 곳곳에 보였다. 평소라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지만 학생들은 저마다 수다를 떨거나 코란을 읽는등 나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라마단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느라 힘들지 않나요? 이미 익숙해졌어요.”

“금식은 왜 하세요? 금식은 이슬람 교리에 명시되어 있는 의무조항이며 금식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식당

△ 라마단

△ 라마단 저녁

△ 무슬림 주민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인도네시아 무슬림 모두에게 적용되는 건 아닌 듯 싶다. 취재기간내내 우리를 안내해준 ‘부디’라는 무슬림은 라마단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식사나 담배를 즐기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거리의 식당역시 모두 영업을 하고 있었다. 단지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놓았을 뿐이었다.

물론 외국인들의 식사를 위해서, 식사하는 외국인들을 보며 무슬림들이 유혹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이유도 있지만 가려진 커튼안에서 식사중인 많은 무슬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교리를 어기는 그들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한 이유도 있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내 무슬림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단적인 예였다.

학교내에는 꽤나 큰 규모의 예배당도 있었다. 하루에 5번 기도를 드려야 하는 무슬림의 생활습관상 무슬림 국가에는 학교뿐 아니라 곳곳에 이러한 예배를 위한 장소들이 마련되어 있다. 인도네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시가 가까워오자 곳곳에서 오토바이나 차를 이용해 학교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기독교와 달리 이슬람교는 금요일이 주일이다.그래서 금요일 12시에는 정기예배가 이루어진다.

도착한 사람들은 먼저 수돗가에서 손발을 씻는 것으로 예배드릴 준비를 시작한다. 어느새 예배당은 무슬림들로 꽉 들어차 버렸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예배당 바깥에 가져온 천들을 깔고 기도를 준비했다. 12시가 되자 마치 울음소리와도 같은 노랫소리가 퍼지며 기도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종교지도자의 기도말씀등 30분 가량의 행사가 이어 졌고 마지막 절을 끝으로 사람들은 하나둘 저마다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 갔다. 비록 중동계 무슬림들에 비해 조금은 개방된 분위기의 인도네시아 무슬림들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에는 종교에 대한 믿음과 전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라마단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왜 단식을 행하나요? 배고픔과 목마름을 참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같이 느낍니다. 단식을 하면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어떤지 함께 느끼는 것입니다“

적도의 석양이 붉게 물들며 하루의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무슬림들은 오히려 바빠진다. 해가 저문 후에야 비로소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낮 시간에 금식을 하는 탓에 라마단기간에 친구나 친지들과 모여 저녁을 함께하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또한 폭식을 하는 이유로 식료품소비가 오히려 늘어난다고 한다. 날이 완전히 저물자 마을 곳곳에선 이슬람기도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TV에서도 이슬람기도가 방송됐다. 그 소리에 맞춰 무슬림들은 기도를 올리고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는 공복에 부담을 덜기 위해 과일을 갈아 만든 쥬스같은 것을 먼저 먹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갖가지 빵을 비롯해 생선이나 야채류의 음식들을 즐겼다. 얼핏 보기에도 그들의 생활수준과 비교해 조금은 호사스럽다고 보이는 식사였다.

“단식 기간에는 먹지 않으면 식비가 절약되겠네요? 아닙니다. 낮에는 금식하고 마시지도 않지만 밤에는 먹을 수 있습니다. 라마단 기간이 아닐 때는 밥과 반찬만 있으면 되는데, 라마단 기간에는 과일도 있어야 하고 추가적으로 준비해야하는 음식이 있기 때문에 돈을 더 듭니다.“

이렇듯 이슬람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 개방된 인식과 삶을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 무슬림들. 그들의 테러에 대한 생각은 무엇일까?

“매우 슬픈 일입니다. 무슬림들은 그런 일을 하면 안되는데 유감스럽습니다. 테러를 저지른사람들이 아직 누군지 모릅니다. 무슬림인지 아닌지도 아직 모릅니다.“

배후를 이슬람세력으로 지목되는 것에 조금은 불만을 가지고 있는 듯 했다. 배후가 무슬림이 아니기를 바라는 듯도 보였다. 하지만 테러에 대해서는 더 이상은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처럼 테러의 배후는 무슬림이 아닐지도 모른다. 무슬림단체의 주장처럼 호주일수도 있고 호주의 주장처럼 제마 이슬라미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드러난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서로의 이해관계에 유리한 서로간의 억측만이 난무하는 상황. 테러의 목적도, 이유도 없이 테러가 남긴 것은 결국 억울한 희생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