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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0일 목요일 <음악에세이>

음악에세이 - 노래가 있는 풍경

 

제 420 화 - 만추

 

(M) 주제음 만추/ 이승환

 

(E) 기차 소리

 

남      기차를 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무작정 서울역에 가서 표를 끊었다.

        작은 간이역까지 모두 멈추는 완행열차였다.

        자주 멈췄고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올랐다.

        그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비워지고

        머리도 비워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작은 역에서 한 여자가 올라타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머플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자였다.

        나는 창밖을 보고 있었고

        그녀도 그런 것 같았다.

(M)`새벽기차/ 다섯손가락

 

여    저기... 혹시 전화기 있으세요?

 

남    자리에 앉은 지 한참이나 지난 후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여    죄송하지만 전화 있으면 잠시만 쓸 수 있을까요..

남    네. 그러세요.

 

(E) 꺼내서 주는

 

여고맙습니다. 잠시만...

 

남    전화기를 받아든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거기 서서 한참이나 통화를 했다.

    왜 안 오나 싶어 힐끗힐끗 바라봤는데

    유리창 너머 서 있는 그녀는 누군가와 언쟁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얼마 쯤 후엔 눈물을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E) 다가오는

 

여    고마워요. 잘 썼어요.

남    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남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눈이 부을 정도로 울었을 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 묻고 말았다.

 

여      아니에요.

 

남      역시 괜한 걸 물었다. 지금 난 내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말이다.

 

여사실은... 일이 있어요. 제 얘기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M)여울목 / 한영애

 

(E) 맥주캔 따는

 

남    드세요.

여    고맙습니다.

 

남    속이 답답해서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고 싶었던 참이었다.

 

여    어디까지 가세요?

남    종착역까지 갑니다.

여    ...네. 왜 이 기차를 타셨어요? 서울에서 타신 것 같은데... 더 빨리

      가는 기차편도 있잖아요.

남    뭐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있고. 빨리 가봐야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여    저는 감옥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남    ....!

여    고향집에 가면 누구라도 저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더라구요. 남편 연락처를 겨우 알아내서 전화했는데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하네요.

남    아까 전화한 게 그 전화였어요?

여    음성을 여러번 남겼는데 연락이 없어서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전화했었어요.

남    ..네에..

여    감옥에 갈 때 그 사람이 그랬거든요.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고.

        중간에 소식이 없어도 아무 걱정 말고 있으라고.

남    세월 앞에 거짓말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아마 그 분도 그땐 그게 진심이었을 겁니다.

여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남    그럼요.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오늘... 아내와 이혼하고 이 기차에 탔는걸요. 뭐..

(M)기대어 앉은 오후에는 / 김광석

 

(E) 기차 가는 소리

 

남    의외였다. 작고 왜소해 보이는 여자가 어떤 죄를 지었길래

        수감생활을 했던 것일까.

 

여    궁금하시죠. 무슨 죄를 져서 감옥까지 갔나..

남    아뇨. 아니에요.

        ... 사실은 좀 그렇기는 한데.. 불편하시면 얘기 안하셔도 됩니다.

여    거기서 나오면 그동안 억울했던 내 마음

        들어줄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없어요.

남    .......

여    나 맥주 한 캔만 더 먹어도 될까요?

남    그러세요.

(E) 맥주캔 따는 소리

 

여    스토커처럼 날 따라다니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경찰에 도움도

    청해보고 별 수를 다 써봤지만 떨어져 나가질 않았어요.

    결혼을 했는데도 마찬가지였어요. 오히려 남편을 협박하고

    회사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렸어요. 그리고 그날 밤...

    남편과 싸움이 붙었는데 그 사람이 크게 다쳤어요.

    의식불명 상태가 됐죠.

남    그런데 왜 그쪽이...

여    난 남편과 결혼한 지 석달밖에 안된 상태였고

       우리 남편은 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남    그래서 대신 다 뒤집어쓴 거에요?

여    그때까진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만하면 됐다.. 이대로만 살면 되겠다..

       인생은 별 게 아니구나...

       그런데 그날 이후 모든 게 다 변했어요.

       난 지금... 사는 게 너무 무서워요.

(M)The Rain / Melody Gardot

 

(E) 기차 가는 소리

 

남날은 점점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고.

