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21일 (일) / 제 76 회

▣ 분단의 기원

* 소련으로 보내진 일본 특사, ‘소련의 참전을 막아라!’
1945년 2월 일본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평공작을 계획한다. 7
월, 도쿄에서의 비밀회담 후, 천황은 
소련의 대일전 참가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마침내 7
월 10일과 11일, 일본은 소련의 외
상 몰로토프와, 외무차관 로조프스키과의 교섭을 시도, 고노에를 
특사로 파견한다. 
그동안 일본의 화평공작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번 제작진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소
련과의 화평 공작에서 일본이 소련에 제안한 것은, 1905년 러일전
쟁으로 점령했던 쿠릴열도와 남사할
린의 반환,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의 철수 등 소련이 그동안 갈망
해 왔던 지역에 대한 이권을 넘겨주
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것이었
다. 이는 다른 지역은 다 양보하더
라도 한반도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 구
미당기는 제안을 거부한다. 

* 소련군, 서울에도 왔었다  
''일본인의 뼈에 교훈을 새겨줘라.'' 스탈린이 소련국민에게 대일전 
참전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러일
전쟁 패배의 치욕을 씻자'' 는 것이었다. 이른바 ''조선해방전쟁'', 그
것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소
련 참전자들은 ''조선해방을 위해 피를 흘린 유일한 외국군대'' 라
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한반도에서
만 소련군은 4,963명의 인명 손실을 입는다. 
소련군은 8월 11일 밤 웅기를 점령하고, 12일 아침 나진을 탈환한
다. 그리고 태평양 함대의 지상 전
투 부대는 일본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16일 오후 청진항 전체를 점
령한다. 이후 소련군은 계속해서 남
진한다. 거칠 것 없는 소련군의 진군은 어느 날 갑자기 멈추게 된
다. 소련군 부대에 전달된 명령은 ꡒ
더 이상 진군하지 마라!ꡓ였다. 이대로 진군한다면 한반도 전체의 
점령도 가능했던 시점에서 그들은 
진군을 멈추고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일부 소련군은 서울까지 진입, 해방군으로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
았다. 그동안 소련군이 38선 이남까
지 진군했다는 소문은,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미군에게 전달한 거
짓정보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러시
아의 증언자에 의하면, 소련군은 서울에 입경, 며칠동안 머물렀다
는 것이다. 이들도 38선 이남으로 진
격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고 서둘러 이동한다.

* ''붉은'' 한반도 우려한 미국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의 국경을 넘은 날 밤, 미국의 본 스틸 대령
과 딘 러스크 소령은 조그만 지도에 
위에 한반도의 38도 분할선을 긋는다. 당시 소련군은 거침없는 속
도로 남진하고 있었고, 한반도에 가
장 가까운 미군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다. 가장 빨리 한반도
에 상륙한다 해도 한 달이 예상되었
다. 그 기간이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간다는 것이 
미국의 우려였다. 
미국 정부는 38도선을 경계선으로 남과 북을 각각 미군과 소련군
이 점령하자는 제안을 소련에 제안하
면서도 내심 불안해한다. 미국이 보기에 소련이 그 제안을 받아들
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
러나 뜻밖에도 소련측은 아무런 반대 입장을 표명하지 않음으로
써 사실상 이 제의를 수용하는데… 
왜 하필 38도선이었을까? 이것을 제안한 미국의 목적은 무엇이었
나? 그리고 소련이 순수히 미국의 제
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인가? 

* 스탈린, 북한의 공산화 의도 없었다!
소련은 점령 초 북한지역의 지도자로 생각한 사람은 김일성이 아
니라 조만식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 점령 후 한 달 뒤인 9월 20일, 스탈린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실시해야할 기
본적 방침을 담은 7개 조항의 훈령을 보낸다. <스탈린 훈령>의 핵
심은 두 가지! ‘북조선에 소비에트 
권력기관을 창설하거나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대신 ‘부
르주아 민주주의 권력 수립을 지원
할 것’이었는데... 

제작진이 독점 인터뷰한 88여단 소속 참전자 바실리 이바노프씨
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소련군 88여단
에 속해 있었던 김일성 부대는 모두 100여 명, 그러나 그 중 단지 
20여 명만이 이른바 소련의 ‘조선해
방전쟁’에 동행했다. 이들은 통역과 안내 등의 역할을 맡았다. 김
일성은 전쟁이 끝난 후 9월 18일이 
되어서야 소련배를 타고 원산에 도착했다. 김일성이 소련군들로부
터 똑똑하고 유망한 젊은이로서 평
가받기는 했지만 우선 당장의 지도자는 아니었다.

* 미군정의 실상과 실책을 비판한 리차드 로빈슨 최초로 입을 
열다!
리차드 로빈슨(‘미국의 배반’, 원제 ‘Betrayal of a nation''의 저자)
은 1945년 11월 미점령군으로 한국
에 도착하여 미군정청 서기로 근무한다. 미군정의 상황을 누구보
다도 잘 알 수 있었던 그는 당시 미군
정의 정책을 비판한다.
로빈슨은 미군이 한국에 도착할 당시 한국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
었음을 지적하고, 미군정이 친일파
와 우익에 의존해 점령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고 이야기한
다. 특히 그가 무자비하게 좌익을 탄
압하는 경찰의 횡포를 묵인하는 미군정의 정책을 비난하는 기사
를 쓰자, 본국에서는 그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결국 로빈슨은 47년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하는
데, 57년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 미국, 1945년 이미 남한만의 단독정부 계획, 완성은 트루먼 
독트린 
당시 미국의 최고의 목표는 한국의 민주적 통일 정부 수립이 아니
라, 소련의 세력과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좌익을 탄압하고, 우익과 결합하는 동시
에 남한만의 단정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의 첫 번째가 45년 가을에 이미 나타난다.

1947년 미국은 소련을 압박하지만, 소련은 ‘미소 양군 동시 철수’
를 주장하자 남한 단정계획을 실행시
킨다. 즉, 미국은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를 UN에 상정하기로 결
정한다.
통일된 한반도를 주장하던 민족주의자들은 하나 둘씩 암살되고, 
1948년 남북한 단독 정부가 세워지
며, 이러한 상황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