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총을 든 붓다의 후예들(5월 20일 방송)
조회:

PD 취재리포트


총을 든 붓다의 후예들(정회욱PD 연출)

  
40년 군부독재로 국제사회 최악의 인권국가로 지목 받고 있는 국가, 미안마.
  오랜 불교국가의 전통을 간직한 이 나라에서 급기야 무장투쟁의 금기를 깨고 총을 든 학생과 승려,
  시민들.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 민주화투쟁은 오늘도 끝나지 않았다.
  정부군과 민주세력간에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태국-미안마 국경지대.  
  17년째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그곳을 W 취재진이 카메라에 담아왔다.


  
■ 끝나지 않은 전쟁, 그 전선에 가다

      
  
우리는 현재 미안마 국경지대의 전선 상황과 난민촌을 취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 취재가능 여부와 접근 경로를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버마민주화하는
  사람들을 통해 현 ‘ABSDF‘ 사무총장인 묘윈을 소개받았다.  그는 현재 태국-미안마 국경의
  인근도시 ‘메솟’시에 ABSDF 지부를 세우고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전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태국을 통해 국경을 넘어야 하며, 최근 태국 국경수비대의 검문이 강화돼 쉽지
  않을 거란 말을 전해 왔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국경의 인근도시 메솟, 그리고 메사리앙에
  이르는 600km의 차량 이동, 그리고 태국-미안마 국경을 가르는 살로윈 강을 거슬러
  배로 3시간.  그 과정에 어딜 가든 삼엄하게 국경으로의 접근을 통제하는 태국군과 경찰들을
  만나게 될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었다. 또, 그렇게 전선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취재진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을 거란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불안하고 위험한
  루트가 곧 유일한 로드맵이었고, 다음날 곧바로 짐을 꾸렸다.
  세계 최대의 곡창지대 매남 삼각주를 가로질러 방콕에서 메솟까지 8시간, 그리고
  메사리앙까지 5시간. 점차 국경지대에 가까워질수록 고산지대로 접어들었다. 아스팔트는
  사라지고 비포장 도로가 가는 길을 더디게 했다. 고개를 넘어설 때마다 태국 국경수비대는
  어김없이 차량을 세우고 검문을 했다. 방콕과 메솟에서 만난 묘윈과 ABSDF 멤버들은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관계로 동행할 수 없었다. 오로지 경유지 곳곳에서
  멤버와 멤버가 취재진을 기다리고 또 보내는 방식으로 최종 경유지 메사리앙에 도착했다.

검문하는 국경수비대. 여권사진과 얼굴을 대조하고,
가는 목적을 적고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을 가르는 살로윈 강.
         왼쪽이 미얀마고 오른쪽이 태국이다.


■ 국경 전선은 소강상태, 긴장은 더욱 강화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을 가르는 살로윈 강.  국경지대 고산족인 카렌족으로 위장한 취재진과
  ABSDF 멤버 2명은 카메라를 쌀자루에 숨기고 배에 올라탔다. 왼쪽은 미안마, 오른쪽은 태국.
  양쪽에서 태국 국경수비대와 미안마 정부군이 요란한 모터소리를 내며 강물을 헤쳐나가는
  우리 배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긴장과 초조 속에서 3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뱃길.
  서서히 강폭이 좁아지고 물살이 빨라질 무렵, 어느 한적한 모래언덕에 천천히 뱃머리를 붙였다.  
  드디어 취재진은 17년 간 지속되어 온 버마학생민주전선 베이스 캠프에 도착했다.

  먼저 취재진을 맞은 사람은 베이스 캠프의 대장 웨이링진. 그 또한 88년 이후 줄곧 이곳 전선을
  지켜온 장본인이었다. 그의 소개로 우리는 베이스 캠프와 6개의 경비초소를 돌았다. 2년 전부터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베이스 캠프도 삶의 터전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초소,
  초소마다 간단히 예불을 들일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예단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자비로운
  부처의 시선 아래서 그들은 총을 닦고, 총알을 장전했다. 그렇게 전선에서 느껴지는 경계심과
  긴장감은 여전히 캠프 주위를 감돌았다. 특히 작년 말 군부 내부에서 강경파가 새롭게 집권하면서
  이곳의 긴장감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해졌다. 때문에 주변 산악지역과 정글을 수색하는
  학생전사들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수색작전을 수행중인 학생전사들

  우리는 그곳에서 임시로 마련된 작은 절에 들러 다시 승복을 입은 ABSDF 멤버를 만났다.
  몇년 전 들었던 총을 내려놓고 승복을 입은 그는 만약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다시 총을 들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신의 마음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스님.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승복이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기꺼이 군복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 최악의 인권국가, 미안마의 미래는?

