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24일 (일) / 제 91 회

▣ <한국의 진보> 3부작 

제 1 부 :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규모로 많은 
지식인들이 공장에 들어간다. 그 동안 이들은 ‘위장취업자’, ‘운동
권’ 그리고 ‘지하세력’ 등으로 불려왔다.
대한민국 진보세력의 역사는 그들만의 역사가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 사회가 겪어왔던 갈등과 고민이 함께 담겨있다. 이들 진보세
력들이 지난 25년간 겪어왔던 열정과 한계 그리고 오류를 담백하
게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진보세력의 성찰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며, 이들과 동반해야할 건강한 보수에게도 시사점이 있
기 때문이다.  
 
제1부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은 1980년대 위장취업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군부독재에 대항해 혁명을 선택한 사람들이었
다. 그들은 왜 가슴 설레는 미래와 낭만을 뒤로한 채, 공장으로 갔
는가? 당시 공장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노동자들은 위장
취업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그 동안 위장취업자들의 이야기는 감춰지거나 왜곡된 형태로만 전
해져왔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을 있
는 그대로 드러내고 그들이 역사에 던지는 질문을 되돌아본다. 

* 혁명을 선택한 학생들, 그들은 왜 공장으로 갔는가?
위장취업자들은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만 하던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것이 5월 광주’라고 증언한다. 이처럼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격렬한 충격으로 다가왔
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를 통해 이 사회를 변화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노동자들을 조직화해서 이 사회의 민주화를 
이루려는 꿈을 안고 공장으로 간 지식인들, 과연 그 곳에서는 무
슨 일이 일어났을까? 
격정의 시대, 공장으로 들어갔던 김문수, 송영길,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원희룡 의원 등의 증언을 통해 그들이 위장취업을 선택했
던 솔직한 심정을 들어본다.

* 위장취업자 규모 
- 단독 입수된 정부 보고서 699명, 학계는 만 명 추정 
소수의 지식인이 노동현장에 투신했던 70년대와 달리, 80년대 지
식인들은 군부독재에 대한 체계적인 저항을 위해 집단적으로 공장
으로 들어갔다. 위장취업자였던 노회찬 의원은 ‘84년경부터 트럭
으로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한다. 
단독 입수한 <일선기관장 회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정부가 실명
으로 파악한 위장취업자 수는 699명에 달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렇게 많은 지식인이 공장으로 이
전했던 당시 상황을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역사적인 사건으
로 보고 있다.

* 위장취업자들이 공장으로 가기 위한 체계적인 준비과정 
공개
공장으로 이전하는 지식인들은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종교
조직과 야학, 운동선배를 통해 ‘현장 이전팀’을 꾸리고 체계적인 공
장 활동을 준비해 나간다. 노동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위장취업자
들은 직업훈련원에서 기술을 습득했고 윤난실 의원은 노동자처럼 
보이기 위해 파마를 했다.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주민등록증위조
는 필수였는데 이 때문에 위장취업자 대부분에게는 ‘공・사문서 위
조죄’가 적용됐다. 

* 80년대 시대의 아픔이 거기에 있었다.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당사자 권인숙, 87년 경찰의 수사과정
에서 목숨을 잃은 박종철 역시 80년대 초 공장으로 이전한 지식인
들이었다. 평생 노동자의 길을 걷겠다던 박종철은 3주간의 공장 활
동 기간 동안 공장의 위치나 근로조건 등을 꼼꼼히 기록한 <공장
활동 보고서>를 남겼다. 이것은 좀 더 규모 있는 공장으로 이전하
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권인숙은 <자필 진술서>에 ‘과거에는 여
대생이었으나 지금은 여성노동자’라고 담담히 드러냈다. 

* 위장취업자들에게 공장의 현실은 냉혹했다.
체계적인 준비과정을 통해 공장에 들어갔지만 낯선 공장, 힘든 작
업 조건 등 지식인들에게는 숱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위
장취업자였던 김창한씨는 ‘처음 한달 동안 젓가락질도 못할 정도
로 노동이 힘들었다’고 한다. 심상정 의원은 이를 악물고 버텼고, 
그 여파로 지금은 견경완 장애가 남아있다. 
산업재해는 지식인이라고 피해가지 않았다. 서울대 물리학과 출
신 조정식 씨는 위장취업 중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노동자 시
인 박노해의 시 ‘손무덤’의 배경인 경동산업에 위장 취업했던 황광
우 씨와 최봉근 씨는 당시 노동자들의 손가락이 하나 둘 잘려나가
는 현장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위장취업자들의 조급함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안한 시선
20대 중후반, 공장으로 위장취업한 지식인들은 민주화에 대한 열
정은 있었지만 많은 경우 조급함을 드러냈다. 노동자들은 그런 지
식인들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당시 가리봉전자 노동자였던 윤혜
련 씨는 ‘혁명을 원했던 지식인들은 너무 조급했다’고 고백한다. 지
식인에 대한 노동자의 괴리감은 구로공단에서 당시 위장취업자들
과 함께 만들었던 <공단소식>에 ‘독재타도’나 ‘민중해방’ 등의 구
호가 등장하면서 점점 깊어져갔다. 당시 현장에서 지식인들과 함
께 투쟁했던 노동자들이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솔직한 심정을 
밝힌다.

* 구로동맹파업에서 정권과 충돌하다.
위장취업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괴리감은 있었지만, 가혹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나아가 노동자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를 
만들자는 공감대가 점차 확산되어 갔다. 1985년 무렵부터 사업장
에 노조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노동현장도 소용돌이에 휩싸이
게 된다. 
위장취업은 공장 내의 문제에서 사회문제로 확대되어 갔고, 정권
은 이들을 체제 저항 세력으로 보았다. 이러한 긴장과 갈등이 집중
적으로 드러난 것이 85년 구로동맹파업이었다. 당시 부흥사 위장
취업자였던 이선주씨는 ‘위장취업자의 신분도 드러날 것을 각오하
고 한판 투쟁을 벌였다’고 증언했다. 심상정 의원, 서태원, 김준용 
씨등은 85년 구로동맹파업이 위장취업한 지식인들과 선진 노동자
들의 합작품이었다며, 당시에는 말할 수 없었던 숨겨진 지하활동
의 진실을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