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22일 (일) / 제 95 회
▣ 스포츠로 지배하라! - 5공 3S정책
‘스포츠 대통령’ 전두환. ‘스포츠 대통령’이란 말만큼 그에게 걸맞
은 수식어는 없다. 아직도 스포츠계에선 스포츠에 대한 그의 관심
과 배려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을 정도다.
[선진체육입국]이란 ‘엉뚱한’ 슬로건 하에 “86 · 88”을 금과옥조처
럼 읊조리며 박수부대로 동원됐던 기억들. 군사정권하에서 으레
벌어질 수 있는 일상으로 치부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만 전두환 정권이 스포츠를 명백한 정치적 목표의 달성을 위해 이
용했다면 쓴웃음으로 그칠 일은 아니다.
이 프로그램에선 5공 전두환 정권의 올림픽 유치와 프로야구의 출
범이 명백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됐다는 가
설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전두환 정권 초기 안
정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 보이고자 한다.
1. “바덴바덴의 기적”은 “연출된 기적”
전두환은 왜 올림픽 유치를 지시했는가?
80년 8월 전두환은 서울에서 세지마 류조를 만난다. 세지마 류조
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한․일간에 가교역할을 맡았던 막후 인물.
전두환은 그에게 광주학살을 덮고 국론을 통일시킬 묘책을 구했
고 세지마 류조는 올림픽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전두환은 그의 아
이디어에 크게 공감하고 이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림픽 유
치에 집착하게 된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심한 전두환은 이를 가
능하게 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올림픽 유치를 반대하던 수석 비서
관들은 모두 올림픽 유치에 열을 올린다.
실질적인 세계 최대의 스포츠 회장인 아디다스의 다슬러와 유일하
게 접촉점을 갖고 있던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 실장과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까지 끌어들여 바덴바덴으로 향한다. 52대 27로 서울
의 개최가 확정되고 경제적 불안정을 이유로 ‘올림픽 망국론’을 주
장했던 남덕우 총리는 청와대를 떠나고 대신 바덴바덴에 동행했
던 유창순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된다.
2. 프로야구의 출범은 청와대의 기획
GNP 2000불도 안 되는 개발도상국에서 프로야구라니...?
81년 6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이 프로 스포츠 출범
을 지시한다. 그의 지시가 내려지고 불과 9개월 만에 프로야구가
출범한다.
프로야구는 철저히 청와대의 사전기획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국민들의 관심사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다른 관심거리
를 만든 것이었다.
서울운동장에 울려 퍼진 ‘목포의 눈물’
연고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애를 먹은 것은 호남지역이었
다. 원래 이 지역을 맡기로 했던 ‘금호’가 이를 거부하자 우여곡절
끝에 ‘해태’로 정해진다. 워낙 졸속출범이다 보니 해태가 창단할
때 보유한 선수의 수는 불과 14명. 그 중에 8명은 광주출신이 아니
었다.
해태는 광주 시민들에게 무제한의 애정을 받으면서 출범 이듬해부
터 연승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광주 무등경기장은 광주를 비롯
한 호남 사람들이 그들의 울분과 한을 푸는 해방구 역할을 한다.
결국 83년 해태가 우승하고 그날 서울운동장 야구장에는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진다. 광주 사람들은 해태의 승리를 보며 자신들
의 한(恨)을 달랬다.
3. 엄청난 서울 도심 재개발 사업. 그 목적은?
상계동 철거민들의 땅굴 생활
경제여건을 감안하지 않고 올림픽을 유치한 5공화국 정권은 엄청
난 정치적 비용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사각지
대를 없애라”는 특명을 내린다.
상계동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은 부천으로 집단 이주하게 된다. 이
들이 간 곳은 경인고속도로변의 허허벌판.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
고 진흙탕 위에 가건물을 짓고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이마저도
무자비하게 철거당하고 만다. 부천시청이 내건 이유는 ‘성화 봉송
로’ 주변이라는 것. 상계동 철거민들의 집단 거주지가 88올림픽 성
화 봉송로 옆이라는 것이었다. 성화 봉송할 때 무허가 건물이 보이
면 ‘미관상’ 좋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철거민들은 성화 봉송로에서 안보이게 땅굴을 파고 들어가
생활한다. 무려 10개월간 땅굴 생활을 한 후에야 이들은 땅위로 나
올 수 있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올림픽”이란 미명하에 자행됐다.
4. 금메달! 금메달! 금메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메달을 따라
올림픽 꿈나무를 선발하라!
초등학교 4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 전국 600만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체력장을 통해 체력이 우수한 12,000명의 학생들을 선발
하고, 다시 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체력을 측정해서 5천 명 가
량의 ‘올림픽 꿈나무’를 선발했다. 올림픽 메달을 향한 집념이 세계
에 유례가 없는 일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또 국가대표 코치의 월
급을 차관급으로 대우해주는 등 파격적으로 개선해준다.
전두환 정권의 초기 안정화에 기여한 스포츠
1984년 9월 1일 실시된 ‘스포츠와 올림픽에 관한 전 국민 여론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올림픽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90%에 육박하
고, 전두환은 Time지의 표지에 등장한다. Time지의 기사에서 전
두환은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뭉친 나라의 대통령”으로 긍정적
으로 묘사되고 전두환은 올림픽 유치로 세계적인 인정의 효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스포츠의 정치적 이용을 통한 정권의 안정화 전략은 1984년에 최
고점에 달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과 프로야구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87년 6월 항쟁 당시 시청 옥상에 게양됐던 올림픽기는 시위
대에 의해 땅바닥에 내팽개쳐지고 결국 전두환은 자신이 유치한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참석조차 못하는 수모를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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