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 표준FM > 격동 50년 방송 : AM 11시40분 ~ 12시    해설 : 원호섭   작가 : 이석영   연출 : 오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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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70화 민주화 연대기(年代記)
  69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68화 16대 총선과 낙천·낙선 운동
  67화 참여정부의 도전과 위기
  66화 아홉 굽이 헌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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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2화 대한민국 대선(大選)의 역사

대한민국 대선(大選)의 역사


극본 : 이석영

연출 : 오성수



▷ 기획의도
대한민국 건국 이후 60년 정치를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세월이었다. 단독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은 차치하더라도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세계 어디에도 없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야욕을 드러낸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무너지고 민주시대가 열리는 듯 했으나, 5·16 군사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쿠데타 세력은 조속한 민정 이양을 약속하더니 스스로 군복을 벗고 민간 정치인으로 변신, 정권을 장악했으며, 3선 개헌을 강행한 것으로도 부족해 선거가 아예 없는 유신시대를 열었다. 10·26으로 민주 회복이 되는 듯했으나, 서울의 봄은 덧없이 흘러가고, 5·18 광주 민주화항쟁의 보람도 없이 민주정치의 탈을 쓴 군부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 직선제의 길은 열었으나,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정권은 군부세력의 차지가 되었으며,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는 평화적인 정권교체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 겨우 성취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대한민국 정치는 얼마나 민주화되었을까? 형식은 민주화되었어도 내용은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다. 인맥 중심, 지역할거(地域割據)에서 벗어나 정당이나 후보들이 정정당당하게 정책 대결을 벌일 날은 언제쯤일까? 12월 대선을 앞두고 자천?타천의 후보들이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하는 현 시점에서 과거의 대통령 선거를 되짚어 봄으로써 바른 정치, 바른 선택의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 주요 내용

1948년 7월 24일.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때는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였기 때문에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을 기회는 갖지 못했다. 국민들이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2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였다.

- 2대 대통령 선거(1952년 8월 5일)
이승만은 계엄령까지 선포해가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拔萃改憲案)을 통과시켰다. 간선제로는 재선될 가망이 없는 데 따른 선택이었다. 이승만, 조봉암, 이시영 등이 후보로 나온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압도적인 득표로 재선에 성공한다. 제대로 된 야당이 없는 상황에서 그것은 예견된 결과였다. 선거의 관심은 대통령보다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범석을 정· 부통령 후보로 공천했으나, 이승만은 그 공천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무소속의 함태영이 부통령에 당선된다. 이는 이승만이 이범석이 후계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족청계(族靑系)의 몰락을 가져온다.


- 3대 대통령 선거(1956년 5월 15일)
1954년 이승만은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 장기 집권의 야욕을 드러낸다. 이에 맞서 민주당이 탄생하고, 민주당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선거 구호와 함께 신익희와 장면을 정· 부통령 후보로 내세워 자유당의 이승만·이기붕 후보에 맞선다. 본격적인 여·야 대결이었다. 민주당의 한강 백사장 유세에는 30만 인파가 몰리는 등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높았으나, 신익희의 급서(急逝)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다만 장면이 이기붕을 물리치고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 4대 대통령 선거(1960년 3월 15일)

민주당은 신·구파의 갈등을 극복하고 조병옥을 대통령,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워 권토중래를 노린다. 여기에 맞서는 자유당도 필사적이었다. 고령의 이승만이 변고가 있을 경우 대통령의 권한이 야당 부통령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한 4년이었다. 따라서 이번에는 기필코 부통령까지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자유당의 지상과제였다. 그러나 또 다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병마(病魔)에 꺾이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정권은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심은 더 이상 이승만 정권의 오만을 용서하지 않았다. 부정 선거에 대한 규탄은 4·19 혁명으로 이어져 국부(國父)로까지 추앙받던 이승만은 타의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는 첫 번째 불행한 대통령이 된다.

 

- 5대 대통령 선거(1963년 10월 15일)

자유당 정권 붕괴 후 내각제 개헌으로 민주당이 집권하나, 신·구파의 대립과 사회 불안으로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 박정희의 군사 정부가 들어선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로 다시 헌법을 개정한 뒤 민주공화당을 창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다. 야권에서는 윤보선, 허정, 송요찬 등 6명이 출마했으나 허정과 송요찬이 후보직을 사퇴, 민정당의 윤보선이 사실상의 야권 단일 후보로 박정희와 대결하게 된다. 선거 운동이 시작되자 윤보선은 박정희의 공산당 전력을 문제 삼으며 사상 논쟁을 벌였다. 또한 증권 파동 등 4대 의혹 사건도 박정희에게는 약점이었다. 때문에 조직과 자금에서 월등히 앞선 공화당이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야당의 공세는 대세를 역전시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85%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에서 박정희는 15만 6천여표 차이로 신승(辛勝)을 거둔다.

 

- 6대 대통령 선거(1967년 5월 3일)

박정희와 윤보선이 재격돌했다. 그러나 조국 근대화와 경제 개발을 내세운 박정희는 4년 전과 달리 116만여 표 차이의 여유 있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선거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여촌야도(與村野都)의 전통이 무너지고 표의 동서(東西)현상이 심화됐다는 것이었다.

