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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일 목요일 방송 원고 및 수록곡

 

음악에세이 - 노래가 있는 풍경


제 372화 - 출발


(M) 주제음 (김동률 - 출발)


여     지난해처럼 힘들었던 해가 또 있을까.

        월급을 올인해두었던 펀드는 반토막이 났고.

        오랫동안 만나왔던 남자친구는

        경기가 좋지 않으니까 결혼을 미루자는둥

        시간을 좀 가져보자는 둥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는 둥... 사람 속을 썩이더니.

        일곱 살이나 어린 여자 공무원을 만나자마자

        미안하다는 문자 한통 남기고 후다닥 결혼해 버렸다.

        뭐, 그것까지는 좋았다.

        그런 남자였다면. 결혼해서 뭐했겠는가?

        그런 속물과 결혼하지 않게 해준 거 고맙다고

        교회 가서 감사 헌금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12월 마지막 날이었다.

        얼마 전부터 회사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건 감지했지만

        그럭저럭 한해를 넘기나 싶었는데.

        12월 마지막 날. 부장이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연차가 많은 평직원부터 정리를 해야 하는데.

        가장 많은 김신원씨는 와이프도 있고 애도 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많은 내가,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아니. 연차가 많은 게 죄인가!

        나는 이 회사에 들어와 남들보다 오랜 시간

        열심히 일했고. 남들보다 더 긴 시간 이 회사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다. 그게 잘못인가? 그게 짤려야 할 이유인가?

        가슴을 비집고 울컥 올라오는 항변들을 힘겹게 누르고

        양치컵이랑 치약이랑 다이어리, 쉬는 시간에 보던 책 몇권을 정리해

        회사를 나오는데..... 젠장..... 바람은 왜 이렇게 찬 것인가.

(M)   Dust In The Wind / Sarah Brightman


여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밤에 보신각 타종하는 것만 보고 잠들었다가

        새벽 일찍 집을 나와

        근처 산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일출을 보겠다고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그 틈에 껴서 오리털 파카를 여미며

        한발 한발 떼어놓았다.

        사실 굳이 일출을 보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일단 몸이라도 괴롭혀야 잡념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올라섰는데도 아직 일출은 시작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서서 서로 추위를 감싸주며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죽을 먹기도 하면서, 해가 떠오르기만 기다렸다.

        그때.


남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 제가 싸온 게 있어서...

여     (무뚝뚝) 네? 괜찮아요.

남     아..네... (하다가) 어..

여     (거의 동시에) 어..

남     여기 웬일이야.

여     그냥 뭐. 새해라서. 오랜만이야.

남     그러네. 못알아봤어. 화장을 안해서 그런가..

여     그게 아니라.. 옷을 이렇게 입어서.. 그런거겠지.

남     하긴.. 몇 년만이니까.. 나이 들어서 그런거지 뭐.

여     뭐.... 


여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7년 전. 군대 가기가 무섭게 내가 차버렸던

        같은 과 동기. 나 없으면 죽겠다고 울며불며

        탈영하겠다고 난리를 치던. 그 남자.

        그 남자를, 하필 이런 데서, 이런 꼴로

        만나게 되다니.

(M)   만남 / 코요태


여     생각 같아선 그 자리를 바로 빠져 나오고 싶었지만

        일출을 보러 왔는데. 그냥 떠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어색함을 꾹 참고 서 있는데.

        

남     혼자 왔어?

여     ....응. 너는?

남     나두.


여     그럼 그렇지. 그 주제에 여자친구가 있을 리가 없지.


남     여자친구랑 같이 오려고 했는데 감기 기운이 있다더라구.

        굳이 따라온다는 걸, 내가 오지 말라 그랬어.

여     아... 그랬구나. 사실은 나도 우리 그이가 혼자 가면

        혼내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몰래 온거야.

남     우리 그이..? 너 결혼했어?

여     어?

남     하긴.. 나이가 몇이냐. 안했으면 이상한거지.

여     그..그러니까. 당연히 했지.

남     애는?

여     아직. 우리는 신혼을 좀 즐기다가 낳기로 했어.

남     나이 생각해. 좀 있으면 노산인데.

여     노산은 무슨? 요즘 초산 평균 연령이 얼만데.

