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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Issue - 우즈베키스탄의
핏빛 5월(이동희PD)
키르키스탄의
수도 비쉬켁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시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다시
비포장 도로로 4시간 거리인 국경도시 잘랄라 바드로 향했다. 잘랄라바드는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난 우즈벡의 안디잔에서 차로 1시간 30분거리,
안디잔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국경에 인접한 도시이다. 13일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이 벌어지고 난 직후 대략 500명의 우즈벡인들이 그
밤 진압군의 총격을 피해 달아나 국경을 넘어 잘랄라바드의 국경지역
바리쉬로 탈출했다.
취재진은 그들을
만나기위해 국경으로 달려가고 있다. 잘랄라바드에서 비포장도로로 다시
1시간 가량을 차로 달려가는 동안 길을 따라 좌측으로 우즈벡 국경지대가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로 샤르한사이 강이 길게 흐른다. 우즈벡의
유혈사태가 전세계로 타전된 지도 1주일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소한의 진실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지, 그들은 왜 시위를 해야만 했는지.....
우즈벡 정부는
모든 외신에 비자 발급을 거부하고 있으며 현지에 있는 특파원들조차
취재, 촬영 금지 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최초 안디잔에서 취재를
계획하던 취재진도 우즈벡 정부의 비자발급을 거부로 우즈벡 인접지역인
이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다. 현재로선 이 난민촌의 생존자들만이
그날의 진실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다.
난민촌을
들어가는 일은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여기가 우즈벡인지 키르키스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입구부터 통제가 심하다. 키르키스탄 국경수비대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부터 우즈벡과의 국경은 불과 150미터
거리, 그들은 우즈벡 국경으로부터 난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이곳의
감시를 강화했다고 한다. 더 이상의 난민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것이
키르키스탄 정부의 방침이라고 한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우즈벡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우즈벡과는 ‘교류협력’의
대상이기 때문에 ‘난민수용’으로 인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한마디로 골치 아프다는 입장이었다. 이곳 난민촌의 우즈벡국민들이
처해 있는 어려운 현실이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현재 난민촌에
수용된 인원은 모두 548명, 10여 개의 천막에 40-50명의 사람들이
옹기 종기 앉아 있다. 그날의 시위 상황에 대한 충격적인 증언들이
이어졌다.
발포는
모두 3차례, 무차별 난사였다
증언에 의하면
발포는 모두 3차례 있었다고 한다. 오전에 한차례, 오후 1시 그리고
5시,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시청앞 광장으로 수백대의 탱크와 헬기가
들어오면서 중무장한 진압군들이 발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군중들 틈에 섞여 달아나던 어린이와 여성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으로
발포했으며 단순히 지나가는 일반시민들에 대해서도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사망자가 하도 많아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고..... 라지아(40세)라는
여인은 탈출하는 과정에서 수백구의 시신이 트럭에 실려 있는 것으로
목격했다는데 400구까지 확인을 했고 나머지는 무서워서 셀 수 조차
없었다고 증언했다. 인터뷰 도중 탈출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울음이 곳곳에서 터져나왔고, 카리모프 정권이 왜 자신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는지 지금도 납득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 취재도중 온몸 곧곧에
총상을 입은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안디잔을 탈출해 키르키스탄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도 군인들의 발포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이 날 시위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세금 인상, 실업문제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시청앞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략 1만명의 군중이 모여 시청앞 광장에서 실업문제해결을 요구하며
대통령과 정부관계자들의 면담을 요구했고 이들 중 무장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카리모프정권이 자신들을 테러리스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며 이같은 마타도어가
전세계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것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리모프정권이 시위 주동자로 규정한 아크라미야라가 테러리스트라는
부분도 동의할 수 없으며 그들은 단지 안디잔 지역의 기업가 일뿐이라고
했다.
우즈벡 사태는
안디잔 시당국이 지난 2월 사업가 23명을 체포한 것이 발단이 됐다.