창밖으론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여    그런데 그쪽은 왜 이혼을 했어요?

남    그쪽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내 이야기는 별 거 아닌 것 같은데요..

여    (조금 웃음) 그런가요?

남    난 결혼한 지 20년이 됐어요. 아들이 둘이구요.

        대학 때 결혼해서 지금까지...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여    ....

남    휴일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서

    내 가족이 부족함 없이 살게 해주는 게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아내에게도 우리 아들들에게도

    내 자리가 없더라구요. 그래도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한테 섭섭한 것들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구요.

    그런데... 얼마 전 하던 일이 잘 안돼 회사가 문을 닫게 됐어요.

    일은 잘 안됐지만... 그래도 직원들 퇴직금 챙겨줄 정도는 됐고

    내 가족들 길바닥에 나앉을만큼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는데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더군요.

여    ...왜요?

남    그동안 나랑 살면서 행복한 적이 없었답니다.

    그것도 기막힌데... 아들 녀석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 엄마 역성을

    들면서 헤어지라고 하더라구요.

    내 기억에만 없는 건지... 난 도무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여    서글펐겠네요.

남    서글펐죠. 참담하고. 허탈하고.

    몇 달을 버텨봤는데 더 이상은 갈 데가 없는 것 같아서

    남은 재산 몽땅 다 주고 오늘 이혼했어요.

여    ...네..

 

(E) 기차 소리 나다가

 

남    인생에 가을도 없이 겨울이 와 버린 것 같은...기분이에요.

(M)C'est La Vie / Emerson, Lake & Palmer

 

(E) 기차에서 내리고.. 바람 부는

 

남    종착역에 도착했을 땐 밤 9시가 넘어 있었다.

    작은 역사엔 석유 난로가 놓여 있었고

    우리는 일단 언 몸을 그 옆에서 녹였다.

 

여    작아도 따뜻하네요.

남    그러네요... (사이) 어디로 가실 거에요?

여    모르겠어요. 일단.. 잘 곳 먼저 찾아보구요.

남    숙소는 저도 알아봐야 하니까 같이 가세요.

    그전에 식사부터 하실래요?

여    ...아니에요.

남    혹시.. 돈 때문에 그러시면 제가 살께요.

여    자꾸.. 신세만 지게 되는 게 죄송해서요.

남    허기지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아두요. 사람을 굉장히 서럽게 하거든요.

    우리 둘 다 여기서 더 서러워지면 안되잖아요.

 

(E) 국밥 놔지고

 

남    드세요.

여    고맙습니다.

 

남    바닷가 매운 바람이 부는 어느 작은 국밥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그릇을 앞에 놓고

    우리는 체온만큼 따뜻한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M)Falling Slowly / Glen Hansard & Margeta Irglova

 

남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바닷가에 산책을 나갔는데

    그녀가 먼저 와 서 있었다.

 

(E) 파도 소리

 

남    벌써 일어나셨어요?

여    네.. 잘 주무셨어요?

남    춥더라구요 방이..

여    전 그런 데엔 익숙해요. 해 뜨는 거 보고 싶어서 나왔어요.

남    나두요. 그런데 이런 옷으로... 가을옷이잖아요.

여    ....

남    이거 입으세요.

여    아니에요.

 

남    난 억지로 외투를 그녀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바다 끝으로 혀처럼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나와 상관없이 세상은.. 세월은... 무상하게 흘러가는구나...

    복잡했던 마음이 울컥... 하더니

    눈물샘이 터져 버린 것처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도 그런 것 같았다.

    우리는 조금 떨어져 서서 외면한 채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난 만난지 만 하루도 안된 그녀가

    내 모든 마음을 이해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 앞에서는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을 것 같았고

    내가 위로해줄 수도... 위로 받을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생각만으로 무한한 안심이 되었다.

(M)사노라면 / 나윤선

-------------------1부 끝 --------------------

 

(E) 사찰 풍경 소리

 

여    이런 데 이렇게 좋은 절이 있네요.

남    대학 땐가... 와 본 적 있어요.

여    부인이랑요?

남    그랬겠죠.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을 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여    그런데 원망이 없어요?

