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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세이 - 노래가 있는 풍경
제 398 화 - 7월의 어느 마을
(M) 주제음 사랑하는 마음/ 김세환
(E) 멀리 소쩍새 우는 소리
남 사립문을 열어 젖힌다.
푸르름이 단박.. 밀려 들어오는 듯 하다.
눈이 시원해지고
가슴이 뚫리는 것 같다.
멀리서 들려오는 산새 소리도 정겹다.
마당으로 불어오는 들내음을 품은 바람도 싱그럽다.
난 시골로 돌아왔다.
도시를 등지고. 시골로 왔다.
이곳의 한옥을 개조해서 작업실로 만들었다.
여기서 글을 쓸 것이다.
일부러 인터넷도 설치하지 않았다.
세상과 단절된 채 나만의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자유롭다.
(M) Free As a Bird / Beatles
(E) 후라이팬에 뭔가 치지직... 타는
남 아 뜨거.... 어후... 또 탔네.
남 아침마다 이 모양이다.
서울에 있을 땐 집 앞 까페에 아침마다 가서
토스트와 커피를 사 먹었는데
이곳에선 그럴 수가 없다.
계란 후라이라도 해먹고 싶은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
글만 쓸 줄 알았지 집안 일이라곤 해 본 적 없는 나로선
청소하는 것, 빨래하는 것, 요리하는 것 모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었다.
결국 난 이장님댁 아주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여
시간제 가정부를 들이기로 했다.
(M) 보리울의 여름 O.S.T / Various Artist
(E) 매미 소리
여 (좀 멀리서) 계세요?
(E) 슬리퍼 끌고 나가는
남 누구세요?
여 여기가 김봉덕 작가님 댁인가요?
(E) 문 열고
남 아... 전화 주셨던...
여 네.
남 들어오세요.
(E)들어오고
여 안녕하세요. 저 이장님 사모님 소개받고 왔어요.
남 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여 아우.. 부탁은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저기.. 뭐부터 하면 돼요?
남 막 오셨는데 쥬스라도 한잔 드세요. 잠깐만요.
여 아니에요. 제가 꺼내 먹을께요. 냉장고 어딨어요?
남 이쪽에....
여 와.... 이거 최신형이죠. 좋다. 크구.
남 뭐... 여기 내려오면서 산 거니까요.
(E)쥬스 꺼내 따르는
여 서울에서 오셨다면서요?
남 네.
여 서울 어디 계셨어요?
남 평창동 쪽 살았어요.
여 아.... 저는 구로 쪽에 좀 살았었는데.
남 아~ 서울에 사셨어요?
여 네. 한 3년 정도요. (꿀꺽 마시고) 거기가 신혼집이었거든요.
남 네에..
여 그런데 이혼하면서 친정 내려와 살고 있는 거에요.
이장님 사모님이 그 얘긴 안하세요?
남 네. 개인적인 얘기는 안하시던데.
여 웬일이시래. 동네 나발이신분이...
남 네?
여 (까르르 웃고) 이장님 사모님이요, 우리 동네 나발이시라구요.
그 분 귀에 들어가면 입으로 나오는 데 반나절이 안걸리니까요.
남 아... (어색하게 웃고)
여 집두 뭐 아담하구. 일할 것도 뭐 없겠네요.
청소부터 하구. 점심은 뭐 해 드릴까요?
텃밭에 상추 많이 자랐든데.. 좀 뜯어다가 쌈밥 해드릴까요?
(M) Country Song / Ephemera
(E) 보글보글 찌개 끓고
여 식사는 입맛에 맞으세요?
남 네. 맛있는데요.
여 뭐 자랑까진 아니지만 제가 식당에서도 한 1년 일했거든요.
남 아 그러셨어요?
여 뭐 더 부족한 거 없으세요? 계란 후라이 한 개 더 해드려요?
남 아뇨... 저기...
여 네? 뭐요?