        넌 참 예전이나 지금이나 고리타분한 건 알아줘야겠다.

남     그러냐?

여     그래.

남     너도 여전하다.

여     뭐가?

남     땍땍거리는 거.

(M)   나는 나 / 주주클럽


(BG)해 떠오르는 이미지의


여     장엄한 광경이었다.

        구름을 헤치고 크고 뜨겁고 붉은 해가

        서서히 떠올랐다.

        올해의 첫 번째 해였다.

        그 숭고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올 한 해는 모든 재앙이 끝나고

        좀 편안하기를.

        무언가 희망찬 일들이 좀 더 많이 생기기를.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떴더니.

        내 옆에 있던 그 남자는 벌써 산을 내려간건지

        보이지 않았다.

        하..참. 옛날엔 나 없으면 일초도 못산다며

        내가 자기의 물이며 공기며 생명줄이라더니.

        넌 니 생명줄이 옆에 있는데 간다고 인사도 안하고

        쌩하고 내려가 버리냐?

        생명줄 좋아하네!

(M)   웃기네 / 하늘


여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여전히 부모님께 회사에서 짤렸다는 얘기를 못하고 있던 난

        아침이면 꽃단장하고 집을 나와

        은행에도 가고. 국립도서관에도 가고. 가끔 시집 간 친구 집에 가서

        애도 보고. 백화점을 배회하기도 하다가. 퇴근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날도 역시. 도서관 컴퓨터로 이력서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E) 진동 소리


여     모르는 번호였다.


(E) 빠르게 걸어가는


여     (작게) 여보세요.

남     은서냐?

여     누구세요?

남     나 봉덕이.


여     그럼 그렇지. 새해 첫날 그렇게 만나고. 또 내 생각이 난거지.

        여자친구도 있다면서. 하여간.... 남자들이란.....


남     여보세요?

여     (한층 도도해진) 응.왜?

남     어제 형진이 만났다.

여     형..진이?

남     너 이혼했냐?

여     뭐?

남     아니. 이혼한 게 아니면. 너 지금 혼자라던데.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해서.

여     .....그게.... (당황 기색 감추며) 그래. 그날 뭐.. 얘기하다 보니

        그렇게 됐지 뭐. 아니.. 난 니가 또 마음 정리 못하고

        나한테 미련 가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그래서...

남     뭐하러 그런 걱정을 해. 내가 니 얼굴 다 보고.. 그랬는데.

여     내 얼굴..? 뭐?

남     아니.... 우리가 그렇게 철없는 나이도 아니고. 너나 나나 서로

        늙어가는 처지에. 그때야 어려서 물불 분간 못할 때잖아.

여     (기분 나쁘고) 아 그래서. 왜 전화 한건데?

남     형진이가 그러는데 요새 너 힘들다 그래서. 사귀던 남자랑도

        잘 안되고. 회사에서도 짤렸다고...


여     얼마 전. 형진이라는 동창에게 일자리 문제로 부탁하느라

        전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런 식으로 봉덕이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연초부터 왜 이러는걸까. 정말 안 풀린다.

(M)   미쳐 미쳐 미쳐 / 바나나 걸


여     (흠..) 있지. 미안한데. 나 지금 좀 바쁘거든? 끊는다.

남     있잖아 은서야.

여     왜!

남     너 우리 회사에서 일 안해볼래?

여     니네..회사?

남     큰 회사는 아닌데. 영국에 본사가 있는 회사야. 무역 관련 일이니까

        너 이전에 일했던 계통하고도 관련이 있고.

여     .... 그래? 어떤.. 자린데?

남     요새 뭐... 정규직 뽑는데가 흔하냐? 일단은 비정규직이야.

        프로젝트 별로 페이가 지급되는 거고.

여     그래? 그래두 뭐... 나쁘지는 않은 거 같은데.

남     내가 프로젝트를 꾸리는 팀장이라서, 비정규직 사원 뽑는 일은

        내 소관이거든. 우리 인연 생각하면, 니가 이렇게 힘들다는데

        모르는 척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

여     ............. 어..

남     그렇다고 니 실력 무시해서는 아니고. 너 일 잘할 거라는 거야

        내가 잘 알지.

여     (약간 좋아서) 알아주니까, 고맙다. 나 있지. 전에 있던 회사에서도

        일 깔끔하게 처리하고, 마무리도 야무지다고. 다들 그랬었어.