남    솔직히 억울한 건 있죠. 말 안해도 내 마음 다 알아줄

    유일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여    나한텐.. 원망만 남았어요. 그 사람 대신 죄를 뒤집어 쓰고 들어갈 때

    그땐 절대로 배신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남    이해해요.

여    어젯밤 늦게 언니랑 통화가 됐어요.

남    그랬어요?

여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셨더라구요. 언니는 그게 다 저 때문이라고

    했어요. 두분 모두.. 제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남편을 찾아가 사실을 알아내려고 무지 애를 쓰셨는데....

남    .....

여    (감정 애써 추스르며) 그 사람이 정말 매몰차게 내쳤대요.

    나 그렇게 되고 나서 단 한번도 우리 가족 찾아간 적도 없었구요...

    우리 둘이 함께 모았던 돈도 그 사람이 모두 가져갔대요.

    엄마 수술비가 없어서 언니가 찾아갔는데...

    거절당했대요.

남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여    제가 어리석었죠. 그런 사람을 믿었던 게...

    1년도 안돼 다른 여자랑 결혼했고... 지금은 덕망높은 교수님으로

    너무나 잘 살고 있다네요.

남    얘기 듣고 많이 힘들었겠네요.

여    아침에 일찍 바다에 나간 게 아니었구요.

    어젯밤에 전화 하고 나서 방에 있을 수 없어 거기로 나간 거였어요.

    밤중에 몇 번씩이나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죠

남    ....!

여    서서히 새벽이 되면서... 정말 죽어버리려 그랬는데

    그쪽이 걸어오는 게 보였어요. 어쩌면 나를 살린 거에요.

남    그런 맘 갖지 말아요. 더 잘 살아서 복수해야죠.

여    내가 더 잘 살 수 있을까요?

    이런 꼴로....

남    ....

여    친언니도 더는 전화하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이런 내가 어느 언덕에 기대서 살 수 있을까요.

(M)한번만 울고 말자 / 장혜진

 

(E) 걷는 소리

 

남    어디..로 갈 거에요?

여    서울로 가려구요.

남    그 사람 찾아가게요?

여    네

남    ...가서 뭘 어쩌려구요.

여    뭘 어쩔건지는 얼굴 보고 결정해야죠.

남    내가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그러는 게 낫겠어요.

여    왜요.

남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잖아요.

여    가만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어요.

남    스스로 망가지는 건 막을 수 있죠.

여    사람한테 마음 다쳐봐서.. 잘 알잖아요.

        난 정말 힘들어서 이래요.

남    알아요. 이해해요.

여    .....

남    얼마나 아프고 쓰릴지.. 얼마나 억울할지.. 나도 짐작할 수

        있어요. 그런데요. 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요?

        남은 인생까지 망가뜨려가면서 복수할만큼?

여    .....

남    지금까지도 그 사람 때문에 힘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남은 인생은

        본인을 위해서 살아요.

 

남    그녀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M)너무 아쉬워 하지마 / 어떤날

 

(E) 헉헉대며 오는

 

여    여기 뭐가 있는데요.

남    이거요. 이 나무..

여    나무?

남    이 나무가요. 삼백년도 넘은 나무래요.

여    .....힘들었겠네요.

남    그러니까요. 아무리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가지 못하고

        여기서 삼백년을 버텼던 거잖아요.

여    (웃음) 왠지 위로가 되네요.

남    아주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여기 한번 더 와 봐요. 어쩌면 지금 가졌던 마음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질 거에요.

여    .....

남    내 말 믿고... 나중에 꼭 여기 다시 와 봐요.

(M)Lullaby for an Anxious Child / Sting

 

남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숙소에서 나갔고.

        난 하릴없이 바닷가를 거닐었다.

        그녀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을까.

        그 남자에게 갈까. 무슨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었다.

        조금 더 강하게 말리지 못한 게 계속해서 후회됐다.

        안되겠다 싶어 기차역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난 달려갔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남    ..... 기차 안 탔어요?

여    네...

남    왜요?

여    탈 수가 없었어요.

        그쪽이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얘길 해주었잖아요.

        누군가 나한테 그래준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솔직히 감동 받았나봐요.

 

남    그녀는 울다 웃었다.

        우리는 그러고도 한참동안 거기 그렇게 있었다.

(M)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유리상자

 

남    우리는 그곳에 이틀 더 머물렀다.