남 제가 식사할 땐 책을 읽는 습관이 있어서요.
좀 조용히 먹었으면 하구...
여 아... 그러세요? 그럼 식사하세요. 저는 접시나 마저 닦을께요.
(E) 잠깐 달그락거리다가
여 그런데요. 그런 얘기 들어보셨어요?
밥 먹으면서 책 읽는 게 비만의 지름길이라던데.
(M) 수다쟁이 / 서수남 & 하청일
남 많다. 말이 많다. 오지랖도 넓다.
간섭이 장난 아니다.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우리 어머니 간섭도 물리쳐 온 나로선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E)책 넘기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
남 (한숨) 네.
(E)문 열고
여 저기 작가 선생님.
남 네.
여 제가 어제 갈아놓고 간 콩물.. 아직 안 드셨던데.
남 예. 제가 비린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여 그래두 드세요. 그거 콩 가져다가 불려다가 맷돌로 직접 갈아서...
요새 그런 거 먹기 힘들어요. 시골서도 다 그냥 사다 먹고...
맷돌로 직접 간 콩물 없어요.
남 네. 그건 잘 알지만...
여 드세요. 그게 얼마나 건강에 좋은건데. 원래 먹기 나쁜 약이 몸엔 좋 다구 뭐 그런 옛말인지 있지 않나요?
사람 정성 생각해서라도 좀
드세요. 맨날 뭐 드시지두 않구 자꾸만 담배만 태우시구... 끽하면
식사도 거르시구. 그러면서 책만 읽구 글만 쓰시면 몸이 남아나나요 어디?
남 ....예. 잘 알겠습니다. 오늘은 꼭 먹겠습니다.
여 예 그럼. 아참 그리구요.
남 ......네.
여 죄송하지만 빨래 내놓으실 때 양말을 뒤집어서 내놓으시던데.
좀 바루 해 주시면. 일을 두 번 안하겠는데.
남 알겠습니다.
여 네 그럼. 일 보세요.
(E) 문 탁 닫는
남 처음에는 너무 귀찮아 사람을 바꿔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그녀가 너무 깔끔하게 일을 잘해내서
이 정도 사람 구하기 어렵겠다, 생각이 들었고.
또 그녀의 말 마디마디가 옳은 구석이 있어서
마냥 물리치기도 뭐했다. 그럭저럭 한 달이 흘렀다.
(M) Beyond the sea / Robbie Williams
남 저... 여기... 한달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여 아유. 뭘 수고는요. 공으로 해드리는 것도 아니구
돈 받구 하는 일인데.
남 덕분에 편하게 작업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구 있어요.
여 네에. 뭐 그럼 다행이구요. (호호 웃고) 그런데요 선생님.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어떤 글을 쓰시는지...
남 아... 전 시나리오 작갑니다.
여 시나리오면 텔레비전 뭐 그런 거...
남 영화 시나리오에요.
여 어머나. 영화 시나리오요? 제가 뭐 아는 거라두...
남 대표작으로는 바리데기의 겨울이라구....
여 네?
남 바리데기의 겨울... 못들어보셨어요?
여 글쎄요. 전 바리데긴지 밥풀떼긴지...
남 예???
여 어머 죄송해요. 암튼 머리털 나구 첨 들어보는 영화제목이네요.
그런 영화두 영화관에 걸리구 그랬나요?
남 그럼요. 평단과 관객들에게 최고 평가를 받았는데요.
여 아... 그랬거나 말거나 저는 첨 들어보네요.
남 (약간 약올라) 해외 영화제에서도 상을 다섯 개나 거머쥐었던
그런 수작이죠. 제 입으로 이런 말 하니까 이상하긴 한데
남들이 다 그러더라구요.
여 네에.... 암튼 일 보세요. 돈은 감사합니다.
(E) 방문 닫고 나가면
남 몇 개 더 있는데..... 에이....
(M)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 이문세
(E) 설거지 달그락 거리면서 하는
여 일 다 끝나셨어요?