남     그랬겠지. (아무렇지 않게) 내가 너한테 차여봐서 잘 알지.

        니가 뭔가.. 일을 추진하고 처리하는 데 있어선 피도 눈물도

        없잖냐. 

(M)   피도 눈물도 없이 / X-Large


여     웬만하면 이러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집에 일하러 가는 척 숨기고

        하루 종일 우울하게 방황하며 살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부모님께 드려야 할 생활비도 문제였고 말이다.

        그래서 난....


남     왔어? 일찍 왔네? 아직 삼십분 남았는데.

여     아니야.... 출근해야지. 나 어디 앉으면 돼?

남     자리? 자리가 따로 있는 건 아니고. 저기 회의실 옆에

        컴퓨터 여러 대 있는 데 보이지?

여     응.

남     거기서... 프리랜서 직원들이 업무를 봐.

        뭐 회의 안할 땐 회의실 써도 되고.

여     아... 그렇구나.

남     아참 그리고. 내가 미리 얘기해 둬야 해서...

        다른 직원들도 있고. 최소한 회사 안에선. 우리가...

        팀장과 평직원..이랄까... 그런 관계라서.

여     아....

남     섭섭하겐 생각하지 말고.

여     .....네. 팀..장님.

(M)   Yes sir, I can Boogie / Baccara


여     사람의 운명이 이런식으로 뒤바뀔 수도 있는 건가.

        10년 전 이 녀석은 한번만 만나달라고 죽자사자 날 쫓아다니던

        남자들 중 한명일 뿐이었고.

        7년 전 이 녀석은 나와의 이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요란스레 괴로워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 녀석의 부하 직원이 되다니.

        이거 혹시, 내가 복수 당하는 건 아니겠지.

        슬며시 불안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슬픈 예감은.... 늘 그렇듯

        맞는 법이다.

(M)   한사람을 위한 마음 / 이오공감


--------------------------1부 끝 -------------------


* 잠시 뒤 음악에세이 노래가 있는 풍경 제 2부가 계속됩니다.




여     그후로 한달 동안 나의 피폐한 삶은 계속됐다.

        솔직히 그가 나에게 복수를 하려고

        나에게만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직원들 사이에서 별명이 저승사자일 정도로

        냉정하고 싸가지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었고.

        밥맛도 없었다.


남     윤은서씨.

여     네.

남     선박 확인 다 됐어요?

여     네. 출발했을텐데요?

남     하..

여     네? 무슨 일이라도..

남     방금 영국 본사에서 연락 왔어요. 물건에 문제가 있어서

        아직도 출발 못하고 있다구요.

여     어.. 그럴 리가....

남     무슨 일을 그따위로 해요?

여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남     됐어요. 내가 다 처리했어요.

여     ....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남     내가 윤은서씨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그런 큰일을 맡긴

        것 같네요. 그 일에서는 손 떼세요.

여     ....팀장님...

남     장종철씨? 

남자   (멀리서) 네!

남     앞으로 이 일 연락은 장종철씨가 맡아주세요.

남자   알겠습니다.

여     ......

남     윤은서씨.

여     (풀죽어) 네

남     이거 복사하고. 그리고 이거... 팩스로 보내줘요. 밑에 적힌 번호로.

        그건 할 수 있죠?

(M)   뭐를 잘못한거니 / 에스더


여     확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 왜 아니겠는가. 수없이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더럽고 치사해도. 이 회사는 비전이 있어 보였고.

        비정규직 6개월 후엔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어떻게든 6개월은 버텨보자, 이를 악물었다.


(E) 컴퓨터 자판 치는 소리


남     ..... 뭐해?

여     엄마야.

남     뭐하냐구.

여     그냥 뭐.... 작년도에 다른 프로젝트 진행 상황들... 모아놓은 자료.

        검색도 좀 하고.... 통계도 좀 내보고... 뭐 그러고 있었어요.

남     말 놔.

여     됐거든요. 전 이게 편하거든요.

남     나한테 화 많이 났어?

여     아뇨. 공은 공. 사는 사구요. 제가 일처리 잘 못한 것도 사실이구요.

        제가 화낼 게 뭐 있겠어요.

