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사연> 내 사랑, 서울사위.
돈, 명예, 외모...어떤 것도 필요 없다?! 
60년대, 가장 이상적인 사윗감의 조건은 바로 ‘서울 사람’?! 
얼굴 한번 못 본 사위에게 금지옥엽 키운 딸을 시집보낸, 한 아버
지의 아주 특별한 혼인 프로젝트! 마침내 그 결혼식의 내막이 밝혀
진다!
1965년 경남의 한 시골마을, 부족하지 않은 살림에 건강한 일곱 자
녀까지 둔 다복한 촌부 빈씨. 그러나 누가 봐도 부러울 것 없어 보
이는 빈씨에게 남다른 소원이 하나 있었으니...그것은 바로 ‘서울 
구경’! 당시만 해도 시골사람들에게 서울은 그야말로 ‘신천지’였다
고 하는데...그러던 어느날 ‘서울’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빈
씨에게 서울구경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맏
딸 ‘금옥’에게 서울 사는 신랑감의 혼처가 들어온 것. 앞뒤 가릴 것 
없이 단번에 결혼을 수락한 빈씨. 그렇게 결혼식은 순식간에 결정
이 나고. 마침내 결혼식 당일, 처음 보게 된 서울 사위의 작은 키
에 빈씨의 기대는 한번에 무너지고 마는데...하지만 곧이어 서울 
사위의 귀한 ‘선물’ 공세가 시작되자..견물생심이라 하였던가. 그야
말로 듣도 보도 못한 서울 물건에 흡족한 빈씨, 기쁜 마음으로 키 
작은 서울 사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시골 촌부의 남다른 ‘서울 사랑’이 만들어 낸 웃지 못 할 특별한 결
혼식! 그 결혼식의 주인공을 직접 찾아가 당시 이야기를 들어본다.


<시청자 퀴즈> 최초의 라면, 그 역사 속으로.
1인 평균 소비량 세계 1위, 명실상부 제2의 주식으로 자리잡은 ‘라
면’! 6,70년대 가난한 마음과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서민들의 음식
에서, 2005년 현재  남녀노소 불구하고 가장 즐겨 찾는 별미가 되
기까지...한국라면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현장을 긴급 취재했다.
1963년 9월 어느 시장. 전쟁 이후 식량난에 허덕이며 일명 ‘꿀꿀이 
죽’으로 연명하는 사람들을 목격한 한 젊은이가 있었으니...그는 
바쁜 일상 중에 빠르고 간편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본 그 
순간,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외국에서 맛본 ‘라면’을 우리 
입맛에 맞게 개발하려는 것. 이후 거듭되는 실패와 난관을 이기고 
탄생한 국내 최초의 라면! 하지만 처음보는 이 신기한 음식에 사람
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고. 라면을 羅綿 으로 오해, 섬유로 
생각하는 사람부터 음식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조차 허다했는데...
하지만 적자를 감수하고 시행된 ‘라면 무료 시식회’의 성공으로 라
면의 참맛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고.
다양한 맛과 간편한 조리 방법으로 누구에게나 사랑 받고 있는 라
면! 그 최초의 라면에 얽힌 <타임머신> 시청자 퀴즈~!!
라면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참여해 보세요~


여인별곡.
때는 조선의 명군, 세종시절. 평소부터 지병을 앓던 시아버지가 돌
아가시자 정성을 다해 3년상을 마치고 돌아온 보옥(가명). 그런 그
녀에게 청천벽력같은 일이 닥쳤다. 남다른 부부금술에도 불구하
고 후사를 보지 못했던 그녀에게 엄격한 처벌이 내려졌던 것. 그것
은 시댁에서 ‘칠거지악’ 중 1순위로 꼽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죄’
를 물어 그녀를 쫓아낸 것이다. 급기야 딸의 억울한 사정을 국가
에 상소한 보옥의 친정 측과 당연한 결과라 주장하는 시댁측이 팽
팽히 맞서게 되는데...
이윽고 내려진 국가의 판결. 뜻밖에도 그것은 시부모의 3년 상을 
지낸 보옥의 편을 들어주었던 것. 이유인 즉, ‘칠거지악’을 이용해 
아내를 내쫓는 일이 빈번해지자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삼불거’라는 
또 다른 대책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빛나는 지
혜가 돋보이는 ‘칠거지악’ 대 ‘삼불거’ 그 통쾌한 이야기 속으로~



법 없이 못 사는 남자 (1978년).
누구든지 내 앞에서 원칙을 논하지 말라!
정의 수호를 위한 한 남자의 대~단한 소송이 시작된다.
길거리에 휴지 버리기, 무단횡단, 세치기까지...어느 것 하나 무심
코 넘기지 않고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는 ‘바른생활’맨 한원칙(가
명)씨.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터졌다! 
고장 난 공중전화가 원칙씨의 돈 10원을 삼켰던 것. 10원을 찾기 
위해 전화관리인, 전화국, 경찰서를 전전하다..급기야 법적 공방까
지 벌이게 된 원칙씨. 
결국 수백원에 달하는 교통비와 몇 십원의 인지대에 이르기까지 
기천원의 소송비용을 들이고서야 사건의 발단이 된 ‘10원’을 되찾
을 수 있었다고. 대한민국에서 불의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한원칙
의 정의 수호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