카리모프정권은 이들이 아크라미야라는 이슬람 이단 조직 멤버라고
발표했다. 아크라미야는 안디잔의 수학교 욜도세프가 1992년 이슬람
샤리아(성법)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이슬람 성도라는 소책자를 낸것을
계기로 결성됐고 책자는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친미독재정권에
불만 품고 있던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고 그를 따른 아크라미야가
생겨 났다. 책자를 발간한 욜도세프는 99년에 징역 19년을 선고받고
수감돼 지금도 복역 중이다. 아크라미야는 이슬람 전국 조직인 해방당의
한 분파로 자리잡았다. 이슬람 해방당은 ‘평화노선’지지, 무장투쟁
배제하고 있다고 한다. 시위의 시발이 된 안디잔의 해방당은 몇
년 전부터 코란에 바탕을 둔 ‘활빈계획’을 만들어 빈민들에게
소규모 사업장을 만들어 주고 영농교육과 구제금융을 실시해 호응얻었다.
보안당국이 구속한 23명의 기업가들은 이 프로그램을 이끌던 이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구속되고 난후 안디잔의 많은 시민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심각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상태였고. 이날 시위는
이들의 사업장에 일하던 공장노동자들이 상당수 참석했다고 한다. 난민촌에서도
구속된 기업가들 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카리모프정권이 ‘아크라미야’를 테러리스트조직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날조’이며 평범한 지역의 기업가와 그 사업체에 소속된
많은 직원들이 ‘아크라미야’라는 이유로 국가안보국(SNG/KGB를 계승한
조직) 소속의 특수요원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갔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특수요원들은 기업가들이 마약을 소지한 것처럼 위장해서
끌고 갔으며, 몇 달 후 공장으로 찾아와 직원들에게 ‘조작된 문서’를
제시하며 서명을 강요했고 서명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감옥에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잔인한
독재정권, 카리모프
1990년 소력소속
우즈벡 대통령이 됐으며 1991년 우즈벡 독립이후 그 해 12월 대선에서
당선된 뒤 무려 15년동안 장기집권하고 있다. 카리모프는
정권을 잡은 직후부터 야당지도자를 구금하였고 의회선거에서는
야당후보자들의 선거 등록을 거부하는 등 반 정부 성향의 야당을 지속적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국가안보국(SNB/KGB를 승계한 조직)이라는
막강한 비밀경찰 조직을 통해 언론 통제는 물론,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감시, 구속, 고문하는 등 인권탄압을 자행해왔다고
한다. 비밀경찰들은 전 국민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카리모프정권에 비판적인
사람은 무조건 구속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난민촌의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듣는 카리모프 정권의 부정부패의 실태는 더욱 심각했다. 대학을
들어가려면 12000불짜리 대우자동차 넥시아(한국에서는 씨에로)를
뇌물로 주어야 입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우즈벡 국민들의 한달의
평균 월급은 10달러 전후를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다. 특히 경찰과 군인들의
부정부패 사례는 일일이 거론하기도 힘든 정도라고....
전국민의
눈과 귀와 입을 막아라!!!!
우즈벡 사태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는 카리모프 정권의 언론통제가
크다. 키르키스탄과 우즈벡 국경에서 취재 도중 만난 수많은 우즈벡국민들은
비밀경찰의 감시가 두려워 제대로 얘기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국경취재를 하고 있던 외신들도 우즈벡국경을 촬영했다는 이유로
우즈벡 군인들에 의해 억류되거나 제지를 받는 일이 속출했다. 더
큰 문제는 카리모프정권에 의해 사건의 진실조차 왜곡돼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위에 참가했던 평범한 일반 시민들이 테러리스트로
지탄받고, 시민들이 총을 들고 경찰을 쏘았다고 믿고 있는 우즈벡인들도
상당수였다. 취재진은 취재도중 안디잔의 진실을 기록한 필름이
존재한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진압군의 진압작전의 실체와 시민들에
대한 총격장면이 담긴 내용이라고 했다. 안디잔으로 믿을만한 현지인을
보내 테잎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안디잔으로부터의 답은
‘부정적’이었다. 현재 시위 주동자 색출과 검거로 안디잔의 상황이
여전히 위험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5월 13일 안디잔의 진실은 여전히
카리모프 정권의 총부리 앞에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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