남 네. 오늘 일은 다 끝났어요.
여 네에. 커피라도 드려요?
남 아닙니다. 저... 그런데요.
여 네?
남 바리데기의 겨울을 모르시면. 코리아에도 간디가 살았다.
이 영화는 들어보셨는지?
여 코리아에 뭐가 살아요?
남 간디요. 마하트마 간디 아시죠?
여 글쎄 저는 잘 모르겠고. 선생님은 참 남들이 잘 모르는 영화만
만드셨나봐요.
남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여 제가 선생님께 월급 타먹는 주제에 이런 말씀 드려도 될랑가 모르겠 는데.
아우 그냥... 내가 선생님 돈을 가져가도 되나 싶고 그러네요.
남 예? 아니 일하셨는데 당연히 가져가셔야죠.
여 보니까 돈도 안되는 것만 만드시면서 생고생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분 돈을 가져가도 되는건가.... 그냥 마음에 부담이 오는 것이...
지금 쓰시는 영화는 좀 많이들 보고... 알려졌으면 좋겠네요.
(혼자 끌끌대며 멀어지는)
(M)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 패티김
(E) 대문 열고 들어오는
여 선생님 안녕하세요.
남 오셨어요.
여 빨래 내놓으셨죠? 오늘은 볕이 좋아서 이불이구 커튼이구 다 뜯어다
널어야겠어요.
남 저 잠시만요.
여 왜요?
남 일하시기 전에 뭐 좀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여 저한테요?
남 네. 잠시 앉으시죠.
여 예... 뭐...
(E) 뭔가 쓱 내놓는
여 이게 뭔데요?
남 어제 저녁에 완성한 제 시나리오 1고입니다.
여 네?
남 겨우 초고 뽑은 거니까 뭐 몇 번 고쳐야겠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남 한번 봐주시라구요. 어제 그러셨잖아요? 제가 남들이 안보는 영화만
만들었다구.
여 선생님 보기보다 소심하시구나. 그런 말을 맘에 담아두시구.
남 아뇨아뇨. 담아뒀다기 보다는요. 사실 제가 이전까진 고품격... 예술
영화 위주로 만들어온 게 사실인데. 이번엔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그런 작품 만들까 하거든요. 그래서 한번 모니터 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여 ....네... 그럼 뭐...
남 그리고 다음날. 그녀가 집에 왔다. 시나리오를 손에 든 채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영화 제작자와 대본 회의를 할 때도
이렇게 심장이 벌렁대진 않았다. 그녀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M) Every Breath You Take / UB40
---------------------------1부 끝 ----------------------
* 잠시 후 음악에세이 - 노래가 있는 풍경
제 2부가 이어집니다.
남 다.. 보셨어요?
여 네. 어젯밤에 다 읽었어요.
남 .... 어떠셨어요?
여 뭐... 이런 게 다 있어요?
남 .....네?
여 마음이 너무 아프잖아요.
남 마음이 아팠어요?
여 제가 어젯밤에 얼마나 울었는지 아세요?
남 울었어요?
여 울라고 써놓고 울었냐고 물어보는 게 어딨어요.
그거 보고 안우는 사람이 사람이에요?
남 그건 정말 극찬인데요?
여 선생님 칭찬할라고 한 소리는 아니구요. 저 정말 맘 아팠어요.
울 엄마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 하게 됐구요.
남 네. 그 작품의 주제가 아무래도 어머니의 사랑.. 뭐 그런 거니까요.
여 밤에 베개 흠뻑 젖게 울다가 결심한 게 있었어요.
남 뭔데요?
여 재혼해야겠다.
남 ....네?
여 저희 엄마 소원이 저 다시 결혼해서 잘 사는 거거든요.
