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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카슈미르 분쟁 지역 - 평화의 버스(4월 29일 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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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Issue - 오동운PD ‘카슈미르’ 취재기
지난
4월 7일, 인도와 파키스탄의 병력이 맞닿아 있는 카슈미르 카만 초소를
사이에 두고 양 쪽의 버스가 멈추어 섰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고
그들은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다리를 건너서 새로운 곳에 도착한
것을 기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리를 건넜지만, 버스는 그 곳에
멈추어 선 채 승객을 맞바꾸어 태우고서는 다시 그들이 처음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카슈미르의 ‘Caravan of Peace’ - 이른바
‘평화의 카라반’이라 불리는 스리나가르(인도)-무자파라바드(파키스탄)
간 버스의 첫 운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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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는
서남아시아의 화약고로 불리는 지역 으로 그 분쟁의
뿌리는 매우 깊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으로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하게
되었다. 이 때 인구의 절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었던
카슈미르 지역이 파키스탄 대신 인도지역으로 편입되면서
오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파키스탄이
1948년 이 지역의 일부를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카슈미르는
두 지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1964년, 1972년 등
크고 작은 분쟁을 끊임없이 벌인 끝에 1972년부터 우리나라의
휴전선과 같은 LOC(Line Of Control) 이라는 통제선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
카슈미르(POK, Pakistan Occupied Kashmir)와 인도령 카슈미르주로
나누어 졌고, 수많은 카슈미르 사람들이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양국이 많은 병력을 대치하며 끊임없이
긴장감을 높여가던 중, 작년부터 카슈미르에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결과의 시작이 이 버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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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사람 대부분이 힌두교도인데 반해, 카슈미르주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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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6일 불에 타 버린 스리나가르 시내의 관광센터. 다음날
출발 예정이었던 사람들이 묵고 있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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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진이
카슈미르주의 여름 수도인 스리나가르시를 찾은 것은
지난 4월 20일. 지난 4월 7일, 1차 ‘평화의 버스’
운행이 있은지 2주 만에 두 번째 버스 운행이 있기
하루 전이었다. 카슈미르 지역은 고산지대에
위치하여 사시사철 눈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천혜의 관광지이다. 취재진이 찾았을 때에도 많은 인도
사람들이 이곳으로 휴가를 즐기러 여행을 오고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 장갑차를 비롯한 초소들과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어깨에 맨 채 거리를 순찰하는 군인과 경찰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이 이곳이 아직까지 안전하지 않은 곳임을
순간순간 일깨워주었다. 취재진이
처음으로 만난 뉴스에이전시는 이 버스 운행에 반대하는
무장세력들이 보낸 팩스를 보여주었다. 이 버스는 단순한
정치적인 술수일 뿐이며, 인도의 카슈미르에 대한 계속적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버스 운행이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어 왔다. 실제로 4월 6일, 스리나가르 시내에
1차 버스를 타기 위해 승객들이 머물고 있던 관광센터(Tourist
Reception Center)에 무장 세력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공격이 있었고, 건물은 전부 불에 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버스는 예정대로 출발했고, 58년 만에 갈라진
국경 아닌 국경을 넘어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족을
만나러 건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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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이산가족 상봉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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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30년이라는 세월을 갈라져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30명도
채 안 되는 1차 방문단의 사람들을 보면서 2002년 우리나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떠올랐다. 갈라진 세월, 상처받은
마음이 어찌 짧은 상봉으로 메워질까마는 그간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취재진은
파키스탄 쪽에서 고향을 찾아 건너온 프리다(여, 50)씨를
만나서 그 느낌을 들어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카슈미르를
위해서 일하다가 인도 측의 미움을 받고 추방되면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프리다씨. 그녀는 집 앞의 호수에서
수영하며 즐겁게 보냈던 유년시절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기억들을 되살리며 만날 수 있었던 친척들... 그녀는
간절히 바래왔던 소망이 이루어진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집은 그녀의 가족들이 추방된 이후
정부 소유로 압류되어 학교로 변해 버렸고, 그녀는
쉴 곳이 없어 집 근처의 호텔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2주간의 일정을 마치고 4월 21일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했다. 그녀에게 이 버스는 기쁨이자
아쉬움 이었고, 시작일 뿐이었다. 한 번에 30명으로
제한된 버스 상봉단. 하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고, 자유로운 방문이 아닌 제한된 일정의
방문이라는 점은 그녀에게 아직도 분단의 현실이 끝나지
않았음을 또 한 번 일깨워 주고 있었다. 또 한
명의 가족 상봉자인 이르샤(남, 65), 모하메드(남, 63)
형제는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소년시절,
형이 사람을 만나러 파키스탄 지역으로 건너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서 시작된 이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다림은 반백년이 다 되어서야 꿈같이 현실이 되었다.
그동안 밀렸던 형제에겐 잠자는 시간마저도 아까울
뿐이라며 한 침대에 누워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며 웃는
모습에서 또 다시 소년으로 돌아간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분단은 세월을, 삶을 멈추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2주. 지금은 기뻐하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들에겐 또 다른 아픔이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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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버스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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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과
인도를 잇는 버스는 외신에 의해 ‘평화의 버스’라고 소개되면서,
분쟁 지역인 카슈미르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카슈미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버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무슬림 회의(Muslim Confrence) 총재인
압둘 가니 바츠 교수는 이 버스가 카슈미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인도적인
측면에서 수많은 이산의 아픔을 덜어내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며, 또한 나아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교류의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고 힘주어
이야기 했다. 사실상 통제선(LOC)가 있는 상황에서 분단의
아픔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카슈미르 해방운동 단체인 잠무카슈미르 해방전선(JKLF,
Jammu Kashmir Liberation Front)의 지도자인 야신 말릭은
결국 카슈미르의 문제는 카슈미르인들이 스스로 본인들이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버스운행은 단지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그들만의 협상일 뿐, 진정으로 카슈미르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인도도
파키스탄도 카슈미르를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분단은
극복될 수 없는 영원한 숙제일 수 밖에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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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무카슈미르해방전선(JKLF)의
지도자 야신
말릭.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의 문제를
그들끼리 해결할 권리가 없다고 힘주어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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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1일. 두 번째 ‘평화의 버스’는 사람들을 태우고 무사히
두 번째 운행을 마쳤다. 이 버스는 분명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앞으로
버스가 좀 더 자주 다니게 되고, 경제적인 교류가 일어나게
되면 카슈미르에 분명 발전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카슈미르
인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결정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카슈미르의 평화가 찾아 올
것이다.
4월
21일 출발하는 2차 ‘평화의 버스’. 이 버스가
진정으로 카슈미르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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