    함께 해가 뜨는 것을 보고

    해가 지는 것을 보고

    끼니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좋은 오솔길을 찾으면 손을 잡고 걸었다.

    이곳은 세상과 분리된 곳 같았고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곳에서 영원히 있고 싶었다.

 

(E) 밥먹는

여    ....돌아가야 되죠.

남    ....

여    이렇게 오래 있으려고 온 거 아니었잖아요.

남    나랑 같이 갈래요?

여    어딜요? 서울에?

남    네. 같이 가요.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가서 살 집부터 구해보고...

여    그다음은요? 같이 살기라도 해요?

남    안돼요?

여    우리는 만난지 일주일도 안된 사람들이에요.

남    .....같이 있고 싶어요.

여    그 마음이 식어지고 나면 어떡해요.

나    는 당신한테까지 상처 받고 싶지 않은데.

남    그럴 일 없어요.

여    그쪽이 그랬잖아요. 세월이 거짓말하는 거라고...

        난 이제 시간 안 믿어요.

(M)One More Time / Laura Pausini

 

남    그녀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함께 기차에 올랐다.

 

(E) 기차 가는

 

남    서울 도착하는대로 은서씨 옷부터 사야겠어요.

여    ......

(E)호오 입김 불어 창문 닦고

 

여    창밖 봐요. 풍경이 무슨 엽서 사진 같아요.

남    ......

여    그 안에 있을 때요. 편지 무진장 기다렸거든요.

    짧은 엽서라도... 어떤 소식이라도 있기를.

남    나는 기다리게 안할 자신 있어요.

여    인생을 한번만 더 살 수 있어도 참 좋을텐데....

        어느 산악가가 그랬다면서요.

        내려가기에도 올라가기에도 늦었다고.

        내가 딱.. 그런 것 같아.

 

남    그 말을 하는 그녀가 너무 쓸쓸해 보였는데

        그 순간.. 난 그녀가 엽서 사진 속에나 나오는 여자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여    졸린데.. 조금만 잘께요.

        어깨에 기대도 돼요?

남...그럼요.

 

(E)기차 가는 소리

(M)Love Me Tender / Norah Jones

 

남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고.

        그녀가 앉았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화장실에 갔나.. 하고 찾아 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옛날 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여    미안해요. 암만 생각해도 정말 자신이 없어요.

        복수할 자신도..용서할 자신도..

        그런 상태에서 당신과 함께 할 자신도 없어요.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당신과 좀 더 일찍 만날 방법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죠.

        난, 나대로 좀 더 여행을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냥.. 왠지 내 기분인데...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M)헤어지는 중입니다/ 이은미

 

남    3년이 흘렀다.

        나는 혼자 사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새로운 직장을 찾았고. 그런 삶에 그런대로 만족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살아보니, 또 살아졌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정신없이 살았다.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 내 몸을 바쁘게 했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그 여행이 생각났다.

        그러면 가슴이 뛰었다.

        이 나이에도 가슴이 뛸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3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는 게 신기했다.

        가을이 너무 깊어져.. 겨울이 되어버린 시기가 되자

        난 몸살처럼 그때 기억을 앓게 됐고

        다시 한 번 기차에 올랐다.

        혼자 바닷가를 거닐고.. 국밥집에 가보고

        산사에 가 보기도 했다.

        그곳은, 시간이 멈춰있던 그때 그대로였다

(M)Memory / Barry Manilow

 

(E)걷는

 

남    그리고 그 나무...

        그녀에게 꼭 다시 한번 와보라고 했던 그 나무를 찾았다.

        나도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3년 전 그때 나를 둘러쌌던 온갖 고민과 번민들은

        이제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눈길이 멈춰졌다.

        조금 빛바랜 엽서 한 장이 압정으로 꽂혀 있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필체였다.

 

여    꼭 3년만에 여길 다녀가요.

        나는 많이 좋아졌어요. 그쪽도 그러기를.

        배우고 싶었던 걸 배우고 있어요.

        혹시 시간과 여건이 된다면 연락해 주세요.

        아래에 연락처 남깁니다.

 

남    엽서를 손에 든채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몸 속 깊은 곳까지 차고 맑은 기운이 가득해진다.

(M) 주제음





2009-12-10(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