그래서 얼마 전엔 읍내 제재소 집 아들하고 만나보라고 그렇게
권하셨는데. 제가 딱 잘라 싫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얼마나
속상해 하시는지. 어제 시나리오 읽는데요. 결혼해서 잘 사는 거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늙으신 엄마 가슴에 이렇게 못을
박아야 되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그 사람 한번 만나보기로 했어요.
(M) Mother of Mine / Little Jimmy Osmond
남 시나리오를 잘 읽어준 건 고마우나
어떻게 결론이 그쪽으로 나나 싶긴 했다.
하지만 뭐,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만큼의
울림을 주는 대본이었다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내 시나리오를 읽어본 후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몹시 달라졌다.
(E) 컴퓨터 자판 치는 소리
(E)똑똑 노크하고 들어와
(E) 커피잔 내려놓으며
여 커피 드세요. 선생님.
남 아. 감사합니다.
여 어떻게 잘 되어 가세요?
남 지금 수정고 쓰고 있어요.
여 아유 뭐 그거 수정하고 말고 할 거 있어요? 그냥 영화관에 딱 걸면 바로 대박 나겠던데?
남 예? (기분좋고) 뭐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여 아니에요. 제가 장담해요. 저두 뭐 영화라면 쉬리부터 해서...
실미도도 봤구요. 아 맞다.. 장동건 나온 거 그거 뭐지?
남 친구?
여 아니.. 그거 말고... 아 맞다. 태극기 휘날리며.. 그것도 봤구요.
암튼 제가 대박 난 영화는 웬만한 거 많이 봤구요.
또 주말의 명화 이런 것도 밤에 졸려도 허벅지 꼬집어 가면서
많이 봤는데요. 제 마음을 이렇게 울린 영화는 없었거든요.
남 아하하.. 그래요?
여 네에. 농담 아니에요. 선생님 영화 영화관에 걸리면 저는 젤 첨에
줄 서서 볼 거에요. 주인공은 누구 생각하세요?
남 글쎄 뭐.... 이번엔 대중적인 코드로 나가볼까 해서...
좀 유명한 배우들 위주로 생각하고 있어요.
여 그렇구나. 아우 저는 심은하가 그렇게 좋더라구요.
남 심은하는... 은퇴했는데....
여 그래요? 아 맞다. 그랬던 것 같네. 아유 아까워라.
꼭 보고 싶은데.
(M) 마지막 승부 / 김민교
(E)자판 탁탁 치는 소리
남 그녀의 적극적인 지지와 칭찬이 있어서였을까.
대본 쓰는 속도가 더 붙는 느낌이었다.
한달만에 수정고까지 끝냈고
그래서 제작사 대표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E) 컵을 쟁반에 담아오는
여 선생님. 이거 콩물...
남 네.
(E) 꿀꺽꿀꺽 마시고
남 잘 마셨습니다.
여 아우 이젠 콩물도 잘 드시구.
남 먹어보니까 좋더라구요.
여 그럼요. 이게 신토불이거든요 선생님.
오늘 서울 가신다구요?
남 네.
여 그럼 영화관에 걸리는 일만 남았네요?
남 아유 아직 멀었어요. 감독도 정해야 하구. 캐스팅도 해야하구
촬영도 해야하구. 첩첩산중이죠.
여 그래두요. 이렇게 좋은 대본인데. 금방 진행되겠죠. 벌써부터 기대돼 요.
남 그래요? 참... 은서씨는 지난번 얘기하던 그 일은 어떻게 됐어요?
여 어떤 일요?
남 뭐 제재소집...
여 아.... 만났어요. 저저번주 토요일날.
남 아... 그래요? 뭐.. 어땠어요? 데이트 했어요?
여 그분도 한번 실패한 분이고. 사실 둘 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
만나서 데이트니 뭐니 하기도 그렇구요. 그래두 낼이 주말이라구
드라이브 시켜주신다구. 저쪽 산 넘어 가면 댐 있거든요.
옆에 스테이크 파는 레스토랑도 있구. 거기 가자 그러시더라구요.
남 마음에는 들어요?
