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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천황의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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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균,2005-07-27

  「천황의 나라 일본」 5부작 다큐멘터리가 방송(8월 7일부터)을 앞두고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이 시리즈를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닌데, 이 기획과 통하는, 예전에 썼던 글 네 편을 여기에 옮긴다. 본래 "미디어 오늘"에 <교양PD의 세상보기>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다가 졸저 「비극은 행진으로부터 시작된다」(들린아침)에도 실린 글들이다.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 천황의 신화
 


 

  새해 첫 글이니만치 뭐 덕담이 될만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일본이 또 속을 뒤집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대신이 지난 1월 1일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또 참배했다는 것이다. 총리로 취임한 이후 매년 한 차례씩 신사 참배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아시아 각국이 항의하면, 그는 내정간섭이니, 일본의 전통일 뿐인데… 하며 투덜댄다. 그래, 일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내 주변의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충일이 되면 국립묘지에 참배하지 않느냐,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아, 이게 나 혼자 속 뒤집을 일이 아니구나.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왜 나쁜가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그것에 대해서는 2003년 1월 16일자 문화일보, <도올 김용옥기자 현장속으로> ‘日총리, 야스쿠니 참배 뭘 뜻하나’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만 야스쿠니 신사와 천황 이데올로기의 관계만을 짚어보려 한다.


  메이지와 야스쿠니

  야스쿠니 신사는, 본래 메이지 정부 수립 과정에서 벌어졌던 내전 과정에서 사망한 황군(皇軍) 전사자 3,588명을 위로하기 위하여, 1869년(메이지 2년) 6월 29일 규단자카노우에(九段坂上)에 사당을 지어 ‘도쿄 쇼콘샤’(招魂社)라고 한 것이 그 시초다. 그러니까 야스쿠니 신사는 그 기원에서부터 천황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쇼콘샤가 현재의 명칭으로 개명된 것은 메이지 12년인 1879년 6월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메이지(明治) 천황(오른쪽 그림)이 ‘야스쿠니(靖國)’라고 개명했는데, 새로운 이름에는 ‘국가(國)를 평안하게 해(靖), 평화로운 국가를 만든다’고 하는 천황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나라를 평안케 한다, 그거 좋은 말이다. 거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누군가. 청일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의 기틀을 잡은 일본은 군국주의의 광기에 사로잡혀 아시아와 더 나아가서는 세계 지배를 위한 전쟁을 계속적으로 벌여나간다. 조선이 병탄되어 일제의 식민지배 하에 놓인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그런 광기 어린 국민동원이 가능했던 것은 천황사상을 유포함으로써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했기 때문이다.


  천황교의 순교자들

  천황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야스쿠니 신사와 교육칙어(敎育勅語)이다.

  먼저 교육칙어부터 살펴보자. 교육칙어는 1890년 10월 30일 발표되었다. 1885년에 총리대신이 되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후일 안중근 의사에게 죽음을 당하는 이토는 천황의 신화(神化)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가 주도했고 1889년에 발표된 대일본제국헌법의 제1조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통치한다’이며, 제3조는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이다. 헌법 제정 후에도 이토는 메이지 천황으로 하여금, 신성불가침인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핵심 개념으로 하는 칙령을 공포하게 했다. 그 칙령 가운데 하나가 교육칙어이다.

  스털링 시그레이브와 페기 시그레이브가 공저한 ‘일본인도 모르는 천황의 얼굴’(원제는 The Yamato Dynasty)에 따르면, 교육칙어는 일본 국민 한 세대를 진정한 천황교 추종자들로 개종시키는 일종의 엄격한 윤리헌장이었다.(훗날 대한민국에서도 이러한 것이 제정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교육칙어를 본따 만든 ‘국민교육헌장’이 바로 그것이다.) 교육칙어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자매들과 우애하고, 겸손과 중용을 가슴에 새기고, 공공의 선을 촉진하고 공익을 앞세우며, 헌법을 존중하고 국난을 당할 시에는 국가를 위해 용감하게 목숨을 바치라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칙어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것은 천황에 대한 불충과 불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각급 학교에서는 칙어 봉독식을 치러야 했다. 봉독식은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엄숙히 진행되는 식 자체를 통해 무의식 중에 천황에 대한 외경심이 길러지게 만들고자 했다.

