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8일 (일) / 제 93 회

▣ ‘한국의 진보’ 3부작

제 3 부 : 혁명의 퇴장, 떠난 자와 남은 자

*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한국의 좌파들이 충격에 빠지다.
1989년 6월 4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살상을 감행
한다.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향해 총을 겨누면서 수천 명이 희생
된 ‘천안문 사태’는 한국의 좌파들에게 충격이었다. 이어 베를린 장
벽이 무너지고,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그들은 혼란
에 빠진다. 진보세력들은 ‘평생을 직업 혁명가로 설정해 놨던 틀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인생의 골격이 허물어지듯 당황스
러웠다’고 당시의 심정을 표현했다. 
‘혁명의 모델’이었던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겪어야 했던 충격
과 혼란, 그리고 숨길 수밖에 없었던 당시 속마음을 한국의 좌파 
세력들이 솔직하게 밝힌다.  

* 폭력혁명 노선에 대한 문제제기로 ‘신노선’이 등장하다
1991년 5월 투쟁은 당시 공안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어났다. 4
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군의 사망으로 시작된 5월 투쟁은, 6월 15
일까지 11명이 분신하고 모두 13명이 사망하는 90년대 최대의 투
쟁이었다. 하지만 당시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학생운동 조직
력이 훨씬 강해지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국민들은 오히려 그들
을 외면하기 시작했다’고 증언했다. 
이 시기 80년대의 폭력혁명 운동방식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
하며 ‘신노선’이 등장한다. 비합법 혁명 노선의 폐기를 주장한 신노
선은 당시 지하정당으로부터 시작돼 운동권 전반에 파란을 일으킨
다. ‘합법적인 대중 정당을 통한 사회변혁’을 환영하는 이들도 있었
지만, 신노선은 ‘명백한 혁명운동으로부터의 청산, 정부에 대한 투
항’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 혁명의 퇴장, 90년대의 새로운 실험 
합법적 대중운동 노선을 선택했던 이들은 92년 ‘한국노동당’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본격적으로 선거에 참여한다. 한국노동
당은 90년 11월 창당한 민중당과 통합하고, 통합민중당으로 51개 
지역에 후보를 내면서 92년 총선에 참여한다. 당시 그들은 ‘이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가시적인 성과물들이 나올 것이다’며 기
대에 가득 찼다. 
하지만 한명도 당선되지 못하고 결국 민중당은 해산되고 만다. 당
시 선거에 참여했던 이들이 선거를 통해 국민들을 만나가면서 느
꼈던 괴리감, 그리고 선거 패배 후 참담했던 심정 등을 밝힌다.    

*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 대규모 이탈이 시작되다.
현존 사회주의 붕괴와 민중당 실패 후, 80년대 혁명을 꿈꾸며 공장
으로 간 학생들은 노동 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10년 운동의 피로
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비로소 생활이 보이기 시작한 학생들은 학
교로 돌아간다. 당시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몰려 올 때도 굉장했지
만, 나갈 때도 굉장했다’고 증언했다. 노동 현장을 떠난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거나 시민운동 등 전문영역을 개척해나간다.
   
* 변신한 386, 그들이 입을 열다.
위장취업 후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던 김문수는 뒤늦게 학교를 
마치고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사법시험에 통과해 변호사의 길
을 걷던 송영길과 원희룡도 정계에 진출한다. 80년대 격정의 시대
를 함께 했던 사람들이 국회로 들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기대와 함
께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혁명을 길을 포기하고 제도권 안으
로 들어간 386, 그들이 당시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기까지의 솔직
한 심정을 밝힌다. 진보세력들도 제도권 정치로 들어간 386 스타들
에 대해 애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 학번 없는 노동자들, 그들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동구권 붕괴와 민중당 선거 참패는 노동자들에게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학생들처럼 돌아갈 곳이 없었다. 당시 노동자
들은 학교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돌아갈 곳도 없는 신
분의 차이'를 느꼈다. 학생들과 엄혹한 시대를 함께 한 노동자들
은 대부분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어 재취업이 매우 힘든 상황이었
다. 지식인들이 이념의 붕괴로 힘들어할 때, 노동자들은 당시 '너
무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또한 지금의 민주화 세력이 386으로 대표되면서, 학생들과 함께 고
생했던 ‘학번이 없는 노동자’들은 전혀 역사적으로 조명 받지 못하
고 있는 뼈아픈 현실을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