여 제 처지에 마음에 들구 말구가 어딨어요.
남 은서씨 처지가 어때서요. 아직 젊고.. 성격 구김 없으시고..
예쁘신데.
여 예쁘기는요. 하루가 다르게 늙는 게 느껴지는데요.
남 에이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은서씨 예뻐요.
여 아우... 그런 얘기 참 오랜만에 듣네요. (웃고) 암튼 감사해요.
남 서울 다녀와서 뵈요.
여 네.
(M) 왠지 느낌이 좋아 / 여행스케치
(E) 운전하는 소리 + 멀리서 밤새 소리 정도
남 원래는 서울에서 하루이틀 더 머물며
지인들을 만날 계획이었지만. 난 제작사 대표를 만난 그날밤으로
다시 작업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표는 이런 대본이 요즘 관객에게 먹히겠냐며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아이템부터가 고리타분하다면서
시골로 들어가더니 좀 이상해진 거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내 시나리오는 거절당했다. 수정의 여지도 없이 말이다.
스스로의 이야기에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였을까.
실망도 그만큼 컸다.
집에 거의 다 왔을 즈음이었다.
동네 입구 구멍가게에서 봉지하나를 달랑달랑 들고 나오는
그녀를 만났다.
(E)차 멈추고, 내리는
남 은서씨.
여 어? 선생님.
남 뭐 샀어요?
여 그냥.. 소주랑 오징어...
남 은서씨 먹게요?
여 네. 잠두 안오구 기분도 그래서요.
남 그래요? 그럼 들어가세요.
여 네.
(E)몇걸음 걷는데
남 저기....
여 네?
남 혹시 술친구 안필요해요?
(M) I Wish You Love / Dean Martin
(E) 소주를 잔에 꼴꼴꼴 따르는, 멀리 개구리 소리
여 서울 가셨던 일은 잘 되셨어요?
남 네..뭐... 덕분에요.
여 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뭐랬어요. 그건 될 수밖에 없다니까요.
남 (쓴웃음) 고마워요. 그런데 은서씬 이렇게 술 마셔도 돼요?
내일 데이트할 사람이. 하다못해 오이라도 얼굴에 붙이구
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래야 이쁘게 하구 나가지.
여 그러게요. 그래야 되는데. 뭐, 집에 가는 길에 오이 하나 똑 따서
들어가죠 뭐.
남 아.. 그래도 되겠네. 야.... 여긴 별이 안주네요.
무슨 별이 이렇게 많어...
여 예쁘죠. 어렸을 때 저 별 보면서, 세상은 참... 아름다울 거라고만
막연히 생각했었어요. 바라는 건, 다 이루어질거라고.
남 아직 젊은 사람이 왜 다 살아버린 사람처럼 말해요.
여 남은 시간이 많다고 해두요. 이제 난 알았거든요.
바라는대루 이루어질만큼 만만한 데가 아니라는 거.
별은 별이구. 현실은 현실이구. (꼴깍 소주 마신다)
솔직히요. 제재소집 아들요. 제 스타일 너무 아니에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그 사람 좀 아는데. 아주 샌님이었거든요.
자기 말론 저 여중 다닐때부터 맘에 두고 있었다구 그러대요.
선생님. 제가 지금은 이래두요 여중 땐, 동네서 소문난 미모였거든요.
(깔깔 웃는다)
남 맘에 안들면 만나지 말아요.
여 우리 엄마 소원이라는데요 뭐. 선생님두 시나리오에 쓰셨잖아요.
사랑할 시간이 있을 때, 사랑해라.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을 때가 온다.
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잊어버려요. 그런 말.
여 네?
남 은서씨나 제 시나리오 좋아하죠...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니까.
여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남 실은 오늘 서울 갔던 일 잘 안됐어요. 아이템부터 다 이상하다구
다른 거 찾아보래요. 영화관에 걸리긴 글렀단 얘기죠.