  사실 메이지 유신 전까지 거의 500년에 이르는 동안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천황의 존재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천황을 숭배하는 새로운 교리는 너무나 강력하고 엄격했으며 또 효과적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거의 모든 일본인이 천황에 관한 모든 신화를 진실로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천황의 초상 때문에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이다. 천황의 초상은 1889년부터 소학교에 일률적으로 보급되었다. 교육칙어가 발표된 다음부터는 천황의 초상과 교육칙어 등본은 일정한 장소에 최대한의 존중심을 갖고 봉안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것은 불충의 증거가 되었다. 이것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직분과 목숨까지 걸어야만 한다는 것이 점차 불문율이 되어 갔다. 이 불문율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이 2차 대전 종전까지 20여 명이 넘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21년 1월 6일 나가노현의 소학교가 불에 탔을 때 일어났다. 학교가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카지마 나카시게(中島仲重) 교장은 학교로 들어가 천황의 초상과 교육칙어 등본이 봉안되어 있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잿더미 속에서 찾아낸 교장은 새까맣게 탄 몸으로 두 손으로 사진을 받드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 후 순교자에 대한 찬미는 열기를 띠어 갔고 초상과 칙어 등본에 대한 신격화는 한층 촉진되었다.


  노기의 신화

  교육칙어와 마찬가지로 야스쿠니 신사도 천황의 신화(神化),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해 기능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야스쿠니 신사가 교육칙어와 다른 점은, 교육칙어가 천황에 대한 충성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프로그램이었다면, 야스쿠니 신사는 보다 분명히 천황을 위해 몸을 바칠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전전(戰前)의 일본 수신(修身) 교과서 국민학교 4학년용의 ‘야스쿠니 신사’라는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천황을 위해, 국가를 위해 몸바친 많은 충성스럽고 의로운 사람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늘 침략전쟁 수행 및 전쟁 승리 결의대회 장소로, 또는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시키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 형성장으로 이용되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개전을 보고하는 의식이 행해졌고 이후 매월 20일에 전승 기원제가 열렸다. 또한 침략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을 야스쿠니 신사의 신으로 모시는 제사에는 배속 장교의 인솔하에 학생들을 집단적으로 참배시켰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벌인 후, 1942년 2월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국민 궐기대회를 개최해 전쟁 수행을 위한 국민 동원을 노골화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 세워진 신사가 야스쿠니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군국주의와 천황 이데올로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들은 따로 신사가 만들어진다. 노기신사(乃木 神社), 도오고우 신사(東鄕 神社) 등이 그렇다. 노기 신사는 러일전쟁 당시 제 3군 사령관이었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오른쪽 사진)가 제신(祭神)이며, 도오고우 신사는 쓰시마해협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으로 괴멸시킨 도오고우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아래 왼쪽 사진)가 제신이다.

  신사에는 신화가 곁들여진다. 신화는 국민 동원에 필수적이다. 신화를 사실로 믿을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아마도 신사의 여러가지 신화 중 가장 극적인 것은 ‘노기(乃木) 신화’일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 여순공격을 담당한 제3군 총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는 사실 군인으로서 무능했고 그를 보좌하는 참모 역시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다. 철벽을 자랑하는 러시아군 요새에 무모한 육탄전을 감행한 노기는 병사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며 함부로 희생시켰다고 한다. 여순에 대한 첫번째 공격에서 그는 전투에 참가한 1만 1천 병사 가운데 약 47%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다. 그야말로 괴멸이었다. 여기까지가 사실에 입각한 평가이다.

