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10일 (일) / 제 90 회
▣ 허문도와 국풍 81
광주 항쟁 1주년을 무마시키기 위한 행사로 알려져 있는 국풍 81.
5일간 16만평의 여의도 광장에서 만 삼천명의 출연자와 천만여명
의 관람객이 동원된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축제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유신시대 저항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김지하와 김민기를
포함한 민중문화운동그룹을 체제내화 시키기 위한 허문도의 거대
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
허문도를 중심으로 한 그의 하수인들과 이들에 대항하여 참여를
거부했던 그 반대진영의 처절한 싸움을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서 최초 공개한다.
* “전국대학생민속축제”에서 “국풍 81”로 탈바꿈한 관제행사
허문도의 계획으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는 국풍 81. 이것의 효
시가 “전국대학생민속축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
그계의 대부로 알려져 있는 당시 KBS PD 김웅래의 소박한 기획안
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KBS 사장 이원홍과 허문도를 거치면서 거
대 관제행사인 “국풍 81”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는 문화창달의
도구로 이용된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자유의 상징으로 대변되
는 ‘축제’였다.
* 80년 12월 출소한 김지하를 찾아 원주와 해남까지 찾아갔던
허문도
허문도는 일본 유학 당시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국가형성과정
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일본의 천황주의와 국
수주의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전두환의 비서실장으
로 전격 발탁되어 5공의 체제홍보를 맡게 된다.
81년, 정무 제1비서관이었던 허문도가 술을 들고 출소한지 얼마 되
지 않은 김지하를 찾아 그가 살고 있던 원주로 간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당성과 정치적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여의도 광
장에서 열릴 국풍 행사에 참가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지하
는 허문도를 피해 해남으로 내려가고 허문도는 다시 해남으로 가
지만
끝내 김지하를 설득하진 못한다. 허문도의 국가주의를 완성시키
기 위한 포섭 대상은 김지하 뿐만 아니라 그를 선두로 한 문화운동
그룹에까지 미친다.
*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채희완을 포섭하라!
<소리굿 아구>는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였으나 70년대 전반을 통
해 크게 일어난 마당극 운동의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이를 연
출했던 김지하는 투옥되지만 80년 12월 석방되었을 때 시대는 많
이 변해있었다. 마당극에 참가했던 저항의 상징인 김지하를 비롯
하여 김민기, 연탈계의 교주로 불리우는 채희완, 소리꾼 임진택은
모두 회유 대상이 되었다. 그 목적은 국풍에 참가하여 문화적 리더
쉽을 발휘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신체제하에서 탄압받던 문화예술
계 인사들을 포섭하여 공개적으로 놀 수 있는 마당을 마련해주고
자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참여를 거부하고 임진택은 KBS
PD를 그만두고 마당극 소리꾼의 역할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허문도는 그들 계보의 아래쪽에 위치한 각 대학의 연탈반
학생들에게 접근한다.
* “청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대학
생들을 포섭하려 했던 국풍의 주최측
결국 군인, 공무원들 서울대 재학생으로 위장참여!
폭발적인 민주화의 열망으로 술렁이던 대학가를 잠재우기 위해 정
부에서는 이들을 체제내화 시키고자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
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다.”라는 구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80년도
부터 퍼져 나가기 시작한 각 학교의 탈반을 국풍에 참가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도 참여를 거부하자 허문도는 새로운 묘안을 내놓는
다. 자신의 학교 후배인 서울대학교 풍물패를 참가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풍물패 “두레”의 현역 회원들마저 제의를 거절하고 군인이
나 공무원 등을 동원하여 진행시키게 된다. 풍물패의 졸업생들과
군대에서 복무 중이던 이들까지 모두 데려와 “서울대”라는 이름으
로 위장 참여시키고 공연 중 혹시라도 다른 행동을 할까봐 전경들
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상태로 진행된다.
국풍은 애초 허문도의 계획과는 달리 청년이 아닌 전문 예능인들
위주의 잔치로 바뀐다. 16만평의 여의도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기획 당시 주최측의 포섭 대상이 되었던 그룹의 사람
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 國風 ‘81, 그 이면에 숨겨진 파시즘
- 전두환, 허문도 친필서명! 국풍 관련 정부문서 최초공개
“넷째, 교육혁신과 文化暢達로 국민정신을 개조하려는 것입니
다.” 1980년 9월 1일 육군 대장에서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 등
극한 전두환의 제 11대 취임사 중 일부이다. 그리고 5공화국 정부
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과 민족
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 라고 문화예술 분야를 언급
한다. 또 민족문화 창달이 국정 4대 지표로 등극함으로써 문화가
국가의 적극적 통치 전략으로 격상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에 정보공개청구를 하여 얻은 국풍 81의 효시였던 “전
국대학축제경연대회” 문서에는 버젓이 전두환과 허문도의 친필서
명이 담겨 있다.
대규모 군중동원으로 문화정부의 이미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전
통문화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는 문화적 학살로 많은 이들의 지
탄을 받은 전두환 정권. 민중들마저 자신의 권력 안에 수용하려 했
지만 매해 개최하려던 계획과는 달리 한해로 끝나고 말았던 여의
도 드넓은 광장에서의 화려한 축제를 재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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