 

- 7대 대통령 선거(1971년 4월 21일)

재집권에 성공한 공화당 정권은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온갖 탈법이 난무한 6·8 부정선거였다. 그렇게 해서 개헌선을 확보한 공화당은 1969년 9월 14일 3선 개헌안을 변칙 통과시켰다. 그리고 박정희는 세 번째로 대통령에 출마한다. 한편 개헌 저지에 실패한 제1야당인 신민당은 내홍(內訌) 끝에 유진산을 새 당수로 선출했다. 유진산이 박정희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이때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했고, 여기에 김대중, 이철승이 가세하면서 40대 기수론은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 끝에 김대중이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박정희와 숙명의 대결을 벌이게 된다. 김대중은 남북교류와 보안법 개정 등 혁신적인 집권 공약을 발표했고, 박정희는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국토개발을 약속했다. 김대중은 박정희가 총통제로 갈 거라고 경고했고, 박정희는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국민은 박정희를 선택했고, 박정희는 유신(維新)을 선포했다.

 

- 13대 대통령 선거(1987년 11월 12일)

1987년 6월 29일 민정당 대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16년 만에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숙원이던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의 리더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각자 출마의 길을 택한다. 여기에 김종필도 가세하면서 1노 3김의 대결이 벌어진다. 그리고 결과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은 노태우의 승리였다.

 

- 14대 대통령 선거(1992년 12월 18일)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김대중의 평민당에도 뒤져 원내 제3당이 되자, 김영삼은 정치적 도박을 감행한다. 여당인 민정당과 김종필의 공화당 그리고 민주당의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자당을 출범시킨 것이다. 그리고 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가 되어 민주화의 동지였던 김대중과 여?야 대결을 벌이게 된다. 여기에 기업가 정주영이 뛰어들어 아파트 반값 공급 약속 등으로 돌풍을 일으키면서 선거전은 3파전으로 전개되는데, 그 결과 김영삼은 청와대로, 김대중은 정계은퇴라는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이 선거에서 김영삼은 영남에서, 김대중은 호남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임으로써 지역감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 15대 대통령 선거(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은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국민신당의 이인제 세 후보의 대결이었는데, 세 사람 모두 강점과 약점이 있었다. 이회창은 여당 후보라는 프리미엄과 ‘대쪽’이라는 깨끗한 이미지가 강점이었으나, 대통령 김영삼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지 못한 데다 친화력 부족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김대중은 경륜에서는 다른 후보에 비해 월등했으나, 정계은퇴 약속을 번복함으로써 대통령병 환자라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었다. 거기에 사상 전력도 시비 거리가 되었다. 한편 이인제는 나이가 젊다는 것과 5공 청문회 스타로서의 명성이 강점인 반면 한나라당 경선에 불복, 탈당한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세 사람의 대결에서 이회창은 50% 가까운 지지율로 초반 우세를 보였으나,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에 발목을 잡혔다. 거기에 대통령 아들의 비리와 외환위기 사태는 여당 후보로서의 이점을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이인제가 초반의 상승세가 꺾였다고는 해도 여권 표를 잠식한다는 것도 이회창의 고민이었다. 반면에 김대중은 김종필과의 DJP 연합을 성사시키고, 새롭게 시도된 TV 토론에서도 자신의 사상 문제를 해명함으로써 보수층의 우려를 불식시켜 나갔다. 그리고 선거에 임박해 터진 외환위기 사태는 ‘준비된 대통령’, ‘경제 대통령’을 자임해 온 김대중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김대중은 대권에 도전한 지 26년 만에, 그리고 네 번의 출마로 그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 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 등장인물

- 제1공화국

* 이승만 - 초대·2대·3대 대통령.

* 이기붕 - 이승만의 충실한 추종자. 4·19로 비극적인 최후.

* 신익희 - 임정요인으로 국회의장 역임. 3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급서(急逝).

* 조병옥 - 경무부장, 내무장관 등을 역임한 강골(强骨)의 정치인. 4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미국에서 수술 받고 사망.

* 장면 - 주미 대사 등을 지낸 합리적인 정치인. 내각제 개헌으로 초대 국무총리가 됐으나, 5·16으로 실권(失權).

* 이범석 - 무장 독립 운동을 했으며, 이승만의 후계자를 꿈꾸었으나, 이승만에 의해 좌절.

* 그 외 다수.

 

- 제2공화국

* 박정희 - 쿠데타로 집권. 18년간 대한민국을 통치. 공과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

* 김종필 - 5·16 쿠데타의 주역으로 박정희 이후를 꿈꾸었으나, 끝내 2인자에만 머뭄.

* 윤보선 - 박정희와 두 차례 대선에서 격돌. 이후에는 민주화 운동에 매진.

* 김영삼 - 26세에 국회의원에 당선. 순조로운 의정활동을 하며, 40대 기수론을 제창.

* 김대중 - 낙선을 거듭하다 어렵게 당선. 언변이 뛰어나 대변인을 주로 맡음. 40대 기수론에 힘입어 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대결.

* 그 외 다수

 

- 제5공화국 이후

* 전두환 - 12·12 쿠데타로 집권. 그의 통치 기간 중에 가장 많은 반정부 운동 발생.

* 노태우 - 물태우라는 별명답게 무색무취한 언행. 보통사람을 자처.

* 김영삼

* 김대중

* 김종필

* 이회창 - 대쪽 판사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대선에서 실패.

* 정주영 - 저돌적인 성격으로 기업 경영에는 성공했으나, 정치에서는 실패.

* 이인제 - 5공 청문회로 인기를 얻었으나, 경선 불복의 멍에를 벗지 못해 좌절.

* 그 외 다수.