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 27일 (일) / 제 88 회

<육영수와 문세광>

제 2 부 : 문세광을 이용하라

육영수 저격사건의 범인 문세광의 본거지 오사카에는 이 사건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증인들이 있다. 문세광의 가족과 한청 동료, 
오사카 중앙정보부 정보원들의 증언은 한국의 수사기록과는 판이
하게 다르다. 
인권탄압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됐던 박
정희. 특히 DJ 납치사건은 한일관계까지 악화시켰다. 
이 때, 육영수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한일관계는 역전됐고 박정희
는 난국을 돌파했다. 
과연, 육영수 저격사건은 한일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중
앙정보부의 공작이었을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문세광의 일본 행적을 좇아 사건의 진실
을 추적했다.  

사형 20일 전 문세광 면회한 아사히 신문 타메나 기자 단독 
인터뷰!
문세광이 사형당하기 20일 전, 그를 면회한 일본 아사히 신문 타메
나 기자에 따르면, 문세광은 교도관들과 웃고 이야기하며 면회장
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10월 19일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1월 13일 고등법원에서도 사
형이 확정됐는데도, 문세광은 자신이 사형을 당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고 타메나 기자는 증언했다. 기자의 증언이 사
실이라면, 왜 문세광은 자신이 사형되지 않는다고 믿었을까.   

문세광의 자필 활동 수첩 최초 공개! 
문세광의 자필 활동 수첩이 최초 공개된다. 1973년과 1974년, 한국
청년동맹 이쿠노지부의 활동 내용이 담긴 활동 수첩에는 문세광
이 참가한 집회 내용과 집회 참가자, 정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
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아카후도 병원에 입원할 때 사용
한 가명 '가와카미' 의 주소와 전화번호, 병원 입원 과정 등이 기록
되어 있다. 

미스터리의 열쇠, 사라진 한 통의 편지
수사기록에 따르면, 1973년 9월 7일 문세광은 한통의 편지를 보냈
다. 수취인은 당시 한국청년동맹 중앙 위원장이었던 김군부. 
편지의 내용은 그 해 8월 8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된 김대중
을 구출하기 위해 오사카 총영사관을 점거해야 한다는 과격한 내
용이었다. 
그런데, 이 편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건 후인 1974년 10월 9
일. 민단과 중정에서 재정 지원을 받던 통일일보의 지면을 통해서
다.  취재팀이 만난 김군부는 “편지를 받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편지는 1년 동안 사라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났다. 과연 누구
의 손에 있었던 것일까. 

조작된 배후,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
수사기록에는 범행을 위해 문세광이 사격연습을 한 곳이 '조총련 
계열' 의 아카후도 병원의 지하실 혹은 옥상이라고 되어 있다. 그
러나 취재팀이 당시 병원장을 직접 만나 취재한 바에 따르면 아카
후도 병원은 주택 밀집지에 모여 있는 '민단 출신 병원장' 의 병원
이었다. 이곳의 옥상에서 사격연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구
나 이곳에는 지하실이 없다. 
한편, 한국청년동맹 선배 K는 사건 당일 저녁에 찾아온 일본 경찰
관들이 문세광이 출국 전 K를 찾아와 차를 맡기고 간 것을 이미 알
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몰랐던 범행 증거물을 차 
트렁크 안에서 찾아냈다고 말했다. 증거물은 오사카 고쯔 파출소
에서 문세광이 저격에 사용할 권총을 훔칠 때 사용한 장비들이었
다. 수사기록의 허구를 밝히는 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을 생생히 담
았다. 

얼굴 없는 배후, 사라진 금융업자 I 씨. 
수사기록에 의하면, 문세광을 아카후도 병원에 위장 입원시켜 사
격연습을 하게 한 사람은 '이께다' 라는 아카후도 병원 직원이다. 
그러나 당시 아카후도 병원장의 증언에 의하면, 아카후도 병원에
도 이케다라는 직원은 없었다. 
사건 발생 후 한해가 지난 75년 8월 경, 일본과 한국의 각 일간지에
는 아카후도 병원에 문세광을 소개한 사람은 ‘이께다’가 아니라 ‘I 
선생’ 이며, 금융업자였던 그가 증발했다고 보도했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3년 10월, 동경에서 오
사카 한청을 찾아온 ‘I'는 돈이 많은 금융업자였고, 동포들보다 한
국말을 잘해 회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I 씨는 74년 6
월 중순, 폭력조직에 총기 구입을 의뢰했다가 취소하기도 했다. 사
건 1년 후 그는 아내와 자식을 버려둔 채 증발해버렸다.’
문세광의 일기를 보면, I 씨는 73년 이후 문세광이 가장 자주 만났
던 사람으로 기록돼 있다. 문세광의 동료들은 “I 씨는 중앙정보부
의 정보원이었다”고 말한다. 
'I' 씨는 박정희 저격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오사카 중앙정보부는 문세광을 이용했다?
문세광의 동료와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문세광은
“깊은 사상없이 감정적이고 단순했던 문세광은 정보부에 이용당했
다.” 는 것이다. 
오사카 총영사관에는 중앙정보부 파견 영사들이 많았다. 이들은 
오사카 동포들의 정보를 수집해 한국에 보고했다. 정보는 동포들 
사이에서 활동하는 정보원에게서 나왔다. 
당시 일본 국회에서까지 거론된 중정 정보원 A 씨. 당시 일본 신문
기사에 따르면, A 씨는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받고 문세광을 미행
했던 인물이다. 취재팀은 당시 오사카의 중정 정보원으로 활동했
던 사람들을 통해 A 씨의 실체를 확인했다. 

한일관계의 역전, 박정희가 얻은 것 
위와 같이 문세광을 둘러싼 정황을 미루어볼 때 문세광은 중앙정
보부에 이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왜 중앙정보부는 문세
광을 이용해야만 했을까. 
일본 내 반 박정희 여론이 들끓었던 김대중 납치사건. 외교 열세
에 놓였던 한국정부.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지 1년만인 1974년 8월 
14일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게 김대중 납치사건의 수사를 중지하
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다음날 육영수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단교 위협까지 가하며 일본정부의 사
죄를 요구한다. 
결국 수상의 친서를 들고 시이나 특사가 사죄를 위해 방한한다. 
한일관계는 일순간 역전됐다. 
일본의 전문가는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됐던 박 정권이 한일관
계의 여러 문제를 봉합하고 일본의 지원을 더 요구할 수 있는 근거
를 제공한 것이 결과적으로 문세광 사건이다" 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