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 27일 (일) / 제 81 회
▣ ‘신의 아들’과의 전쟁
창군 이래 지난 50여년간 만연했던 병역비리는 숱한 의혹을 불러
일으키며 국민적 위화감을 조성하고 나아가서는 군에 대한 불신감
을 조장해왔다. 이른바 ‘신의 아들’이나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유
행어는 이러한 어두운 현실을 반영했던 것이다.
병역비리에 대한 본격 수사는 1998년 원용수 준위의 비밀 수첩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고, 이후 서울지역 면제비리의 대부인 박노
항 원사의 수사로까지 확장된다. 당시 병역비리 군검 합동수사는
‘고위층 병역실명제’를 법제화시키는 산파역이 되었으나, 또한 기
득권층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왔다.
● 수사팀의 특수요원, 얼굴없는 ‘K’씨
98년 병역비리 수사팀에는 ‘정보 제공자’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내
부고발자가 있었다. 그는 대구 지역의 면제비리 시장을 석권한 병
무 브로커였으며 전국적인 병무비리망도 윤곽을 그려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당시 수사팀 외에는 비밀에 부쳐진 ‘얼굴없는 K''씨,
그가 바로 김대업이다.
수사팀장이었던 이명현 소령과 병무브로커 김대업의 만남, 이들
의 만남은 이후 일어난 대규모 병역비리 수사의 서막을 여는 순간
이었다. 김대업은 ‘병무비리의 몸통을 끝까지 추적할 의지가 있는
지’ 수사팀에 확인하고나서 합류했으며, 당시 군검찰로부터 어떤
보수도 받지 못한 채 ‘신의 아들’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 징병검사 군의관들, ‘비리 시스템’을 공개하다.
면제판정의 최종 책임자인 징병검사 군의관들이 입을 열었다. 면
제를 하기 위해 드는 평균비용은 대략 3천만원 정도이지만, 수요자
의 신체 상태와 재산정도에 따라 최고 억대까지 거래되었다고 한
다. CT 필름을 바꿔치는 ‘고전적인 수법’에서 한쪽 눈만 라식수술
을 해 부동시인 것처럼 꾸민 뒤 면제판정을 받고 나서 다시 반대
쪽을 수술하는 ‘교묘한 기법’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방법이 동원
되었다고 증언했다.
군의관들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들은 기무요원과 헌병요원
들 그 다음에 병무청 직원’이었으며, 면제비리는 혼자서 할 수 없
는 시스템적인 범죄였다고 밝혔다. 군인 신분인 군의관들은 ‘힘이
있는 기관요원들의 청탁’을 거절하기 힘든 구조였으며, 마치 관행
처럼 이어져 내려와 자신들을 옥죄었다고 토로했다.
● 강력한 저항 :
‘군의관들의 자백을 막고, 김대업을 제거하라’
수사 검찰관들은 당시 수사가 깊어질수록 면제비리 연루자들의 저
항이 격렬해졌다고 증언한다. 한편으로는 수사협조 군의관들의
‘자백을 막는 방식’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병역비리 수사의 첨병
이었던 ‘김대업을 제거’하는 수법으로 구체화되었다고 밝히고 있
다.
기무사 상층부는 김대업을 수사에서 배제시키기위해 청와대와 국
방부장관 등에게 ‘즉각 김대업을 구속해야’한다는 보고를 했던 것
으로 드러났다. 당시 수사검사들은 병역비리와의 전쟁 외에도 ‘또
하나의 내부전쟁’을 치렀다고 증언한다.
● ''장정 바꿔치기''에서 ''전문 브로커 시스템''까지
논 몇 마지기를 준다는 약속에 지주의 아들 대신 두 번 군대를 간
사례도 있었다. 면사무소 병사계 직원이 돈 3만원으로 ‘약을 써서’
면제를 받는 방법, 그리고 ‘장정 바꿔치기’와 같은 대리 신검도 50,
60년대에는 횡행했다. 특히 현재 지도층 중에 상당수가 ‘고령에 의
한 면제’가 많은 이유는, 병무 공무원들에게 돈 몇푼 쥐어주고 ‘30
세까지 징병검사를 미루기만 하면’ 되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
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70년대부터 병무행정이 체계화되자, 면제비리는 ‘합법적인 허위진
단서’를 통해 이뤄져왔다고 당시 군의관들은 증언한다. 82년부터
시작된 ‘6개월짜리 석사장교’ 제도가 90년에 폐지되자 면제비리 시
장은 폭발적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른바 ‘신의 아들’과 ‘어둠의 자식
들’이라는 유행어가 나온 것도 이 시기와 일치한다.
● 기무사 반장과 병무 브로커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
군병원의 기무사 반장은 자신이 저질러온 면제비리와 압력성 청탁
이 500여회도 넘는다고 고백한다. 청탁사항을 해결하지 못하면 무
능한 요원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당시 분위기였으며, 기무요원 본
연의 임무를 망각할 정도로 면제청탁에 시달렸다고 증언한다.
박노항 수사를 담당했던 수사 검사는 박노항이 면제비리 시장에
서 차지하는 위치를 증언한다. 통상 알려진대로 박노항이 몸통이
라고는 하지만 그가 상대해온 부정면제자들은 중산층의 범위를 크
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상류층 수요자는 그 이상의
방법으로 면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김대업은 현재 ‘2002년 병풍’을 제기한 후 감옥에 수감되어있다. 그
의 발언 중에 일부 명예훼손이 있으며 공무원 사칭의 혐의가 있다
는 판결이었다. 김대업은 제작진에게 묻는다. ‘사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제 역할을 했다면, 자신과 같은 브로커가 나서서 수사에
참여하고 또 병역비리 문제를 이 사회에 제기할 이유가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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