  신화는 이렇다. 러일전쟁 당시 초기의 기습공격으로 러시아 함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 후, 메이지 천황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여순항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의 지원 함대가 오기 전 여순항을 점령해야 했던 것이다. 노기는 휘하 장병들에게 ‘천황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라고 지시했다. 이유없이 전투 현장을 이탈한 병사들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노기는 쌍안경을 통해서 자기의 두 아들 야수스케(保典)와 가쓰스케(勝典)가 부대의 맨 앞에서 사무라이 칼을 흔들며 전장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노기 장군의 두 아들은 전사했다. 이 다음 부분은 의아스럽다. 자결하려는 사람이 다른 사람, 특히 천황에게 ‘나 죽겠소’ 보고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화는 이렇게 말한다. 노기 자신도 자결하려 했지만 메이지 천황이 말렸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당신도 살아 있어야 한다.”

  신화의 그 다음 장면은 이렇다. 1912년 7월 29일 메이지 천황이 암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6일 후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 전날 밤 노기는 11살인 히로히토를 불렀다. 그때 노기는 훗날 천황이 되는 히로히토를 교육하는 학습원(學習院)의 원장이었다.

  “너는 이제 일본의 황태자가 되었고, 최연소 육군 및 해군의 장교이기도 하다. 또 미래에는 일본 제국의 지휘관이 될 것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군사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고 건강도 잘 보살펴야 할 것이다. 네가 일을 하는 데에 내가 항시 같이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너를 위해서, 그리고 일본제국을 위해서 항상 열심히 해라.”

  다음 날 아침 예포가 메이지 천황의 장례식장에 울려 퍼지는 동안 노기 원장부부는 목욕을 한 다음 흰색 기모노를 입고 메이지 천황의 영정에 절을 했다. 부인인 노기 시즈코(乃木靜子)가 먼저 칼로 목을 베어 자결을 했고, 뒤이어 노기 백작이 창자를 꺼내는 ‘셋푸쿠(切腹) 의식’으로 최후를 마쳤다. 노기부부는 서슴없이 메이지 천황과 러일전쟁에서 전사한 두 아들의 뒤를 따랐다. 노기는 두 아들이 죽은 전장에서 자결하려던 결심을 충실하게 이행한 셈이다.

  노기의 최후의 장면에 대해서 다른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즉, 그는 자결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왜? 천황의 신화를 위해서.

  노기의 최후가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는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충성스러운 신민의 전형’으로서 추앙되었고 ‘군신(軍神)’으로 떠받들어졌다. 노기의 집은 노기신사(乃木神社)가 되었고 아직도 도쿄의 한복판에 빌딩으로 둘러싸여 나무로 지은 이층집 그대로 남아 있다.


  반딧불이와 중음신(中陰神)

  노기의 신화는 천황 이데올로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야스쿠니 신사가 얼마나 천황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충실하고 엄격하게 기여했는가는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되어 있다는 유서(遺書)를 보면 알 수 있다.

  “천황폐하 만세! 소신(小臣) 다나까는 기쁜 마음으로 죽습니다. 일곱 번 다시 태어나도 천황폐하를 위해 그리 하겠습니다.”

  “부모님께 고합니다. 나의 죽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몸은 비록 죽습니다만 '보국(報國)의 적성(赤誠)'은 영원히 살아 황국(皇國)의 기초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신화가 덧붙여진다. 이제 신사 자체가 신화가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에서 죽더라도 야스쿠니로 돌아온다는 신화가 그것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이 죽으면 반딧불이가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고 굳게 믿고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전사자들은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신(神)으로 모셔진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 보자.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져 있는 사망자 246만여 명 중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과 관련해서 사망한 자가 약 245만이라고 한다. 99.6%에 달한다. 야스쿠니 신사의 신들이 245만이나 만들어지기 위해 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는가. 그들이 반딧불이로 돌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중음신(中陰神)들이 갈 곳을 못 찾아 구천을 떠돌아야 했는가.


◆ 온라인 미디어 오늘, ‘교양PD의 세상보기’에 기고한 글(2004.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