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9일 (일) / 제 61 회

▶ 섹스 동맹 - 기지촌 / 연출 : 이모현

역사의 사생아, 기지촌 여성
이제는 익숙해진 미군범죄라는 용어, 그러나 사실 우리 사회에 "미
군범죄"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1992년 윤금이 살인 사
건 때부터였다. 기지촌 여성이었던 윤금이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군
에게 엽기적인 살인을 당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지만 사실 이 사건 전에
도 많은 기지촌 여인들이 윤금이 못지 않은 변태적인 방법으로 미
군에 의해 살인 당하고, 유린당해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기지촌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보호받아야 할 최소한의 권리마저 인정받
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기지촌 여성, 사실 그들은 불평등한 한
미관계에서 태어난 불행한 사생아들이다.

1945년 9월 8일, 2차 대전 전승국으로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
해 이 땅에 미군이 첫 발을 디딘 이후, 동두천, 의정부, 오산, 평
택, 부산 등 전국 18개 도시에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지촌이 들어섰고, 6.25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30만이 넘는 
여성들이 기지촌을 거쳐갔다. 

미국 정부는 자국의 병사들에게 안전한 휴식과 섹스를 제공하길 
원했고,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군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달러와 안보
의 약속이 필요했다. 양국간의 이해에 따라 유지되어 온 기지촌의 
거래는 50여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다 . 

군대 창녀 주식회사 - 군산 아메리칸 타운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부패한 자유당 정권과의 차별화
를 위해 각종 사회 정화 조치를 시행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매매춘
을 금지하는 "1961년의 윤락 행위등 방지법"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특별구역>을 지정해 
그 지역에서는 윤락행위등 방지법의 적용을 유보, 매매춘을 용인
했는데 이러한 백여개의 특별 구역중 60퍼센트가 기지촌이었다. 
사실상 기지촌의 존재가 매매춘의 적극적인 단속을 위한 법 집행
을 불가능하게 한 주요 요인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정부의 주도 하에 매매춘 주식회사가 설립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군산에 있는 아메리칸 타운이다. 1969년 미군 제 8 전
술 전투 비행단이 주둔해 있는 군산에 만들어진 아메리칸 타운은 
새마을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지원하에 만들어진 <군대 창
녀 주식회사>였다. 오로지 미군들만의 매매춘을 위해 폐쇄적으로 
지어진 계획 도시 아메리카 타운 안에서 미군들은 필요한 모든 향
락을 원스톱으로 즐길 수 있었다.

기지촌 정화운동 - 성병 대토벌과 몽키 하우스
기지촌을 둘러싼 미국과 한국의 굳건한 동맹 관계는 1970년에 있
었던 기지촌 정화 운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1969년 닉슨 독트
린 이후 주한 미군 감축이 추진되자 민심은 동요하고 71년 대선에
서의 아슬아슬한 승리로 정치적 위상이 불안하던 박정희 정권은 
초조해진다. 

이미 오래 전부터 주한미군은 기지촌 환경 개선을 요구해오고 있
었고, 다급해진 박정희는 주한미군의 주둔을 보장하기 위한 자구
책의 일환으로 기지촌 환경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섰
는데 이것이 바로 <기지촌 정화 운동>이다. 박정희는 <기지촌 정
화 위원회>를 청와대 직속기구로 설치하는 등 이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기지촌 정화 운동의 핵심 사업은 기지촌 여성들을 상대로 한 성병 
정화였다. 당시 기지촌 여성과 미군들의 성병 발병율이 매우 높았
는데 미군측에서 여성들에게 그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들에 
대한 관리를 한국 정부에 요구한 것이다. 기지촌 여성들은 이른
바 ''토벌''이라고 불리는 불심 검문에 의해 길거리나 클럽에서 무차
별적으로 체포되어 성병 검사 유무를 체크 받아야 했고, 미군에 의
해 성병이 있다고 지목 당한 기지촌 여성은 정당한 검사 절차 없
이 곧바로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는 성병 관리소로 보내져 감금, 격
리치료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의 인권이 유린당했고, 독한 치료제로 인
해 고통받았으며, 치료과정에서 페니실린 부작용으로 쇼크사하는 
여성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병 치료, 관리의 최대 수혜자
는 물론 안전한 섹스를 제공받는 미군들이었다. 

애국자, 담요부대 
기지촌 매매춘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정책적으로 후원되고 장려되
는 산업이었다는 증거는 그밖에도 많이 있다. 각 지자체에서는 정
기적으로 기지촌 여성들을 모아놓고 미군에 대한 예절교육, 정신
교육 등을 시켰는데 그 골자는 "여러분은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
자이니 자긍심을 가지고 국익을 위해 헌신하라"는 것이었다. 매매
춘이 불법인 나라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매매춘을 애국적인 행위
로 미화하며 조장한 것이다.

미군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이들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여
성들의 존재가 필요했는데 이는 팀스피리트 훈련때도 예외가 아니
었다. 기지촌 여성들은 팀 스피리트 훈련이 있을 때면 훈련지를 따
라 원정 매춘에 나서기도 했는데 이들을 소위 <담요 부대>라고 불
렀다. 

이들은 포주들의 강요아래 일제 시대 군위안부가 병사들을 상대했
던 것과 흡사한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매매춘을 해야 했고, 이 때
도 정부는 단속은 커녕, 그 현장에까지 임시보건소를 세워놓고 기
민하게 여성들의 성병을 관리했다. 물론 미군들의 건강을 위해서
였다.

이 외에도 
전두환 정권의 기지촌 정비 5개년 사업, 정부와 포주의 유착관계, 
끊이지 않는 기지촌 여성 대상 범죄, 소외당한 기지촌 여성들의 
삶 등도 다루어진다. 주한 미군 주둔을 위한 제물이었던 기지촌 여
성들, 절대 빈곤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기지촌으로 흘러 들어갔
던 그들에게 남은 건 여전한 가난과, 변태적인 미군 범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사회의 천시와 냉대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들
의 자리를 필리핀과 러시아의 가난한 여성들이 들어와 똑같은 방
식으로 메우고 있다. 

기지촌은 모든 사람에게 우리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공간이었
다. 그래서 기지촌을 말할 때 미군이 좋아 몸 팔러 들어간 부도덕
한 여인들의 개인적인 돈벌이 매춘공간으로 애써 폄하하려 해왔
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서는 기지촌은 타락한 몇몇 여성과 업주들
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인 거래가 아니라 미국과 한국, 두 국가가 
정책적으로 조장하고 후원한 국가적인 산업이었음을 1971년 박정
희 대통령 당시 벌어진 기지촌 정화운동을 중심으로 기지촌 여성
들 및 미군 관계자, 정부관계자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통해 밝혀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