여 아니 왜요? 그 좋은 글을? 왜 싫대요? 뭐가 싫대요?
남 제가 부족한 탓이죠 뭐.
여 아니에요. 선생님 안 부족해요. 얼마나 멋지신데. 전 담배 태우는
사람 안좋아하는데요. 선생님이 담배 턱 태우시면서 글 쓰는
뒷모습 뵈면... 아 참 멋지다. 꼭 땅에 발 딛고 사는 분 아닌 것
같으다.... 그러는데요?
남 땅에 발 딛고 사는 사람 아니면요?
여 하늘에 떠 있는 별 같은 사람요. 바라볼 순 있어두 닿을 수 없는.
(M) Vincent / Aiza Seguera
(E) 자판 치는 소리
남 그녀가 오지 않는 주말. 난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파일을 열어 다시 한번 대본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뭐라던간에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성심성의껏 써보기로 한 것이다. 그럼 그녀처럼 진심으로 좋아해주는
누군가가 있으리라.... 그녀처럼.
그리고 월요일 아침. 그녀가 다시 우리집에 찾아왔다.
(E) 설거지하며 잔소리
여 선생님 제가 이럴 줄 알았어요. 주말 내내 밥도 안해드시구.
무슨 어린 애두 아니구요. 밥두 밥통에 다 있구, 반찬만 꺼내드시면
된다구 몇 번을 말씀드렸는데.
남 뭐 좀 쓰느라구요.
여 쓰는 것두 기력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러다 진짜 몸상하시면
쓰기는 커녕 아무 것도 못해요. 그걸 아셔야죠. 이제 어쩌려구 그러세요, 저두 없으면.
남 네?
여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저 시집가게 생겼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한번도 못해본 결혼, 전 두 번씩 하게 생겼네요.
남 결혼을 해요? 벌써요?
여 저번주 레스토랑 간다고 그랬잖아요. 거기 저만 간 게 아니라
저희 어머니도 가시고. 제재소집 마나님두 오시구. 해서 거기서
어른들끼리 여름 가면 날 잡자구.. 초가을에 식 올리자구요.
여기 일두 이번주까지만 하게 될 것 같네요.
(M) 나 어떡해 / 산울림
여 그럼...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나중에 청첩장 나오면 드릴께요.
남 네... 가세요.
(E) 대문 열고 닫고. 걸어가는 소리 한참 들리고. 멀리서 소쩍새 소리.
(E) 뒤에서 대문 다시 열리는
남 은서씨.
여 네?
남 나 오늘밤 정도에 수정고 다시 나올 것 같은데. 그거 좀 봐줘요.
여 ... 네.... 그럴께요.
남 몇 번쯤 더 고쳐야 할 지도 모르는데. 그때마다 봐줄 수 있어요?
여 .... 네...뭐....
남 다음 시나리오 쓸 때두요. 은서씨가 봐주고 얘길 해줘야
내가 중심을 잡고 쓰겠는데.
여 제가... 뭐라구요. 제가 뭐 아는 거두 없구..
남 그냥 그래줬으면 좋겠어요. 이상하게 은서씨가 얘길해주면 힘이
나고.. 좋거든요?
여 ......그래요?
남 그리구. 맘에도 안드는 사람이랑... 결혼... 그런 거 하지 마요.
여 네?
남 아니 아무래두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면 내 시나리오 봐줄 시간도
적어지겠고. 그러니까. 그냥 지금처럼 우리집에 있으면서...
왔다갔다 하기 힘들면 그냥... 살아도 되고.
여 ....네?
남 같이 살아도 되구요. 나랑.
난,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은서씨가 그래주면.
여 아니... 저기... 저는....
남 여름볕에 푸르게 익어가는 식물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으며 바람에 몸을 젖힌다.
그 사이에 하늘색 치마를 입은 그녀가 선 채 나를 본다.
내가 사랑을 시작한, 7월의 어느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M) 주제음
2009-07-0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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