남     저녁은?

여     .......컵라면 먹었어.

남     너 매운탕 좋아하잖아. 사줄까?

여     됐어. 배불러.

남     난 밥을 안먹어서. 같이 좀 먹어주라.

( M)  이제 그만 화풀어요/ 솔리드


(E)매운탕 보글거리는


여     왜 이 시간까지 밥을 안먹었어?

남     이거저거 하다가.

여     근데... 여자친구 안만나? 만나는 거 거의 못본 거 같아서...

남     주말에만 만나. 일주일에 한번씩.

여     무슨... 교회 나가? 일주일에 한번 정해놓고 만나게?

        장거리 연애해?

남     아니. 서로 바쁘니까. 일주일에 한번. 사실 그 약속도

        못지킬 때가 많지.

여     ... 너 많이 변했다.

남     왜?

여     예전엔.... 좀 찌질해 보였지만. 그래도 너.. 사랑에 올인하는

        스타일이었잖아.

남     (후후...) 그랬지.

여     그러니까... 

남     그런데. 그랬다가. 너무 많이 다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

여     ....

남     사람을 믿어선 안되겠구나. 믿을 건 나밖에 없구나.

(M)   Don't Believe In Love / Dido


(E) 걷는 소리


남     왜 말이 없어? 아까 식당에서부터?

여     니가 아까 한 얘기. 꼭 내 탓 하는 거 같아서.

남     뭐. 찔리라고 한 말이긴 하지.

여     너, 나 무지 미워했겠다?

남     말이라고? 여자가 한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 내린다고 하지?

        남자 한도 만만치 않다.

여     그런데.. 왜... 다시 나를 만났어?

남     ....글세....

여     뭐 왜 그랬는지는 몰라두. 그래도 결과적으론 나한테

        도움이 됐잖아. 회사 생활이 힘들긴 해도....

        나는 여기 마음에 들거든. 일도 더 많이 배우고 싶고...

남     다행이네.

여     그런데... 왜 그랬냐구.

        니 말대로라면. 나는 니가 사람을 더 이상 못믿게 하고

        사랑을 못믿게 만든 장본인인데... 왜... 날 도와줬어?

남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보여주고 싶었어.

여     뭘?

남     나를. 니가 버린 나를.

        내가 얼마나 잘됐는지. 얼마나 잘나졌는지.

        니가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어.

여     ...... 그랬어?

남     그런데 딱 일주일이더라.

        그 다음부턴. 내가 후회했어.

여     왜?

남     .......내 못난 모습만 보이는 것 같아서.

        일하다보면. 늘 화내고. 조급증 부리고.

여     그거야... 일하다 보니까 그런 거잖아.

남     새해 첫날. 왜 혼자 산에 왔냐고 했지.

여     .....

남     나 회사에서 그 흔한 등산클럽에도 못 들어가.

        내가 끼면 사람들이 불편해해서.

(M)   Mr. Lonely / Akon


(E) 키보드 치는


여     팀장님.

남     ..네.

여     저희 점심 먹으러 갈건데요.

남     다녀오세요.

여     같이 안 가실래요?

남     난 됐어요. 다녀오세요.

여     혼자 드시잖아요. 샌드위치 같은 거. 같이 가세요. 네?

남     ....그럴...까요 그럼?


여     그동안 늘 혼자 점심을 해결하는 그를 보면서도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그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외로워 하고 있다는 걸.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마음의 벽을 쌓은 데에는

        내 책임도 있다는 생각에.

        난 그 사람이 다른 직원들과 친해지고

        신뢰를 쌓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그래서. 밥 먹을 때도 같이 가자고 하고.

        술 마시는 자리에도 그 사람을 부르고.

        옥상 가서 커피 마실 때도. 꼭 그 사람을 불러냈다.

        처음엔 다른 직원들이 왜 그러냐며. 그러지 말라고 눈총도 줬지만

        점점 웃음도 보이고. 농도 건네는 그를 보며

        마음을 여는 눈치였다.

(M)   Open Your Mind / 성시경 & 장나라


(E) 걸어가는데

(E) 뒤에서 뛰어오고


남     윤은서씨.

여     네.

남     아니. 은서야.

여     ....어. 왜?

남     퇴근해?

여     응.