아웅산 수지 여사. 미안마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가는 곳마다
그녀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미안마의 반체제 지도자 아웅산 수지 여사. 그녀가 이끈
  NLD당이 지난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군부는 국회를
  아예 폐쇄시켰다. 미안마 국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해 오던 그녀는
  이듬해인 91년 노벨평화상까지 받게 됐지만 군부는 오히려 그녀를
  가택연금으로 가둬버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민주주의 수호와 자유를 위해 앞장선다던
  미국도, 서방세계도 유독 미얀마의 문제에만은 침묵했다.  
  그러는 동안 군부의 탄압과 폭력 앞에 미안마 국민들의 인권은
  더욱 유린됐고, 최악의 인권국가로 추락했다.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미안마 국민들은 나라를 등지고 또다시 국경지대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정부군과 민주화세력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 부근, 태국-미안마 국경지대에 대규모 난민촌이 형성됐다.
  10여 년 전부터 UN-ASIA의 도움과 태국정부의 승인을 받아 크게는
  4만 여명, 작게는 수천 명이 거주하는 난민촌이 생겨났고, 당연히
  태국군의 철저한 통제가 뒤따랐다. 때문에 미리 허가를 받지 않으면
  외부인은 절대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는 태국정부군의
  허가를 받아 베이스 캠프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멜라웅
  난민촌을 찾아갔다. 이곳이 생긴 것은 불과 1년. 하지만 벌써
                                             1300가구, 2만 여명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 중 ABSDF 멤버
                                             가족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192가구가 전선에 있는 아들과 남편을
                                             쫓아 이곳으로 들어왔다.

멜라웅 난민촌.
멀리 미안마 국경선 매너플로가 보인다.

  그들 집집마다에도 역시 작은 예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들은 예쁜 아이들을 둔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또 총을 든 전사였으며, 절실한 불교수행자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만난 절의
  주지스님도 현재 ABSDF 전사였다. 그들은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총을 들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가 되든 끝까지 투쟁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온전히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절을 지키는 승려는 그곳에 없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건
  그곳은 바로 절이었고, 또 전선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붓다의 온화한 미소와 조국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절묘하게 뒤섞여, 먼발치 국경선 너머로 메아리치는 듯 했다.

멜라웅 난민촌에서 만난 승려들. 그들은 모두 전사였고,  이곳 주지 스님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현재도 ABSDF 멤버다 


■ 40년 군부독재에 맞선 붓다의 후예들

  인구의 90%가 붓다를 섬기는 불교국가 미안마.  우리에겐 ‘버마’라는 국호로 더 오랫동안 불려왔던
  이 나라가 ‘미안마’라는 새로운 국호로 국제사회에 불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8년. 서울에서는
  전두환, 노태우 전, 현직 대통령이 올림픽의 개회를 알리며 축제가 한창이던 그 때, 버마에서는
  25년 군부독재에 항거한 대규모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랭군의 봄’으로 불리는 학생,
  승려, 시민들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  그러나 그들은 승리를 목전에 두고 소몽 장군이 이끈 새로운
  군부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 해 9월, 25년 독재의 주범, 네윈 군부의 사주를 받은
  소몽 장군은 시위대를 유혈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곧바로 국호를 ‘미안마’로 개정,
  공포하며 새로운 군부의 탄생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전통적 불교국가로, 영국의 식민지배 시절부터 비폭력 독립운동과 시위를 고집했던 그들은
  결국 군부에 맞서 총을 집어들었다.  학생은 펜을 놓았고, 승려는 승복을 벗었다. 농민들은
  삶의 터전을 포기하고 국경지대 전선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미얀마’란 국호를 거부하고
  ‘ABSDF(ALL BURMA STUDENTS DEMOCRACY FRONT)-버마학생민주전선’이란 이름을 내걸며
  15개 지역부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펜 대신, 염주 대신, 괭이 대신 총을 들었다. 17년이 지난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민주화 세력과 군부간의 유혈전투는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