남     나.... 이십분만 시간 내줄래?

여     그래.


(E) 커피잔 소리


여     무슨 일 있어?

남     여자친구가.. 헤어지재.

여     ...왜?


여     ....라고 물으면서. 내 가슴은 쿵.. 내려앉았다.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못된 욕심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남     그럴 만 하지. 내가 그동안 해준 게 없으니까.

여     ....그러게... 잘 챙기지.

남     어떻게... 하면 될까?

여     응?

남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까.

여     잡고 싶어?

남     ...... 그냥... 버림 받는 건 싫어.

여     .......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남     니가 나를 버린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여     !!!

남     그러니까. 그 이유를 아는 니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

(M)   그대없는 빈자리 / 조덕배


여     있잖아. 내 얘기 잘 들어.

남     ....그래.

여     너는... 진짜 좋은 남자야. 원래... 그런 남자야.

        마음이 따뜻하고.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 많은 걸 양보하고

        내 줄 줄도 알고. 그런 남자야.

남     .......

여     그런데 그 여자분이 본 너는. 진짜 니가 아닐거야.

        아직은... 두려움이 많아서. 진짜 니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닐거야.

남     .......

여     나는..... 그래도 나는... 그게 보이는데 뭐.

        예전엔 그런 거.. 왜 못봤을까.... 궁금할 정도로...

        진짜 니 모습이 보이거든. 그 여자.. 니가 좋아하는 그 여자한테도

        보여줘. 좋은 여자라면, 너한테 정착할거야.

남     고맙다. 그렇게 얘기해 줘서.

여     아니야. (사이) 가봐야지.

남     어.

여     얘기 잘하고.

남     그래... 


여     그 사람이 급하게 까페에서 나가. 택시를 잡고. 떠나는 모습까지.

        멍하게 바라봤다.

        내가 도대체 뭘 한건가.

        어느 사이에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을

        내 손으로 내쫓으려는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사르르하니 아픈가.

        그 사람이, 의도치 않게. 이런 방법으로 내게

        진짜 복수를 하고 있는건가.

(M)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 거미


(E) 비오는 소리


여     밤늦게까지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두 사람 화해해서

        뭔가 미래를 꿈꾸고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니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다.

        헤어지라고 할걸.....

        여자는 많다고 할 걸.....

        내가 미쳤지... 무슨 착한 척을 한다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는데.


(E)전화벨 소리


여     헉.... (놀라서 보면) 봉덕이다.

        (목소리 가다듬고 후후후 심호흡 후) 여보세요?

남     잤어?

여     아니? 라디오 좀 듣느라구. (사이) 어떻게 됐어?

남     뭐가?

여     능청은. (아무렇지 않게) 잘됐어? 여자친구랑.

남     잘됐으면 이 시간에 왜 전화를 했겠어.


여     난 수화기를 막고 예쓰를 외쳤다.

        

남     여보세요?

여     응. 그랬구나. 왜... 잘해보지. 내 말대로 해도 안먹히디?

남     씨알도 안먹히더라.

여     야야... 그러면 그냥 깨끗이 포기해. 여자가 뭐 그 여자 하나니?

남     그런가?

여     당연하지!! 잘 찾아봐. 너무 멀리서 말고 주변에도 잘 찾아보고

        여자 많다 너?

남     남자도 많아. 근데 너는 뭐하고 있는거냐? 아직까지. 시집도 못가고.

여     너... 알잖아. 나 일에 대한 열정 뜨거운 거.

남     일하느라구?

여     ........그런 셈이지.

남     그래. 그럼 일에 대한 열정 계속 불태워라. 끊는다.

여     자..잠깐.

남     왜.

여     밖에 비오는 거 같은데?

남     어. 오네.

여     청승맞게 겨울비가 오구 그러냐.... 밖이야?

남     ....어.

여     뭐..... 내가 술친구 해줘?

남     됐어. 술은 뭐.

여     아니. 이런 날 술 한잔 해줘야지. 어딘데. 기다려봐봐.

        나갈테니까.

남     홍대 앞.


여     난 한손으론 수화기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벌써 머리를 매만지며

        거울을 본다. 거울 속의 내가. 들떠 보인다.

        무언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M) 주제음   출발 / 김동률

 



        

        

        





 





2009-01-01(1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